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2) 꿈 앞에서 좌절해야만 했던 그들의 슬픈 이야기
평창 동계올림픽 현장 취재가 확정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꿈의 무대가 열리기 한 달도 채 안 남았던 때 또 하나의 '병크'가 터진 것이다.
스키협회의 행정착오 실수로 인해 스키 국가대표팀 절반이 평창에 설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이 스포츠면을 뒤덮은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선수였던 노선영 선수가 당초 여자 매스스타트 경기에 출전하기로 돼 있었는데 빙상연맹이 매스스타트 출전 선수 규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탓에 스포츠면은 홈에서 열리는 올림픽까지도 온통 연맹과 협회에 대한 무능함에 대한 비난과 성토글로 도배가 됐다.
(*참고: 올림픽 매스스타트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인전 출전권을 확보해야만 한다는 국제빙상연맹의 규정이 있다. 그런데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고 노선영 선수는 매스스타트 출전권 확보에만 신경을 썼고 결국 개인전 출전권은 확보하지 못했기에 뒤늦게 평창 올림픽 출전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7년을 이 분야를 취재하면서 동계스포츠 분야가 환경도 지원도 매우 열악하다는 사실은 알았는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동계올림픽을 앞두고도 이런 일을 겪는 것이 또 한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되면 '그냥 그렇지..' 수준의 체념과 득도(?)를 하게 된다.
나는 이 사건으로 피해 본 선수 가운데 스키 국가대표인 경성현 선수를 인터뷰했다. 연락처가 따로 없어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그의 계정을 찾아 DM 메시지를 보냈고 경 선수가 답을 준 덕분에 운 좋게 전화 인터뷰가 가능했다. 수화기로 넘어 들린 그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격앙 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너진 꿈이 현실이라는 것과 함께 한숨과 원망이 뒤엉켜 있었다. 자신에게 가장 높은 꿈이었는데 그것이 한 순간에 그것도 내 실수가아닌 타인의 실수로 인해 억울하게 기회를 박탈 당했으니 그 심정을 말이나 글로 다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 참고: 2018년 1월 경성현 선수와의 인터뷰 기사
경 선수 인터뷰를 빠르게 하고 난 후 다음날 편집부에 원고를 송고했고 신문사 메인 화면에 기사가 게재됐다. 기사가 나간 다음날 자정 무렵 난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제 억울한 사연을 기사로 내주실 수 없나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연의 주인공은 프리스타일 스키 하프파이프 종목의 김광진 선수였다. 이건 내가 처음으로 타인으로부터 받아온 인터뷰 요청이었다. 김 선수가 타던 종목은 국내에 훈련할 수 있는 스키장과 시설 자체가 없어 해외 원정이 필수인 종목이자 스키 매니아들에게도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종목 이었다. 평창의 직전 대회였던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는데 김 선수는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었다. 그리고 평창에서도 홈에서 열리는 세계 최고의 대회에 오를 일만 남았다.
하지만 갑자기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졌다. 평창이 개막하기 약 2달여를 앞두고 김 선수는 왼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제 컨디션은 둘째치고 과연 대회에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 불투명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저 제발 그 설원 위에서 뛰고 싶었기에 그는 전국의 모든 병원 수소문해 제발 평창에서 설 수있게만 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렇게 극적으로 수술하고 필사적인 재활을 거쳐 몸을 회복해 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대한스키연맹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연맹 관계자도 아닌 당시 대표팀의 외국인 지도자로부터 건네 받은 통보는 '평창 출전 불가능'이었다. 보통 선수들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면 대회 현지에서 공식연습 등의 상태를 보고 최종 기권 여부 결정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아직 올림픽 개막까지 조금 남은 상황에서 자신이 포기 의사를 밝히지도 않았는데 협회의 일방적인 결정 하나로 그가 어렵게 따낸 평창 올림픽 출전권은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꿈이 타인에 의해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으니 이 선수에겐 목숨을 앗아가는 것만큼 괴로웠을 것이다.
나는 문자를 받은 직후 곧바로 선수에게 답장을 보냈고 다음날 선수와 전화통화를 하며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는 말 한마디를 내뱉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수화기너머 목소리 속에는 억지로 눈물을 참아내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대로 알 수 있었다. 그의 말 중 이 한 마디는 더 이상 화도 낼 수 없었던만큼의 아픔과 무기력함, 그 속에서 이 모든 것이 제발 꿈이길 바라는 그의 마지막 바람이 뒤섞여 있었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이었다면 이렇게 간절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셔서 한국에서 꼭 후회 없는 경기를 하겠다는 것이 다치기 전 제 목표였습니다."
"주변에서 '미래도 없고 밥이나 먹고 살 수 있냐'고 얘기를 들었을 정도로 모두가 반대했어요. 하지만 '남들이 반대한다 해서 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 않냐'고 되물었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저는 재활 치료를 성공적으로 끝내서 꼭 평창에서 완주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었습니다."
(참고: 올림픽 개막 4일전에 낸 김광진 선수의 인터뷰 기사
참고 참아왔던 말을 내뱉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두 편의 선수 인터뷰 기사는 내가 지금껏 해본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고 쓰라린 인터뷰였다.
김 선수의 말이 내 마음에도 정말 세게 다가왔다. 처음 동계스포츠 기자를 시작했을때 '누가 그런종목을 보냐', '그거 한다고 뭐가 얼마나 달라지냐'라는 등 나를 응원하기 보다는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던 스포츠를 깎아내리거나 그냥 자포자기 하는 뉘앙스의 말을 많이 했다. 나는 그들에게 '만약 너가 좋아하는 야구나 축구를 두고 그런 말을 하면 기분이 어떻겠냐'며 잔뜩 흥분한 말로 응수했다. (사실 지금 생각보면 그리 흥분할 가치도 없던 말이었다. 그냥 차라리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ㅎㅎ) 그것이 더 성숙(?)돼 보일 것 같기에..)
하지만 난 왠지 이 자리가 끌렸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끝까지 하고 싶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기사를 보고 또 선수와 스포츠, 그리고 나를 응원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20대의 나에게 동계스포츠 기자는 바쁜 일상 속의 쉼터이자 내가 좋아하는 취미, 그리고 내가 열정을 태울 수 있는 가장 최선, 가장 높고 아름다운 것이란 것을 내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펜대를 놓고 싶지 않았고 김 선수처럼 그냥 그렇게 조용히 내 갈길을 걸었다.
그렇게 걷다보면 조금이라도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 믿었고 나는 미래에 더 강하고 빛나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이렇게 기회를 박탈당한다면 그 억울함과 분노는 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냥 체념해야 할까 아니면 끝까지 저항하고 화를 내야 할까... 그 어떤 것도 그 선수들을 응원하고 위로해줄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던 역할은 끝까지 분투를 삼키며 말하는 그의 떨림과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 뿐.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열린 첫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여러 명의 선수가 출전 기회를 억울하게 박탈 당했고 선수단 규모도 자연스레 줄을 수 밖에 없었다. 선수들이 오로지 이 한 순간을 위해 뛰어왔는데 그렇게 몇명의 선수들이 사라져 가야만 했다.
평창에서 우리는 여럿 기적을 봤다. 팀킴 선수들이 '영미'를 외치며 기적의 은메달을 따냈고, 배추보이 이상호 선수가 스키 종목 사상 첫 포디움 입성, 스켈레톤 윤성빈 선수의 황제대관식, 봅슬레이 4명의 선수들의 포기하지 않았던 은빛 레이스 등이 그러했다. 어쩌면 이들도 그 때의 만화와 같은 기적을 써내릴 수 있었던 선수들이 었을지도 모른다. 그 가늠할 수 없는 꿈과 희망을 빼앗긴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할까.
왜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마저 이렇게 가슴 아파야 한단 말인가... 무거운 침묵만이 흐른 채 하루하루 올림픽 디데이가 그렇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