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의 기록] - 관계들
딸의 대학 입학과 나 자신의 오십 문턱이 겹치면서 나에게 오십이라는 나이는 한 시기가 일단락되며 새로운 시기를 여는 또 하나의 관문이었다.
대학을 가더니 독립된 자아로 성장해가고 있는 딸을 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먼 곳으로 대학을 가면서 품을 떠나갈 때만 해도 이것이 곧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대학 생활을 위해 떠난 것이고 관계에는 변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아침에 나가 오후에 돌아오는 한나절의 이별이 고작이었던 고등학교 때까지와는 달리 방학이 되어야만 만날 수 있었지만 이러한 사실이 그다지 큰 상실감을 주지는 않았다. 멀리 떨어진 대학으로 보내는 엄마들이 헤어지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헤어지고 나서 빈집증후군에 시달린다는 말을 들었던지라 담담한 내 모습을 보며 나는 꽤 무던하거나 또는 씩씩한 엄마인가보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육체적 거리는 나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심리적 거리는 또 다른 문제였다. 첫 해는 별 문제 없이 지나갔다. 첫 학년을 마치고 긴 여름 방학을 함께 보내며 인턴을 시작한 딸은 그곳에서 만난 언니오빠들과 어울리며 친하게 지냈다. 외동인 딸은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언니오빠들과 오랜 시간 교류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아마도 딸에게는 엄마아빠와는 달리 세대차이도 느끼지 않으면서 어른스럽고 동시에 친구같기도 한 언니오빠들이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들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보기도 했을 것이고 나이는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엄청 어른스러워보이니 자신이 너무 아이같아 보이면서 그들을 닮고 싶었으리라.
갑자기 집에 와서도 자기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굳이 혼자서 근처 커피숍으로 가서 시간을 보내려했다. 같이 먹어도 되는 점심을 혼자서 해결하려했고 자신의 하루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의견을 나누거나 동참을 유도하기 보다는 통보식으로 전달하며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식이었다. 여기에 대고 엄마랑 같이 하자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아마 눈치없이 같이 하자고 했다면 거절을 당하거나 마지못해 받아들여 이 또한 기분을 상하게 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습게도 나에게는 이 사건이 가장 슬프고도 상처가 되는 딸의 독립사건으로 기록된다. 함께 같이 있는데도 마음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경험을 하면서 나는 딸이 독립을 하고 있다고 느끼기 보다는 엄마에게서 멀어져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니 서운하게 생각이 되고 괜히 서먹하고 어색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딸에게서 엄마는 이제 밀어내야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그것이 홀로서기 위한 독립의 몸짓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나의 한 부분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상실감이 느껴졌다. 공허함, 허무함, 서운함 등 많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느껴지면서 '품 안의 자식'이라는 말이 비로소 실감되었다.
딸에게는 이러한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리라. 전혀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이 자라듯 당연하게 거치는 성장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딸은 엄마를 서운하게 할 생각도 없었고 따라서 엄마가 서운해 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거기다 대고 딸에게 하소연해봐야 무엇할 것이며 엄마를 좀 생각해달라고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성가시고 황당하게 여겨지기밖에 더하겠는가. 혼자서 삭이는 수밖에.
그러다 문뜩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나 자신이 정상인 것인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지않을까 싶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고 이를 기뻐해야 하는 일은 아닌지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굳이 저렇게 하루아침에 달라질 필요가 있는 것인지, 서서히 그리고 하나씩 멀어져가면 안되는 것인지, 이리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싶었다. 마음을 정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딸은 그렇게 무심한 채로 방학이 끝난 뒤 학교로 돌아갔고 딸과 몸도 마음도 멀어진 상태로 지내면서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아마도 모든 것이 준비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번도 딸의 정신적 독립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던 것 같다. 훈계나 지도를 이유로 지나치게 간섭했고 딸의 의견보다는 나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주입해오지는 않았나 싶었다. 그러니 딸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이런 식의 철벽치기가 실효성이 있다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생각하지 않았을까.
결국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고 시간이 흐르자 딸과의 관계는 다시금 예전처럼 돌아갔다. 단지 딸은 예전의 그 딸이 아닌 조금 더 성숙해진 딸이었다. 엄마의 눈치를 본다기 보다는 기분을 살필 줄 알았고 엄마에게 위로도 해줄 줄 아는 의젓함이 느껴졌다. 이제야 딸의 모습이 온전히 보이며 나보다 훨씬 나은 점도 보이고 대견했다.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러한 거리감은 오히려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거리두기를 통해 비로소 상대가 보이기 시작한달까. 가까이에서는 상대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마치 나 자신처럼 자식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내 마음대로 딸을 휘두른 것이 아닌가 싶었다.
너 잘되라고 하는 엄마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딸의 인생에 내 멋대로 관여할 수 있는 시기는 이제 지났다. 엄마라면 무조건 좋고 엄마 옆에 있고 싶고 엄마만 바라보던 그런 딸은 이제 더 이상 없다. 지금도 엄마바라기였던 딸의 눈망울과 웃음 가득한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 때 나는 그런 딸의 눈을 보면서 웃음이 절로 났다. 행복했다. 그 때는 분명 딸을 분신처럼 사랑했다.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었고 모든 것을 주고 싶었다. 언제나 딸이 보고 싶었다.
지금도 딸이 보고싶다. 하지만 이제는 참는다. 궁금해도 참고 전화하고 싶어도 참고 찾아가고 싶어도 참는다. 참다보니 이제는 잘 참는다. 참는다고 그 사랑이 사라지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간절해진다. 헤어지고나면 아쉽고 다음을 기약한다. 자꾸만 예전에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떠올라 괴롭기도 하다. 정작 딸은 그 때 일은 기억도 못하고 그저 엄마가 뭘해도 좋아했을지도 모르지만 뜬금없이 예전의 일로 사과를 하기도 한다.
과거는 사과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부터다. 딸에게 어떠한 엄마가 되어야할지 고민이다. 딸은 과연 엄마에게서 여전한 모습을 원할까 다른 모습을 원할까.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여전한 것이라면 무조건 달라져야 한다. 뭐라도 해야 하니까 말이다.
오십은 달라져야 하는 나이다. 모두 달라져가고 나도 달라져간다. 단지 그 달라짐이 더 나아지는 것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딸이 보고싶은 만큼 딸도 엄마가 보고싶어지기를. 보고싶어 한 달음에 달려가고 싶기를, 비록 가까이에 없어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야 하더라도 보고 싶은 그 마음만은 간절하기를. 그런 엄마가 되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