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3) TV와 현장을 오고가며 보았던 생애 첫 올림픽
2018년 2월 13일 나는 2박 3일 일정으로 인천에서 출발해 마침내 강릉에 도착했다. 그동안 이곳을 여러 번 와봤지만 올림픽이라는 이벤트는 뭔가 달라도달랐다. 왠지 공기부터 모두가 즐길 생각에 들떠 있었다. 1년 전 쯤에 쇼트트랙 월드컵, 4대륙 피겨선수권 등 테스트 이벤트를 취재하기 위해 왔었지만 그 때는 사실 올림픽 분위기를 체감하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그러나 개막하고 난 후여서 그런지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눈으로도 내 몸으로도 느끼기에 충분했다.
택시를 타고 신문사 기동팀과 함께 머물 숙소로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경포호가 눈앞에 펼쳐졌고 저 멀리 한참 대회가 열리고 있는 올림픽파크 경기장이 현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곳의 첫인상은 모두가 함께 웃고 응원하며 함성을 지를 수 있는 무언가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숙소에 도착한 나는 짐풀고 인사만 한 후 곧바로 쇼트트랙 여자 500m 경기 기사를 쓸 준비했다. 이날 최민정 선수가 올림픽 쇼트트랙 경기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에 획득할 것이란 기대감으로 높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시선이 이 경기로 쏠렸다. 나는 곧바로 중계 창을 틀고 모니터링에 들어갔다.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모든 말초신경까지 경기에만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데 결승에서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결승전에서 2바퀴를 남기고 아웃으로 치던 최민정 선수가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는 이유로 실격됐기 때문. 반면 같은 시간 옆 경기장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500m에서는 김민석 선수가 이 종목에서는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동메달을 따내며 이변을 일으켰다. 그 때 나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첫 날부터 엄청 꼬이네. 하하'
우리도 평소 스포츠 경기를 보면 그렇지만 선수의 경기력이나 이전 전적 등을 토대로 대략적으로 어느 경기에서는 누가 이기고 이 경기에서는 메달이 나올 것인지를 어느정도는 예측을 하고 들어가기 마련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앞서 글에서 소개한 대로 평창 현장에 가기 전 나는 신문사 기동팀과 대략적인 경기 취재 일정 스케줄을 짜놓은 후 출발을 했다. 출발 전 대부분의 예상은 쇼트트랙 여자 500m에서 메달이 나올 확률이 높을 것으로 예상했기에 나는 이 경기에 맞춰 최민정 선수의 지난 대회 성적과 경쟁 상대의 성적들을 모두 분석하고 데이터를 준비해 놓고 모니터링 취재를 한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정반대로 그 시간에 다른 경기장에서 열리고 있었던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500m에서 김민석 선수가 깜짝 메달을 따내면서 그야말로 일이 완전히 반대가 된 것이다. 정말 기쁘고 축하한 일이지만 글쟁이 입장에서는 정말 난감해진다. 빨리 나는 곧바로 준비하지 않았던 스피드스케이팅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대회가 대회이니만큼 모두가 속보전쟁을 펼쳤고 거기에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첫 날부터 제대로 이변이 터진 것이다. 올림픽은 흔히 이변이 많고, 메달은 하늘이 내려준다는 말이 선수들한테 있는데 이번에는 기자들한테도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스피드스케이팅 기사를 내고 난 후 다시 숨을 돌리고 쇼트트랙으로 돌아왔다. 선수의 실격은 곧바로 스포츠면에 도배가 되다시피 빠르게 퍼져 나갔고 모든 이들이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실격 장면에서 안쪽에 있던 캐나다 선수도 최민정 선수를 미는 것이 포착됐기에 누리꾼들의 분노가 더했다. 잠시 머릿속으로 고민하던 나는 곧바로 실격에 대한 부분을 집중조명하기 위해 해설위원의 코멘트를 더하기로 했다. 문자를 주고받은 나는 30여분만에 기사를 완성해 보냈다.
그렇게 편집부에 송고 버튼을 누르고 나니 어느덧 시간이 거의 밤 11시가 다 됐다. 인천에서 오후 4시 좀 넘어서 출발했는데 약 7시간이 넘어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뒤늦은 허기짐은 역시 눈치가 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숨막힌 전쟁을 펼치고 나니 그야말로 몸이 뻗어버렸다 그렇게 첫날이 흘렀다.
이튿날에 나는 오전에는 피겨스케이팅 페어 쇼트프로그램, 저녁에는 남자컬링 경기를 취재했다. 취재용으로 미리 예매해둔 표를 들고 입장하니 이제야 알았다. 이것이 올림픽이구나 라는 걸.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경기를 볼 날이 왔구나라면서... 그동안 프레스석에 앉아 온전히 기사를 써야하는데만 집중한 데다가 좋아하는 경기에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마음껏 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다. 앞뒤로 앉은 미국인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나는 한국 선수가 나올때마다 파이팅을 외치며 마음껏 분위기에 취했다.
경기를 취재하기 전 미리 기사를 써놓는 것은 빠르게 글을 완성하기 위한 필수과정이었다. 그래서 평창기간 동안 내내 내 휴대폰의 메모장 기능에는 온통 경기결과 글들을 미리 써놓은 기본 틀로 가득했다. 덕분에 취재석이 아닌 일반석에서 경기를 마음껏 즐기며 속보전쟁을 이겨내며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기 소식들을 전할 수 있었다.
2박3일의 마지막 일정으로 나는 기차에서 썰매황제 스켈레톤 윤성빈 선수의 경기를 모니터링 하면서 인천으로 돌아왔다. 설날이 껴있던 탓에 설날 당일 차례를 지내고 다음날 나는 다시 한 번 올림픽 현장을 찾았다. 이번에는 쇼트트랙 여자 1500m와 남자 1000m, 피겨 남자싱글 프리스케이팅 경기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한 번 현장 경험을 해서 인지 이번에는 꽤나 수월하게 기사를 작성하고 보내기가 어렵지 않았다.
오전의 피겨 경기와 오후의 쇼트트랙 경기가 펼쳐지는 중간에 나는 안목해변에 들렀다. 강릉의 유명지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카페에서 자리를 잡고 그 다음날 열리는 이상화 선수의 스피드스케이팅 경기를 미리보는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강릉역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해 도착한 안목해변을 본 것은 약 10여분 남짓, 나는 해변의 카페를 무작정 들어가 자리를 잡고 또 열심히 노트북에 파일을 열고 기사를 치기 시작했다. 중간에는 해설위원과 통화해 코멘트도 군데 군데 넣어주다보니 약 3-40여분만에 프리뷰 기사가 완성됐다. 예쁜 바다 풍경을 보는것은 사치였고 역시 글쟁이는 모니터를 열심히 뚫어져라 보고 있어야만 한다.
기사를 다 치고 나니 그제서야 내가 주문했던 커피와 빵이 눈앞에 들어왔다. 아주 잠깐 창밖의 해변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이것이 기자들의 올림픽이구나..'
그 날 후 일주일 동안 나는 집에서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평창과 함께했다. 소치 때 한 번 겪어보긴 했지만 아무래도 홈에서 열린 대회이다보니 언론의 조명도 달랐고 그렇다보니 신문사와도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기사 스케줄을 조정해야 했다. 밥상 위에 노트북을 펴놓고 오전에는 피겨, 오후에는 스노보드 등 썰매 종목, 저녁에는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 등 채널을 바꾸는 것이 마치 경기장을 옮겨가는 듯 순서대로 짜여진 루틴을 옮겨가듯이 이동하면서 경기를 실시간을 보며 정신 없이 기사를 쓰고 또 보내고 했다. 당시에는 너무나 바빠 전화 받기도 문자 할 시간도 없다고 매일 투덜됐지만 3년이 흐른 지금 그 때가 아직도 정말 행복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낀다.
17일간의 열정을 끝으로 내가 20대 초반부터 가슴에 품어왔던 목표는 그렇게 이제 추억으로 사라졌다. 평창이 지나간 후 나는 한동안 허탈한 마음에 시달려야만 했다. 특히나 성취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격인 탓에 목표가 없어지고 나면 그로 인한 후유증이 꽤나 크게 찾아온다. 그중에서도 평창은 너무 컸다. 이 순간을 위해 몇년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는데 17일만에 다 없어진 것이니 상상도 하지 못할 허무함이 내 몸에서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내가 엄청나게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였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평창이 열린 기간 동안에만 나는 신문사에 100건이 넘는 기사를 작성했고 이 활약 덕분에 이달의 기자상을 수여 받았다. 소치에 이어 4년 후 다시 한번 같은 상을 받은 것이다. 신문사 홈페이지에 올라온 수상자 리스트에 내 이름이 써있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자축했다. 그리고 인사했다.
'안녕, 반가웠어 나의 올림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