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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소년 Jan 17. 2021

분노, 나를 이끌다 첫번째

(1장-1) 운명처럼 찾아온 내 단짝, 동계스포츠 너라는 존재

“사각사각” "사각사각" 


여러분들은 이 소리를 들으면 어떤 것이 떠오르는가. 사과 깎는 소리, 아주 옛날 연필을 연필깎기에 깎던 소리 등등. 제각기 생각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또렷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고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것...

      

내가 이 소릴 들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연필이 아니다. 추운 빙상장에서 스케이트를 신고 열심히 빙판 위를 제칠 때 듣던 그 소리다. 다리가 제법 아팠지만 달릴 때마다 나던 이 소리와 함께 코끝으로 함께 전해오는 시원한 바람! 아주 어릴 때 유치원 때 롯데월드 아이스링크를 견학 갔을 때 아마도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무언가 꼭 하나씩 기억에 남는 어린시절의 추억이 있다.     


롯데월드 아이스링크 모습. 내 기억으로는 내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탔던 것 같다. 이후 나는 기자로 다시 이곳을 방문했다. 


왜 내가 이미 32살이 된 지금까지도 이렇게 이렇게 동계스포츠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추측하자면 아마도 그건 처음 아이스링크장에 가서 스케이트를 탔을때 왠지 모르게 내 발과 얼음 그 사이에서 뽀드득 하게 느껴졌던 촉감,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넘어질까봐 겁을 잔뜩 먹은 상태에서 스케이트를 움직이면 나는 사각사각 소리, 그리고 내 얼굴과 몸을 스치면서 느껴지던 알 수 없는 바람의 느낌 이 세가지가 정말 좋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원래 운동신경이 정말 없는 내성적인 남자아이였다.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유일하게 운동과 관련해서 하나 잘하는게 있었는데 이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었다. 체육시간때마다 달라기는 항상 꼴등을 따놓은 당상이었고, 물구나무서기 같은건 시도조차 못했다. 체육 6등급은 내 성적표의 공식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스케이트는 처음 탔을때부터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링크장에 방문하는 지금도 다른 운동에 비해 훨씬 빠르게 적응해서 잘탄다. 아마도 내가 그만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여전히 내겐 미스터리와도 같은 문제로 남아있다. 




초등학교 운동회의 대표적인 게임인 줄다리기. 우리 모두 학교에 대한 추억이 있다. 


우리 모두 어린시절의 추억이라는 것을 다들 하나씩 꼭 갖고 있다. 지금은 많이 잊혀진 존재일지 몰라도 다들 집구석 한켠에 가족앨범이나 어릴때 모습을 모두 모아놓은 앨범 하나 정도씩은 다들 있는 편이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그 때 그 시절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만큼 달콤하고 아련히 떠오르는 생각이 우리 인생에 과연 얼마나 될까. 오래된 노래 가사 중에 “지나가버린 어린시절에 노란 풍선을 타고 아름다운 예쁜 꿈도 꾸었지~”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건 꽤나 흔하지만 참 소소하면서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엄마 아빠 손을 꼭 잡고 파란 뭉게구름 떠있는 하늘 아래 함께 나들이를 나갔던 때, 무더운 여름에 강원도의 계곡여행을 갔던 에피소드, 생애 처음 비행기를 타고 신비의 섬이었던 제주도를 갔던 순간 등. 우리에겐 늘 기억에 남는 추억이 가득하다.     


그런 기억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건 아마도 ‘학교’에 대한 추억이 아닐까. 술래잡기 하던 때, 고무줄 놀이를 하던 때, 지겹게만 들리던 학교 종소리와 묵은 때가 잔뜩 끼어있던 칠판 등... 그중에서도 친구와 함께 해가 뜰무렵부터 질 때까지 쉼없이 놀던 그 때는 아마 모든 사람들이 꼭 하나쯤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그런 추억은 없었다. 늘 학교에 대한 생각을 하면 우울해지거나 눈물이 쏟아지는 게 일쑤였다. 여러분들에게 또 한가지 묻고 싶다. 분노라고 하는 것을 혹시 언제 처음 느껴보았나. 분노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그리 긍정적인 어감을 주진 않는다. 무언가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억울함을 느낄 때, 또는 누군가와 다툴 때 우리는 주로 이런 단어를 사용한다.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진 않지만 나는 분노를 아마도 초등학교 때 처음 느껴보지 않았나 싶다. 


초중고 13년의 학교생활 내내 지겹게 따라다니던 꼬리표는 ‘왕따’였다. 초등학교를 갓 입학했던 8살 때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학교에 가기 싫다며 복도가 떠내려갈 듯 울어 ‘울보’라는 별명으로 우리 반은 물론 같은 학년 학생들이 모를 정도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지만 박영진이란 이름을 친구들이 ‘박진영’이라고 놀려 상처를 받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던 것 그것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중학생 때는 한참 키가 자라면서 사춘기가 왔는데 이상하게도 목소리만큼은 다른 남자 아이들처럼 걸걸해지지 않았다. 그로 인해 모두가 “쟤 목소리 이상하다~”라는 말과 시선이 주위를 감쌌다. 제법 빨리 다리털이 자랐는데 너무 더웠던 여름날의 체육수업 때 반바지를 입어 그대로 이미 수북히 자라났던 다리털이 드러났고 다른 아이들 눈에는 그것이 충격과 웃음거리로 다가왔다. 내가 “너희들도 다 이렇게 될거야~” 그러면 키득키득 웃으며 비웃던 그 눈에 나는 또 한 번 좌절했다.      


학교폭력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 사진. 나는 저런 상황을 초중고 내내 겪었던 학생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렇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학교생활의 꽃이라고 하는 수학여행을 난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3학년 때 졸업여행으로 가본 것이 전부일 정도로 참석율이 좋지 못했다. 수학여행을 가지 않았던 중학교 1학년 때는 전교생 가운데 나를 포함해 딱 2명만 가지 않아, 다른 여학생과 함께 교무실에 남아 자습을 했다.      


여행이 끝나고 다시 학교에 학생들로 가득했는데 어느날 모르는 아이들이 나를 불러 데려갔다. 손에 이끌려 간 곳은 바로 옆 반. 알고보니 수학여행 기간 동안 함께 자습했던 여학생이 옆 반의 또 다른 왕따였던 것이다. 그들은 슬슬 자신들의 목적을 내게 드러냈다. “야 얘 놀려봐, 때려봐”. 두려움과 공포속에 나는 어쩔 수 없었다. 이러한 굴레가 13년 내내 이어졌고 어머니가 학교에 자주 찾아오시는 것은 연례행사와도 같았다. 같은 반 학생들이 내 어머니의 얼굴을 모르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 교복이 눈물과 땀 등으로 얼룩졌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솔직히 지금도 이 지긋지긋한 기억들은 내게 주사바늘처럼 고통으로 다가온다. ‘왜 모두에게 있는 학교에 대한 그리운 추억이 나한테만은 밤마다 악몽으로 찾아오는 것인가...’ 그렇게 하늘과 땅을 원망하고 바뀌지 않던 목소리로 부모님을 원망해 가며 나는 세상과의 문을 닫고 그렇게 분노로 가득했던 마음은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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