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월 26일
숙소
오후 4시가 넘어섰을 때쯤 우리가 하룻밤 묵을 산속 깊은 절에 도착했다. 양철지붕과 양철 불탑이 있는 산속 절에는 어린 동자승들과 스님들 그리고 그들을 돕는 남자 몇 명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우리가 잘 곳은 대법당 한편에 천으로 칸막이로 공간을 나눠놓은 구석이었다. 우리 옆 천막에는 올 때 만났던 2박 3일 팀이 머물 곳이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담요 7세트가 양쪽으로 깔려 있었다. 나는 이나, 로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담요를 빨긴 했을까? 하는 상상은 애초에 하면 안 된다는 걸 나는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고산지대에서 이불 빨래라는 건 말조차 존재하지 않는 일이고 이건 그들이 더러운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물이 부족한 고산지대에 맞는 어쩔 수 없는 방식이다.
가방을 내려놓자 가방 끈과 온몸에서 땀냄새가 진동했다. 이미 인터넷 사진으로 보긴 했지만 혹시나 세수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 샤워장이란 곳에 가보니 사진처럼 벽만 세워져 있고 시멘트로 만들어진 통에 담긴 빗물이 샤워용 물인 듯했다. 물 위에 날 벌레며 낙엽 등등이 둥둥 떠 있는 걸 보고 돌아가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간이 세수를 했다. 머리 감기는 포기했다. 이나와 로미는 근처에 있던 슈퍼에서 생수를 사 와 샤워까지 했다고 하는데 문도 달려 있지 않은 그 샤워실에서 혼자 샤워할 용기는 나지가 않았다.
후기에서 다들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는다고들 했는데 이번에 함께 머물게 된 사람들은 2박 3일 팀을 포함해 이나와 로미처럼 생수로 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국 그 빗물로 샤워까지 하는 사람까지 나타나는 등 아마 그때 그때 멤버들에 따라 씻고 말고의 분위기는 그때 그때 다른 듯했다.
나는 비위가 강한 편이라 대법당 한편에 마련된 이부자리도, 물티슈 샤워도 다 괜찮았는데 이 절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역시 화장실이었다. 점심을 먹었던 민가 재래식 화장실도 무난하게 잘 사용했었지만 이 절의 화장실은 예외였다.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지만 전혀 관리되지 않은 재래식 화장실로 한 번 들어갔다가 헛구역질 한 뒤로는 그냥 물을 마시지 않기로 했다.
공포의 화장실
동자승들과 보이스 번역기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고 조금 이르게 나가 있을까 하고 나왔을 때 동자승들이 옹기종기 모여 공부하는 모습이 보였다. 입꼬리가 씰룩씰룩, 아이를 좋아하는 내가 이런 순간을 놓칠 수 없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나에겐 보이스 번역기라는 무기가 있었다.
10살 전후의 동자승들에게 내 무기는 바로 모두의 관심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인 것이었다. 처음 밍글라바라고 할 때까지만 해도 수줍어 하더니 보이스 번역기로 말을 걸자 너도 나도 핸드폰에 대고 말을 하고 싶어 난리가 났다. 오고 가는 대화는 별 것 없었으나 대화 내용이 중요하겠는가. 그들에겐 이 처음 보는 신문물로 장난치는 게 더 중요한 꼬마들이었다.
핸드폰에 한 마디씩 해보고는 신이 나서 하고 있던 숙제는 이미 뒷전이 되어버렸고 핸드폰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손을 뻗고 다음이 제 순서가 되기만을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기다릴 뿐이었다. 한참 그들과 보이스 번역기로 놀고 있는데 뒤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오는 길에 나에게 바나나도 건네주고 말도 걸어주고 장난도 치던 눈이 참 파랗던 2박 3일 팀의 멤버였다.
그의 눈이 동자승들만큼 반짝이며 내 보이스 번역기에 관심을 쏟아냈다. 뭘로 대화하는 거냐고 묻길래 어플을 알려주자 하늘색 파란 눈이 더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당장 어플이라도 깔 줄 알았는데 그냥 옆에 앉아 아이들의 영어 숙제를 봐주기 시작했다. 그가 그 팀의 피리 부는 사나이인 건지 그가 오자 그 팀의 젊은 사람들이 죄다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굉장한 어플이 있다며 말해주어 순간 엉겁결에 2박 3일 팀의 관심 어린 시선을 한 번에 받게 되었다. 우리 팀 벨기에 남자까지 합류해 보이스 어플은 그날의 가장 핫한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축구하는 동자승들
숙제하는 동자승들조용히 아이들과 몇 마디 하고 싶었을 뿐인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아이들 주변을 둘러싸 버렸다. 그때 한 아이가 내 핸드폰을 들고 가 한마디 건네 왔다.
"밥은 먹었어요?" 숟가락으로 밥을 뜨는 제스처를 하며 물어왔다.
"아니"
"배 고플 텐데 어서 밥 먹어요"
어린 장난꾸러기처럼만 보이던 까까머리 동자승은 그 말을 한 뒤 자기 숙제로 눈을 돌렸다. 밥 먹으라는 말이 이토록 울컥하는 말이었던가? 하루 종일 잘 잠가뒀다고 생각했던 외롭고 속상했던 마음의 빗장을 톡 하고 건드리는 말이었다. 그 동자승 앞에 더 있다가는 주책맞게 눈물이라도 글썽거릴까 싶어 먼저 급하게 자리를 떴다.
대법당 왼쪽 정자라고 하기엔 꽤 넓고 긴, 벽은 없고 지붕만 있던 곳에 두 개의 상이 차려지고 있었다. 오른쪽의 것이 우리 팀 것이었는데 아직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먼저 선점하고 앉고 뒤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늘 별로 얘기해보지 않았던 벨기에 남자가 나에게 굉장한 어플이 있다며 나를 화두에 올렸다. 아니 보이스 번역기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이 수선인지 나로선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다들 꽤나 신기해했다. 벨기에 남자는 어플 이름을 물어 갔는데 그의 핸드폰은 유심을 구매하지 않아 다운로드할 수 없었고 내 핸드폰으로 프랑스어와 한국어로 설정을 부탁하더니 말을 걸어왔다. 오늘 즐거웠는지? 벨기에는 와봤는지? 등의 사소한 대화였지만 앞서가던 팀 사람들 중에 가장 많은 대화를 해본 순간이었다.
절밥은 원래 다 이렇게 맛있는 건가요?
드디어 식사가 차려졌는데 식사도 전에 전기가 나가버렸다. 깊은 산골에 있는 절이다 보니 전력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엉겁결에 예상치 못한 꽤 분위기 있는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제리는 우리와 함께 식사하지 않고 음식만 내다 주고는 사라져 버렸고 7명만이 분위기 있는 식탁에 둘러앉았다.
식사는 최고였다. 이보다 더 맛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낮엔 나와 벨기에 남자만 그릇을 다 비웠는데 이번엔 네덜란드 남자도 한 그릇을 다 비울 정도였다. 절밥이다 보니 비건인 이나와 로미도 마음 놓고 꽤 먹성 좋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한 그릇을 뚝딱하고 다 비웠는데 미얀마에 온 이후 어제의 중국식 볶음면이 최고의 음식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하루 만에 그 순위를 뒤집는 밥상이었다. 양곤 선원에서 먹었던 음식도 그렇고 한국 절에서 먹는 절밥도 그렇고 절밥은 세계 공통으로 맛있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아는 스님께 정말 진지하게 이 절밥 미스터리에 대해 질문드렸는데 그저 웃기만 하실 뿐 딱히 별말씀은 없으셔서 여전히 내 안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고양이 / 이 곳에서 고양이는 무법자이다. 어디든 나타난다.
뭐 사실 식사할 때 문제는 음식 맛이 아니라 절에 사는 고양이들이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 이불 위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던 고양이와 또 다른 토실토실한 고양이 두 마리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식탁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동물을 무서워한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무서워하는 편이라 그 고양이들이 먹을 것을 얻으러 테이블 밑으로 들어와 불쑥불쑥 나타날 때마다 기절할 지경이었다. 하필 고양이 중 한 마리는 내 옆에 앉은 벨기에 남자의 무릎에 앉는 것에 꽂혀 더 자주 내 주변에 나타나 밥을 먹다가 수시로 도망을 가야 했다. 제리는 고양이를 절대 손으로 만지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2박 3일 팀에서는 피리 부는 사나이 격인 그 하늘색 눈의 남자가 고양이에게 먹을 것 등을 주며 쓰다듬으며 안아대고 있었다. 제리가 몇 번 쫒아내 주었지만 고양이는 계속 벨기에 남자 앞에 나타났고 나는 매번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듯 도망을 쳐야했다. 그런 내가 어지간히 이상해 보였던건지 하늘색 눈의 남자가
"왜 그래요? 고양이일 뿐이에요"
"나는 동물을 무서워해요."
"뭐라구요?"
"나는 동물을 무서워 한다구요. 무섭다구요."
그 순간 그 예쁜 하늘색 빛 눈동자가 세상에서 처음 보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한 눈빛이 되어 있었다. 말을 하지 않을 뿐 어떻게 동물을 무서워할 수가 있냐는 말을 그의 눈이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이해하건 못하건 나에게 그 상황은 공포상황이었는데 다행히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나 말고 한 명 더 있었는데 바로 네덜란드 남자였다. 유일하게 고양이만 싫어한다는 그도 고양이가 나타날 때마다 벌떡 벌떡 일어나 피하느라 바쁜 탓에 우리 테이블엔 고양이 출입금지 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그렇다고 고양이들의 벨기에 남자 사랑이 멈춘 것은 아니라 식사시간은 하염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다들 고양이와의 사투 속에서도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과일까지 먹고 이나와 로미는 어느새 자리를 떠서 사라졌고 다들 얼추 식사를 끝낸 듯 보였다. 그 와중에 가장 길게 혼자 끝까지 식사를 하고 있던 나도 계속되는 고양이들의 벨기에 남자 사랑과 (아니 오라고 불러주고 쓰다듬어 주고 먹을 것을 주는 건 하늘색 눈동자의 남자인데 도대체 왜 벨기에 남자한테 꽂힌 걸까?) 이나와 로미가 없는 식사자리가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해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리를 떴다.
아름다워서 더 외로운 그런 밤
하늘에 은하수가 일렁였다. 이번 여름 고산지대에 여행 갔을 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쏟아질 듯한 별과 은하수가 미얀마 산골짜기 하늘 위를 수놓고 있었다. 어찌나 반짝이는지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려 내 옆에서 환하게 비춰줄 것만 같았다. 운동장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목이 꺾일 만큼 젖혀 은하수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식사 자리를 떠나지 않은 벨기에와 네덜란드 커플들의 웃음소리가 고요한 산속의 절간에 울려 퍼졌다. 이나와 로미는 보이지 않았고 운동장 또 다른 한 켠에는 정말 그 하늘색 눈동자의 남자가 피리 부는 사나이라도 되는 건지 다들 그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은하수를 카메라에 담는 모습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하늘에 은하수가 너무 아름다운 날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은하수가 참 아름답다"라고 함께 감탄 나눌 이 한 명이 없었다. 새삼 참 그게 서글퍼졌다. 너무 아름다워서 더 외로워지는 그런 밤이었다.
별을 찍어보고 싶었지만 똑딱이 카메라의 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