바간 셋째 날
역시 또 잠을 못 잤다. 어제 체크아웃인 줄 알았던 내 중국인 룸메와 하룻밤 더 함께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젯밤 내가 밥을 먹고 돌아왔을 때 프런트에서 나이 있는 직원과 크게 실랑이를 하고 있었는데 정확히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원래 23일 밤 떠났어야 했던 것 같긴한데 의사소통에 오류가 있던 건지 한참을 싸워대고서는 결국 떠나지 못하고 하루를 더 머물게 되었다. 어제 꽤나 바쁜 스케줄을 보냈던 건지 싸워대느라 힘들었던 건지 전날보다 더 거세진 코골이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대신 오늘은 베개로 귀를 막는 등의 갖은 애를 쓰기보다는 조심스레 일어나 옷가지를 챙겨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5시가 되자마자 바이크 샵으로 가 어제와 똑같은 신형 바이크를 대여했다. 바간에서 3일째 아침이자 마지막 아침의 피날레는 일출로 마무리하고자 함이었다. 전날 만난 옆방 한국 여행자에게 5시에 함께 일출을 보러 가자고 이야기했었는데 5시 10분이 되어도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안 되겠구나 싶어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일출 전 바간의 새벽은 일몰 후 바간의 밤보다 더 칠흑처럼 어둡고 바이크의 전조등이 아니라면 무엇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했고 고요했다. 첫날처럼 몸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미얀마 바간 도시에는 가로등 시설이 모두 완비되어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바이크 등에 의지해서 가야 하는 길이 더 많았다. 평지길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오르막 내리막이 있을 땐 깜짝 놀라는 등 가는 길은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다. 30분은 족히 걸릴 길을 20분 만에 가야 하니 마음은 급했고 앞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또 문제가 생겼다. 대놓고 떠먹여 주는 구글 맵 지도를 또 잘못 본 것. 워낙 길치라 이제까지 이런 일이 종종 있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다급하진 않았는데 이번엔 일출 시간이 있어 마음이 몹시 급한데 도대체 여긴 어디란 말인가? 건물 같은 특이한 특징 점 없이 고만고만한 나무, 숲, 파고다 뿐인 바간에서 지도를 눈앞에 두고도 길치는 헤매이고 있었다.
일출
헤매고 헤매다 어느 작은 길로 들어가 가다보니 주차된 버스에 자동차, 바이크까지 눈에 띄었다. 막상 가보니 어제 일몰을 봤던 냥우타운쉽이다. 벌써 해는 떠오르려 하고 원래 가려던 곳은 망한 거 같고 여기랑 나랑은 운명인가 보다 하는 마음으로 다시 어제의 그 언덕을 올랐다. 어제와 달리 중국 단체 관광객이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버스만 몇 대가 주차되어 있는 걸로 봐도 최소 100명 이상은 되는 인원이었다.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가장 앞자리에 자리를 잡은 중국인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해를 손으로 받치고 있는 포즈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물론 그 부분은 문제가 없었다. 단, 그들이 좀처럼 다른 관광객들에게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어제 일몰 같은 경우 앞에 자리한 사람들은 몇 컷의 사진을 남기면 뒤에 사람이나 안 좋은 자리의 사람이 올 수 있게 물러나 주거나 몸을 조금 옆으로 비켜주는 식이었다면 오늘은 그런 배려는 결코 볼 수 없었고 중국 관광객들이 단체로 빠져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들의 선점한 자리를 꼿꼿이 지켰다. 몇몇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에 혀를 내두르며 불만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해가 다 떠오르고 단체 관광객이 떠나가고 한적해진 일몰 포인트엔 아직 꽤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는데 열기구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열기구는 10월을 시작으로 연초까지만 운행하는데 가장 절정은 12월에서 1월이 가장 예쁠 때라고 한다. 그 사실까지 알고 간 건 아니었는데 마침 그곳에서 바간에 올 때 나와 같은 버스를 타셨던 한국 분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어 이야기 나누며 얻은 팁이었다.
그 와중에 또 사고를 하나 치고야 말았는데 어젯밤 플러그를 제대로 꼽지 않아 완충되지 않은 핸드폰을 들고 나왔었는데 문제는 항상 내 몸처럼 들고 다니던 보조배터리를 두고온 것이었다. 아침나절 헤매느라 남은 배터리는 모두 소진되어 전원이 꺼져버렸고 구글맵 없이 이곳에 혼자 온 나는 숙소에 갈 방도가 없었다. 이래저래 아침마다 배터리가 문제였다. 바간행 버스에서 만난 한국 관광객(이하 일출 멤버)에게 충전기를 빌리고 미얀마 관광객에게 배터리 충전 케이블을 빌려 간신히 미얀마 바간 한복판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는 면하게 되었다.
핸드폰을 충전하는 동안 열기구가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많이 떠오른 건 아니지만 일출만큼이나 놓치기 아까운 풍경이었는데 12월에 수십 개의 열기구가 떠오르며 하늘을 수놓는 풍경은 상상만 해도 설레였다.
Arthawka B&B
일출을 보기 위해 이르게 서둘렀던 탓에 허기가 졌다. 숙소에 돌아와 조식을 실컷 먹고서 어제 사온 드래건 프르츠를 깎아 옆방에 묵고 있는 독일 여행객과 나눠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비주얼과 맛에 조심스럽긴 했지만 먹을만한 맛이긴 한데 굳이 또 사 먹을 거 같지는 않은 맛이었달까.
오늘은 바간에서의 마지막 날, 조식을 먹고 짐을 싸러 가기 전 사장님께 이런저런 편의를 좀 봐주실 수 있는지 여쭈었다.
"사장님, 제가 낮엔 약속이 있어서 그런데 가방을 좀 맡겨도 될까요? 아, 그리고 저녁에 샤워실 사용 혹시 가능할까요? "
"음, 그냥 체크아웃 시간을 미뤄줄게요. 오후 3시까지 어때요?"
"그래도 될까요? 그런데 저 3시보다 더 늦을 수도 있어요"
"그럼 그 이후에는 프런트에서 맡아둘게요. 그리고 샤워는 얼마든지 하세요. 대신 우리 후기 잘 써주세요."
"그럼요, 너무 감사합니다"
사실 이 사장님과는 약간의 일화가 있는데 나는 그곳에 묵었던 이틀 동안 그를 이곳의 총괄 매니저로 착각하고 있었고 미얀마인으로 보이지 않는 그의 외모와 영어 엑센트를 보고 인도인이지 않을까 하는 내 맘대로의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2일째 저녁 지난번 인도 여행 때 가져가서 반응이 좋았던 율무차를 그와 내가 사장님이라고 착각했던 중년의 여자 직원분께 "코리아 스타일 짜이"라며 타드렸다. 그러면서 내가 그에게
"당신은 게스트하우스의 가장 높은 매니저이신가요?"
"아뇨, 난 이곳의 사장이에요. 내가 매니저인 줄 알았나요?"
"아... 아니요. 너무 젊으셔서"
이 광경을 옆에 앉은 직원분이 율무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재밌다는 듯 지켜보고 있고 나는 진땀이 흘렀다. 거기서 멈추면 좋았으련만 실수를 한번 터뜨린 입은 연속 폭탄을 터뜨려댔다.
"그럼 혹시, 인도 사람인가요?"
"아니요. 스리랑카 사람이에요"
"아, 너무너무 미안해요"
아.......... 나는 무례함을 끝판을 찍어버렸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차이나? 재팬?"에 시달려놓고 정신 못 차린 생각 없는 질문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잘도 던지고 있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건네자 사장님은 웃으며 괜찮다고 이해한다며 오히려 나를 다독여 주었다. 율무차 타임을 가지며 이 게스트하우스뿐 아니라 같은 이름의 맞은편 호텔도 사장님의 소유로 낮에는 주로 호텔에서 업무를 보고 있어 아침과 밤에만 게스트 하우스에 나타나고 계시단 이야기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불편한 게 있다면 직원에게 말하거나 호텔로 찾아오라고 마지막엔 코리안 스타일 짜이 무척 맛있었다는 인사도 잊지 않으셨다.
이렇게 어제의 실수로 내 편의를 봐달란 말을 건네기가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으나 오히려 나서서 더 편의를 봐주신단 말씀에 감동이 밀려왔다. 그깟 후기 백번이라도 더 써드릴 수 있죠.
사장님의 배려로 빡빡하기만 할 것 같던 내 오전이 오랜만에 여유를 부리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조식만 먹었다 하면 태양 아래로 질주하고 나섰었는데 오늘은 느긋하게 모닝 빨래도 하고 짐도 싸고 룸메가 퇴실한 도리토리 룸을 독차지도 해보고 모자란 잠을 자지 않아도 피로가 풀리는 시간이었다.
느긋한 오전을 마무리한 뒤의 점심은 수제 햄버거로 정했다.
일출 보러 가서 만났던 같은 일출 멤버님과 약속 아닌 약속을 잡아두었던 터였다. 숙소에서 편의를 봐줄지도 모르고 동행 분들과도 의논을 해봐야 하는 부분이라 몇 시쯤에 갈 수 있으면 갈게요. 라고 두리뭉실하게 해 둔 점심 약속이었다.
내 생에 첫 수제버거
숙소 측의 편의는 약속받았고 동행분들과는 오늘도 각자 편한 대로 돌아다니는 쪽으로 방향이 정해지면서 아침에 약속했던 시간에 맞추어 버거집에 갔지만 일출 멤버님은 계시지 않았다. 어렵사리 오긴 왔으니 혼자라도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갔는데 다행히도 얼마 뒤 나타나 주신 덕에 혼밥 신세를 면하게 되었고 오히려 나중에 B님과 A님까지 합류해 오랜만에(?) 왁자지껄한 식사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곳은 물가가 비싼 바간 치고도 햄버거 가격이 좀 있었는데 우리나라 수제버거 가격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패스트푸드점 햄버거 가격만큼은 되지만 그런 높은 가격에도 손님이 언제나 와글와글할 만큼 인기 음식점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말곤 죄다 외국인들로 만석이었다.
한국에서 4년 일해서 모은 돈으로 이곳에 햄버거집을 차리셨다는 사장님은 한국인들을 무척 반가워하셨다. 일출 멤버님은 동남아 여행이 처음인데 미얀마 음식이 도통 맞지 않아 고생 중이었고 유일하게 먹을 수 있던 집이 바로 여기였다고 한다. 덕분에 며칠 사이 단골로 문턱이 닳도록 들락 거린 일출 멤버님은 사장님과도 이미 꽤나 친해진건지 사장님이 몇 번이고 맛은 어떤지 부족한 건 없는지 등을 유독 우리 테이블만 찾아와 자주 챙겨주실 만큼 그는 이곳의 vip로 등극한 듯 보였다.
1년에 햄버거를 2,3번 먹을까 말까 할 만큼 관심이 없는 음식이라 사실 나는 그때까지 한국에서도 수제버거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미얀마에서 먹은 수제버거가 내 인생의 첫 수제버거인 셈이다. 평균 수제버거 맛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맛에도 꽤나 맛있었고 햄버거를 좋아한다는 분들의 입맛에도 평이 좋았던걸 보면 입맛을 타지 않는 확실한 맛집인 것은 분명하다.
한참을 햄버거 하나 놓고 웃고 떠들고 왁자지껄하게 수다 꽃을 피우던 넷은 오후 3시가 훌쩍 넘어서자 다들 제갈길을 가기 위해 흩어졌다. 분명 혼자 다니면 너무 외롭고 무서울 것 같아 어렵사리 구했던 동행분들이었는데 이제 그분들보다 내가 더 혼자 다니는 것에 별 거리낌이 없어져 있었다.
아난다 사원(아난다 옥 짜웅)
사실 내가 어제 파잉파이를 만나러 갔던 곳은 사실 아난다 사원이 아니었다. 아난다 사원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그곳은 아난다 사원이 아니었다. 어쩐지... 무슨 세 개의 통로와 표정이 변하는 불상이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가 찾을 수 없더라니... 그래도 대신 파잉파이와 놀았던 시간이 재밌었으니까. 길치의 실수는 가끔 이렇게 뜻밖에 선물을 안겨주기도 하는 재미가 있는 것 같다. 물론 결과가 좋을 때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만
드디어 제대로 찾아간 아난다 사원은 역시 유명세만큼이나 규모가 어제와는 달랐다. 1105년에 지어졌다는 아난다 사원은 동남아 불교사원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훌륭한 건축양식을 가진 사원이라고 한다. 특히 유명한 것은 표정이 변하는 아난다 사원의 불상(9.5m 높이의 목조 도금의 불상인 본존 4불)
아난다 불상 중심으로 두 군데의 동굴같이 어둡고 높은 세 개의 통로가 둘러싸고 있는데 가장 중앙의 통로는 왕의 통로로 왕만이 다닐 수 있는 통로이고 두 번째 통로는 관료들이 다니는 통로 세 번째 가장 바깥 길은 백성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라고 한다. 그런데 왕이 다니는 통로에서 불상을 바라볼 경우 불상은 매우 근엄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지만 백성들이 다니는 가장 바깥쪽에 가서 바라보는 불상은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왕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한 자리인지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언제나 붓다가 왕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각성시키려던 무언의 압력? 같은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한편으론 발걸음을 조금만 더 뒤로 옮겨 백성과 가까워 지려 할 때 그 왕은 비로소 참 붓다를 만날 수 있다라는 이중적 의미가 담겨있진 않았을까? 라고 혼자 생각해 보았다.
어둡고 높고 마치 동굴 같은 아난다 사원의 내부에는 부처의 생애를 묘사한 다양한 석조물들과 불상들로 벽면 가득 뭐 하나 놓치고 갈 수 없는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사원이었지만 가이드를 대동하고 간 게 아니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옆에는 이미 일본어, 영어 등의 가이드와 함께 온 관광객들이 나는 알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실컷 듣고 있는 모습이 부럽기까지 했다. 잠시 일본인 팀 근처에 서성이며 귀동냥해서 들어보기도 했지만 도둑질 하는 기분이 들어 금새 그만두었다.
아난다 사원은 외관 또한 무척 아름다웠다. 건축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내가 보아도 잘 만들어진 사원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아쉬웠던 건 분명 이 아름다운 외관에도 내관만큼이나 재미난 건축양식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있을 것만 같은데 그런 속내는 하나도 알지 못한 채 눈만 즐기고 가야 한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만약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고 누군가 미얀마 바간에 가게 된다면 나는 아난다 사원은 꼭 한번 가보라고 추천해 주고 싶다. 유적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놀이터나 다름없을 만큼 재미난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단, 미리 공부를 해가도 좋겠지만 국내 자료로는 알아볼 수 있는 게 너무 적으니 조금 비용이 들더라도 가이드를 고용하는 등의 방식을 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