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
이날의 저녁 식사는 평소보다 부실했다. 출근이 늦은 탓에 저녁 도시락을 챙기지 않은 탓이다. 먹구름이 가득 껴 평소보다 더 쌀쌀하게 느껴지는 오늘, 이것저것 많이 먹긴 했지만 속이 유달리 더 헛헛했다. 그래서 오늘 난 숨겨 놓은 비상식량을 꺼내기로 했다.
싱크대 하부장 한쪽에 들어있는 것은 바로 컵라면이다. 언젠가부터 라면을 좋아하게 된 이후, 이런 날을 대비해 꽁꽁 숨겨 놓은 나만의 비상식량이다. 오늘은 육개장이 있는데 크게 가리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육개장, 김치사발면, 진라면, 불닭볶음면을 가장 많이 사 둔다.
먹을 수 있는 시간은 매장 마감인 9시 이후여서 어쩔 수 없이 야식이 되어버리는 나의 소중한 끼니이다. 마감시간이 되어 서둘러 정리를 하고 창문 블라인드를 내리고 물을 끓였다. 하나의 조명만 남겨 두어 어둑해진 매장 안, 적막한 공간 속에서 나 홀로 컵라면에 물을 붓고 컵라면 앞에 앉아 면이 익어가길 기다렸다.
오늘은 성과가 없는 날이었다. 오전에 상상했던 하루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하루를 보내 힘이 빠졌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며 많은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성과가 바로 나타나길 기대한다. 부지런한 하루의 끝은 항상 뿌듯한 결과를 바라지만, 퇴근할 때쯤엔 오히려 기대에 못 미치는 하루에 풀이 죽고 마음이 서늘하게 가라앉는다. 어떤 날은 그래도 괜찮고 어떤 날은 조금 우울하다.
우리는 오늘 하루만을 살지는 않는다. 뭔가가 이루어지는 데에는 각각의 시간이 있다. 인생 4컷은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지만 필름 사진을 인화하는 데는 몇 시간이 걸린다. 쌀밥과 잡곡밥이 지어지는 시간도 차이가 있고, 모든 동물이 태어나는 기간, 식물이 자라는 기간도 모두 다르다. 긴 인생을 살고 있고 하는 일이 오랜 기간을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참 쉽게 덤덤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멍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면이 다 익었다. 나의 작고 소중한 컵라면이 완성되었다. 어릴 적 엄마가 육개장 사발면을 가장 좋아한다 했을 때 그것을 이상하게 여겼던 내가 생각났다. (당시의 나는 참깨라면 같은 유행하는 컵라면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최애 컵라면이 된 육개장 사발면을 열심히, 정말 열심히 먹었다. 속이 따뜻하게 데워지고 힘이 났다. 역시 사람은 우울하고 힘들 땐 위를 든든하게 채우는 것이 참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나의 행복들을 여기저기 잘 뒀다가 힘들 땐 언제든 꺼내 먹도록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 힘으로 내일도 모레도 쭉쭉 버티고 나아가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