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원 또는 고풍스러운 테마파크
정식 명칭: Royal Botanic Gardens, Kew
홈페이지: https://www.kew.org/
입장료: 성인 10파운드, 아이(4-15세) 4.5파운드(청소년, 학생, 노년층 등 할인 있음. 계절마다 입장료가 조금씩 달라지므로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참조)
위치: Kew Gardens 역(District Line, London Overground)
이 글에서는 흔히 큐 가든이라고 부르는 큐 왕립 식물원과 그 주변 공원에 대해 쓰고자 한다. 큐 가든은 엄밀히는 박물관이 아니지만 문화유적으로서의 가치가 높기에 충분히 소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국에서 살면서 이 나라가 역시 선진국이라 다르구나라고 생각한 적은 많지 않은데 가끔 지폐 뒷면에 있는 인물들의 초상화를 보게 되면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모든 지폐의 앞면에는 여왕의 초상화가 있었고 뒷면에는 윈스턴 처칠, 제인 오스틴, 아담 스미스, 제임스 와트, 찰스 다윈 등이 그려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영국의 지폐는 네 종류지만 지폐의 도안을 한 번씩 바꾸면서 인물까지 교체하는 것 같다.) 정치가, 소설가, 경제학자, 공학자, 생물학자 등으로 직업군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영국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만한 유명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 출신의 인물들이 여러 학문 분야에서 근대의 기틀을 세웠다는 점을 화폐 도안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큐 가든은 18세기에 문을 열었고 큐 가든 내에 있는 식물원은 19세기에 개장했다.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식물원도 아마 근대 식물학의 초석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세도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일본에서는 막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점에 영국에서는 이미 근대적인 식물원이 세워져 있었다. 현재 모습이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 비할 바는 아니나 영국이 최소한 17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는 어느 면에서나 세계 최강대국이었음을 인정하게 되는 지점이다.
아이가 태어난 지 1년 6개월 정도 되어 아장아장 걷던 시기에 봄이 오고 꽃이 피기 시작했다. 우연히 데려간 공원에서 꽃을 보면서 좋아하는 아이를 보면서 전에는 이름만 들어봤던 큐 왕립 식물원을 떠올렸다. 당시만 해도 아이가 기차나 지하철 타는 것을 좋아하기 전이었고 살던 집에서 큐 가든까지는 1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야 했기 때문에 기차 안에 있는 긴 시간 동안 아이를 진정시킬 방법을 생각하느라 잔뜩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기차역에서 가장 가까운 빅토리아 게이트로 들어가서 안내 지도를 받았을 때까지는 큐 가든이 그렇게까지 넓은 줄 몰랐다. 막연히 식물원이 있으니 온실 몇 개 설치되어 있고 주변에 공원이나 좀 있겠지 생각했었고 가기 전날 간단히 찾아본 블로그에서 멋있어 보이는 건물이 몇 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긴 했지만, 큐 가든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넓은 공원이었다. 대규모의 온실이 공원 곳곳에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깔끔하게 정리된 넓은 꽃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양 양식으로 지어진 듯한 높은 탑도 서 있었고 여러 종류의 정원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꽃을 보면서 좋아하길래 아이를 데려왔는데 막상 아이는 온실 내에 있는 식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대신 빅토리아 게이트로 들어가자마자 앞에 펼쳐져 있는 호수에서 오리, 백조를 구경하는 것과 꽃밭에서 뛰어노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풀숲 사이사이로 다람쥐도 많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자연을 즐기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조경이 잘 된 전형적인 영국의 공원 내에 식물원 관련 부대시설이 들어서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큐 가든에서는 의외로 테마파크에 가까운 요소도 몇 개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공원 내에는 treetop walkaway라는 시설이 있었는데 문자 그대로 나무 꼭대기를 연결한 길을 걸을 수 있는 곳이다. 이 나무들은 상당한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고 길바닥은 투명하여 길을 걸으며 숲을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런 곳이 있으면 나는 항상 나에게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기세 좋게 올라갔다가 올라가서 후회하는 몹쓸 버릇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도 그 버릇이 발현되었다. 결국 겁에 질려 올라가자마자 조심조심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또한 큐 가든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유리공예품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Dale Chihuly라는 예술가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며 제작한 전시품이라고 한다. 풀밭에 커다란 유리공이 놓여 있는 등 다소 뜬금없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공원을 잘 가꾸는 데 안주하지 않고 예술가와의 협업을 통해 큐 가든을 예술 작품의 배경, 나아가서는 예술 작품 그 자체로 승화시키려는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큐 가든에서 받은 인상은 놀이기구가 없는 대신 온실이 많은, 고풍스러운 에버랜드에 가깝다는 것이다. 날씨가 춥지만 않다면 가족 소풍 장소 또는 런던 교외 여행 장소로 최적이라고 생각한다. (12월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겨울에는 야간 행사도 하는 것 같았다.) 다만, 영국에서 다른 곳을 방문할 때와 마찬가지로 음식은 미리 준비하기를 권한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큐 가든 내에서 전체적으로 비행기 소음이 상당히 심하다는 사실이다. 큐 가든이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공항 중 하나인 히드로 공항의 활주로로 여객기들이 착륙하는 경로에 위치하고 있는 탓이다. 착륙하는 비행기의 모습을 아주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어 비행기의 항공사 도장은 물론이고 여객기의 기종까지 구분 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나야 비행기 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항공기 소음에 민감하다면 큰 단점이 될 수도 있겠다.
식물원을 가장한 고풍스러운 테마파크
식물원뿐만 아니라 공원이 아름다워 가족 소풍 또는 런던 교외 여행에 최적인 곳
* 이 글은 영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전인 2020년 2월 이전에 아이와 큐 가든을 방문했던 경험을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www.standard.co.uk/go/london/attractions/kew-gardens-interactive-virtual-tour-a4402606.html?fallback=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