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의 기록] - 관계들
어릴 때부터 친구란 존재에 대해 거리감이 있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관계를 지향했는데 절친 아니면 지인 중 중간을 원했던 나는 그런 친구를 찾기가 참 어려웠다. 상대도 친구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이어야 가능할텐데 아마도 그런 사람은 많지 않았던 듯하다.
동네에 사는 언니들, 교회에서 만나는 친구들, 학교 같은 반 친구들, 회사 동료들 등 특별한 약속없이도 어딘가를 가면 만나게 되는 친구들과만 적당히 어울리고 너무 가깝게 지내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종종 외롭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지낼만 했다.
연애와 결혼은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도 저절로 멀어지게 되는 시기다보니 친구가 별로 없는 나는 이 시기에 딱히 멀어지고 할 친구도 없었고 그저 가족과 회사 일에만 충실하면서 어느덧 내 나이는 사십이 되어가고 있었다.그러던 어느날 대학 동창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마도 며칠 전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또다른 대학동창이 내 연락처를 받았는데 반가운 마음에 몇몇 친구들과 공유를 했던 모양이었다.
상당히 반가웠다. 대학 시절 꽤나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기에 이런저런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다른 동창들과 함께 한번 만나자는 이야기를 했다.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몇몇 친구들과만 만나는 것이라면 몰라도 결국 많은 동창들을 만나야되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 당연했다. 순간 대학 시절의 모습들이 떠오르면서 지금 만나도 여전히 그 때와 똑같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그 당시 나는 대학 시절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은 친구들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건너뛰어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일 친구들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 그때와는 다른 모습, 조금은 더 완숙미가 느껴지는 친구들을 만나고 싶었다. 적어도 당시의 나 자신은 대학 때와 별로 달라진 것도 없고 성숙과도 거리가 멀었기에 나 자신의 상태를 빗대어 친구들 또한 그러지 않을까 여겨졌던 것이다.
그래서였던지 내 대답은 이랬다. "음...글쎄 지금 만나면 너무 대학 때와 똑같을 거 같은데...나는 나중에 한 오십 살 정도 되면 만나고 싶은데..." 이 대답을 듣고 친구는 황당한 것은 물론이요 상당히 실망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그 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어이없게 여겨지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을까.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냔 말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꽤나 진지했고 진심이었다. 사십의 나는 조금도 성숙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이는 먹었는데 대학 시절과 똑같은 모습으로 웃고 떠드는 것이 얘전의 추억을 상기하는 좋은 시간이 아니라 왠지 나이에 맞지 않게 예전 추억이나 떠올리며 시간의 흐름이 무색하게 웃고 떠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사실 당시 나의 상황들도 그렇게 한가로이 웃고 떠들 정도로 좋지 않았던 것도 한 몫하기는 했다.
당시 나는 오십이라는 나이를 말하면서 그 시간이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그 시간이 과연 오기는 할까 싶었다. 아마 친구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아주 멀게만 느껴지는 나이를 말하면서 나는 진심이었다. 오십이 되면 진짜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나 아득히 멀게만 여겨지는 나이를 듣고 친구는 아마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오십이 되었다. 사십의 나와 오십의 나는 진정 달라졌을까. 왠지 그런 것 같다. 지금 친구들을 만나면 왠지 대학 때와는 다른 말을 할 것 같고 대학 때와는 다르게 행동할 것 같다. 확실히 달라져 있을 친구들도 만나보고 싶다. 많은 걸 경험하고 많은 걸 생각하고 많은 걸 느끼고 그 결과 얘전의 모습을 찾으려면 한참이 걸릴 나이, 대학 시절의 모습은 가끔씩 어렴풋하게나마 나타날 뿐인 그런 나이, 신체적 변화 뿐 아니라 세상과 삶에 대한 생각도 마음도 달라져 있을 나이 오십.
안타깝게도 휴대폰을 바꾸고 해외로 이사를 다니고 하면서 얘전의 친구 연락처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너무나 만나고 싶은데 쉽게 만날 수도 없는 상황이다보니 막상 수소문을 해서라도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 때처럼 우연히라도 연락이 닿는다면 이번에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야, 오십이 되었으니 지금 당장 만나자!"
10년 전에 했던 나의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미안한 마음이지만 당시 나는 나이에 진심이었다. 오십이 되면 달라질 거라고 확신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달라질 것 같았다.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던 오십의 나이가 막상 되고 보니 내가 진짜로 달라진 것이 확실하다. 10년 전과는 달리 친구들이 너무나 보고 싶은 것을 보니 말이다. 지금은 친구들이 진짜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