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1) 세 번 바뀐 장래희망... 한의사에서 출발해 교사까지
직업. 참 요즘 내 나이, 내 세대에서 이 단어만큼 예민한 두 글자도 많지 않지 않을까. 코로나로 인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이미 내가 취업을 하고자 했던 지난 2015년 이후에 20대 실업은 더욱 극심해졌다.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기 너무 힘들어 공무원을 비롯한 공기업 등 공시족들이 급속도로 불어났고 바늘구멍보다도 더 낮은 확률에 목숨을 걸고 공부를 하고 있는지 오래다. 그 직업이라는 두 글자를 갖기 위해서 말이다.
사실 이 직업이란 단어가 이렇게 처음부터 절망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희망이 불어넣어주는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난 어른이 되면 멋진 경찰관이 될 거야~" 이런 달콤한 상상에 젖게 만드는 그런 역할을 했으니깐...
우리나라에서 학교를 나온 분들이라면 다들 너무나 잘 알겠지만 항상 초등학교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다. 바로 직업 희망 조사다. 다들 어릴 적에 어떤 꿈을 적었고 말했는지 기억이 나는가? 음... 나는 아마도 초등학교를 갓 입학했을 때는 어머니의 희망에 따라서 ‘한의사’라고 던 것 같다. 한의사가 뭔지도 모르고 적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 날 TV에서 9시 뉴스를 우연히 보다가 아나운서에 눈이 갔다. 잘생기고 서글서글한 외모에 지금은 정말 지겹지만 당시엔 너무나 멋있어 보였던 넥타이까지 풀세트로 갖춰 입은 정장. 그리고 부드럽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시청자들에게 사건을 전달하는 저 인물. 그 순간 나는 외쳤다. “그래 아나운서다!”라고... 그렇게 나는 직업을 아나운서로 바꿨다.
하지만 중학생 때 사춘기가 오면서 그 꿈은 모두 물거품이 됐다. 다른 남자애들처럼 키도 크고 골격도 커져갔지만 목소리만큼은 미성으로 그대로 남았기 때문이다. 아나운서에게 있어서 목소리는 생명이자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목소리로는 더 이상 아나운서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다들 걸걸해진 목소리에 음악시간이 되면 높은음이 잘 올라가지 않아 온갖 인상을 쓰고 부른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높은 음도 목소리도 너무나 그대로였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저러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늘 기다렸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은행에서 전화를 받으면 성별을 착각하거나 'XX 씨 어머니 아니냐'는 얘기 등을 듣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두 번째 꿈은 그렇게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없어져 가는 그때 나는 부모님에게 “왜 내 목소리만 이래~”라며 대성통곡을 하며 원망했다. 먼 훗날 동계스포츠 전문 프리랜서 기자가 돼 배기완 SBS 아나운서를 인터뷰할 기회가 생겨 만났다. 그때 느꼈던 것인데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정말 아나운서는 약간의 과장을 더하자면 ‘하늘에서 내려주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 내게 세 번째로 직업이 찾아왔다. 바로 요즘 시대에 많은 청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불리는 ‘사’ 자가 들어간 ‘교사’. 중학교 2학년 때 집이 이사를 가면서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배정받아 들어간 반의 담임 선생님이 내가 좋아하던 과목이었던 국사를 가르치셨다. 당차시면서 웃으시는 모습이 정말 환하셨던 그분은 학생들과도 장난도 잘 치시면서 재밌게 학급을 가꿔 가시던 분이셨다.
전학을 온 직후 학교에 적응을 못하고 혼자 있자 내게 제안을 하셨다. “영진아 너 계발활동 동아리로 신문부 들어올래?”. 얼떨결에 선생님의 제안에 끌려 나는 그렇게 신문부에 입성했다, 선생님은 정말 열정적이셨다. 학교 신문은 학교의 얼굴이라고 생각하시면서 신문을 발간하시는 것을 무척이나 아끼시고 중요하게 여기셨다. 선생님의 지도 아래 나는 동아리에서 기사 아이템을 발굴해 내며 활동을 이어갔고, 특히 선생님께서 국사과목을 가르치신 덕분에 당시 한일관계가 지금처럼 악화되면서 불거진 ‘독도문제’, ‘위안부 수요집회’ 등 굵직한 현장에 직접 취재를 가 눈으로 보고 인터뷰를 할 수 있던 기회까지 있었다. 아직까지도 굉장히 선명하고 즐거웠던 추억으로 기억되는 것을 보면 나는 무척이나 신문부를 좋아했던 듯하다.
하지만 그때 내게 눈에 들어왔던 직업은 기자가 아니라 교사였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는 선생님의 모습, 다들 힘들다고 해도 웃으시면서 신문에 어떤 내용을 담을까 함께 고민해내시는 모습. 밀어주고 끌어주던 그때 그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 30대 초반인 내게 아직까지도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나도 저런 선생님이 돼야지~”, “국사 선생님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그런 달콤한 상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공상을 몇 년간 마음껏 이어갔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두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때는 다들 피할 수 없는 야간 자율학습이라는 커다란 벽이 기다리고 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지내는 것조차 어려워 아침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6교시 수업을 버티고 있는 것만도 숨이 턱턱 막히는데 야간 자율학습이라니... 정말 교실 창문에 쳐져있던 쇠창살이 감옥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척이나 답답하고 괴로웠다. 나는 그렇게 선생님께 야간학습을 빼 달라고 부탁을 드렸지만 당시 선생님께선 무척이나 단호하셨다. “사람은 20살 이전까지 성격을 고칠 수 있대. 네가 이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너도 성격 고쳐야 된다”라며 일주일만 버텨보자고 하셨다. 하지만 난 도무지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회피하고 싶었을 뿐. 끝내 어머니까지 오셔서 야자를 빼 달라고 담판을 지셨고 그렇게 약 일주일간 언쟁을 이어간 끝에야 겨우 뺄 수 있었다.
이후 선생님이 나한테 대하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무척이나 사무적이었고 말수도 없었다. 더 이상 어떤 조언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한테 이렇게 얘기하셨다.
“너는 선생님 되면 안 된다. 하지 마라”
갑작스러웠던 이 한 마디는 맷돌 수십 개가 내 머리를 짓눌러 버린 것처럼 비수로 꽂혔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4년간 꿈꿔왔던 꿈인데... 그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허무함이 더해졌다. 그렇게 교사라는 직업은 이제는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