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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Oct 15. 2024

오십의 딸

[오십의 기록] - 관계들

엄마는 72세에 돌아가셨다. 이 나이에 돌아가신 것은 요즘에는 일찍 돌아가신 축에 든다. 돌아가신 지 이제 삼년이 되어가는데 언제나 엄마를 생각하면 미안함 뿐이다.

엄마는 폐암으로 수술을 하시고 항암치료를 하신 뒤 꽤 호전이 되셨다. 요즘은 예전과 달리 암도 치료가 잘 된다고 생각했다. 의료기술이 좋아졌든 약이 좋아졌든 엄마는 이제 괜찮아지신 줄 알았다. 그리고 5년 암생존율만 생각하면서 엄마가 5년만 잘 버티시면 정말 예전처럼 아무 문제없이 사실 거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너무나 무지했다.

코비드가 터지면서 한국 방문도 힘들어지고 전화로만 엄마의 근황을 들으면서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3년이 지나고 다시 재발이 된 듯 이야기하셨지만 지난번처럼 치료하면 괜찮아지실 줄 알았다. 엄마도 계속 괜찮다고만 하셔서 진짜로 괜찮으신 줄 알았다.

가끔씩 전화를 받지 않으시고 잠시 뒤 문자로 하라고 연락이 왔을 때에도 전혀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드디어 비싼 신약이 건강보험 처리가 되었고 한두달 뒤 이 약이 엄마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했을 때도 다른 방법이 또 있겠지 싶었다. 아니 설사 안좋아지신다 하더라도 그리 빨리 안좋아지실 줄 몰랐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그 때의 나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 생각된다.

엄마가 폐암 치료를 받고 완전히 나아지시지는 않았지만 조심하면서 거의 예전처럼 생활하실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예전처럼 또다시 엄마의 철부지 딸이 되고 말았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그래도 설겆이는 해야지 싶어서 하겠다고 하면 엄마는 어김없이 그냥 두라고 하셨다. 설겆이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 그나마 암에 걸린 엄마를 생각해서 한 효녀 코스프레였고 하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는 하지 않은 나는 역시나 효녀는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실 엄마가 치료를 받으실 때에도 나는 엄마의 상태에 무심했다. 수술을 받은 뒤에나 보게 된 엄마의 모습은 모든 것이 예전과 너무나 똑같았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는 엄마가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잊은 모양이었다. 엄마는 암에 걸린 환자의 모습도 아니었고 환자의 마음이 아니었다. 마치 모든 치료가 다 된 사람처럼 굴었다. 그것이 믿음에 의한 것이었는지 희망에 의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티를 내지 않는 씩씩함에 의한 것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엄마는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 힘든 내색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괜찮으신 줄 알았다. 전혀 의심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엄마가 유언처럼 내게 이말저말을 하시기 시작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달리 힘이 없었다. 알고보니 이미 몇 차례 병원 입원을 반복했고 응급실에 실려가기까지 했었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엄마를 방문했을 때 지금까지 어떻게 버티셨나 싶을 만큼 아주 상태가 좋지 않으셨다.

왈칵 눈물이 났다. 엄마는 나를 반갑게 맞으시며 오느라 힘들었지 하셨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시고 그렇다고 누워서 편히 계실 수도 없는 상태라 정말 많이 힘들어 보였지만 말로는 여전히 괜찮다 하셨다. 하지만 언제나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시고 내 손에 든 짐부터 부리나케 잡아채가시던 예전의 나의 엄마는 더이상 없었다.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고 당장 돌아가신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엄마를 끌어안았다. 먹먹했다. 왜 이제서야 엄마가 아프시고 곧 죽으실 수도 있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까. 엄마는 언제나 아프지도 않고 아파도 금방 나으실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귀찮아하지도 않고 나무라지도 않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는 엄마가 평생 그렇게 내 곁에 계실 줄 알았나보다. 언제든 내가 필요할 때 엄마에게 달려갈 수 있을 거라고 여겼나보다. 하지만 그런 엄마는 이제 없었다. 아니, 그런 엄마일 수 있게 해주던 엄마 몸이 이제는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 엄마로 남아있을 수 있도록 엄마의 몸이 더이상 지탱해주지 못했다.

호스피스에 들어가신 뒤 점점 나아지시는 것 같았다. 역시나 바보같이 나는 엄마가 이렇게 점점 좋아져 당장 돌아가시지 않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의 상태는 이런 나의 생각을 비웃듯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고 빠르게 마지막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과 이틀 뒤 엄마는 돌아가셨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니 실감이 났다. 더 이상 나의 엄마는 없었다.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엄마는 이제는 없었다. 자식을 가장 먼저 생각해주시던 엄마는 이제 없었다. 함께 산책하던 중 공중화장실에 간 딸이 조금이라도 늦게 나오면 화장실 앞으로 와 서성거리며 기다리시던 엄마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엄마가 유난스럽게 느껴지고 어련히 알아서 할까 싶어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너무 철이 없고 어리석었다. 나는 엄마의 걱정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고 나를 걱정해야할 정도로 내가 형편없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가 맞았다. 사실 나는 알아서 다 할 수 없었다. 많이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었다. 물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우당탕탕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고 어떻게든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지만 자식에 대한 걱정은 사실 엄마의 무한한 관심과 사랑이었고 엄마의 평생 숙명이자 인생이었다. 엄마와 자식 관계는 원래 그런 것이었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엄마는 엄마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왜 그 때는 그걸 몰랐을까. 엄마의 걱정이 사무치게 그립다. 나를 걱정해주고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엄마가 보고 싶다. 내가 걱정할까봐 아픈 것도 숨기고 당장 어서 빨리 달려오라고 보채지 않은 엄마가 너무나 안쓰럽다.

엄마가 말해주지 않아서 나는 몰랐다. 엄마가 나를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지 몰랐다. 엄마가 돌아가신지 3년이 지난 어느날, 돌아가신 엄마의 폰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틈 사이에서 사진 한장을 발견했다. 나는 20대 엄마는 50대이던 그 시절, 엄마 뒤에서 어깨 위에 턱을 대고 안고 있는 내 손을 엄마가 붙잡고 있는 사진이었다. 나는 뚱한 모습이었고 엄마는 하필 눈을 감고 있었다. 잘 나온 사진도 아니었고 특별할 것도 없는 사진이었다. 디지털 사진이 아니었기에 잘못 나왔다고 지우지 않고 살아남은 사진이었다. 왜 하필 이 사진이지 싶었다. 하지만 이내 가슴이 쓰리면서 찬 바람이 휩쓸었다. 엄마는 그 때로 돌아가고 싶으셨나. 엄마의 50대 지금 내 나이였다. 그 때 엄마는 행복했을까. 뒤에서 안고 있는 딸의 손을 붙잡고 엄마는 좋으셨을까. 아무 것도 몰랐던 나와 달리 엄마는 알고 계셨을까. 언젠가 이 날을 그리워하리라는 것을...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던 엄마가 없음이 너무 서럽고 슬퍼서 울었던 나, 이제는 엄마에게 미안해서 운다.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몰라도 너무 몰랐던 내가 미워서 운다. 나를 사랑해주던 엄마가 없는 슬픔은 엄마가 그랬듯이 나의 딸을 아낌없이 사랑해주는 것으로 푼다 치더라도 나를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을 몰라준 미안함은 무엇으로 풀어야 할까. 엄마가 없는 오십의 딸은 오늘도 엄마가 너무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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