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특히 더위가 극심해지는 한여름에 일본에 가면 여기가 타국이구나 하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전철에 올라탈 때, 그중에서도 사람이 가득 찬 만원 전철에 올라탔을 때이다. 일본에서 맞은 여름 내내 나를 괴롭혔던 그것의 정체는 바로 '체취'이다.
한국에서도 사람이 가득한 지하철에 타면 사람들의 땀냄새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은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겪었던 체취의 강렬한 경험은 남달랐다. 한국에서는 결코 느껴볼 수 없는 냄새랄까. 어딘가 익숙하지만 목 언저리에서 잠겨버리는 그 정체가 너무 궁금했다.
그것은 어느 날 불현듯 찾아왔다. 너무 더운 여름밤, 야근 후 간단히 규동을 포장해 가기 위해 집 앞의 스키야에 들어갔을 때다. 어딘가 익숙한 불쾌한 냄새가 나는데 그보다 더욱 강렬했다. 그동안 나의 비강을 맴돌던 그 냄새. 그건 바로 규동집에서 유독 심하게 느껴지는 간장 눌은 내였다. 겨울철에 맡았을 때는 크게 불편하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여름이 되자 굉장히 피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그때부터 가을이 될 때까지 거의 규동집에서 규동을 먹지 못했다. 전철에서 느꼈던 불쾌한 체취가 규동집에서의 내 식욕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사람의 체취는 평소에 자주 먹는 음식에 따른다고 하던가. 한국인들이 외국에 나가면 마늘 냄새가 난다며 놀림받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그게 인종 차별적인 발언일 수도 있으나, 마냥 근거 없는 사실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되었든 한국인은 마늘은 구워도 먹고, 끓여도 먹고, 심지어 생으로도 먹는 민족이 아닌가. 일본에서 누군가 내게 마늘 냄새가 난다고 하면 머쓱하게 받아들였을 것 같다.
아마 내가 맡았던 전철 안의 체취 또한 우리의 마늘 냄새와 비슷한 경우였겠지. 자국민들은 느낄 수 없지만 외국인들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것. 그건 비단 체취뿐만이 아닐 것이다. 은연중에 그 나라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있는 문화야말로 마치 체취와도 같이 외국인을 당혹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당연하지만 그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다.
규동은 죄가 없다. 가끔 생각날 때 먹는 규동은 정말 맛있었다. 서민의 친구, 규동.
예를 들자면 한국의 '나이를 곧장 물어오는 문화'가 그러할 것이다. 외국에서는 초면에 나이를 묻는 행위가 굉장히 실례되는 행동이라고 한다. 나 또한 일본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의 나이를 전혀 몰랐다. 물론 그들도 내게 물어오지 않았다. ...이건 그냥 친하지 않았던 걸까?
어떤 나라에 가서 산다는 것은 그 나라에 스며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국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만큼 한국에 많이 스며든 것이다. 아마도 나라는 사람을 일본에 가는 비행기 사이에 물을 짜듯 쭉 짜서 10년 정도 살게 만들면 어떨까? 한국인으로서의 나는 희미해지고, 일본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나의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보고 배웠던 내가 희미해지고 일본에서의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과연 올바른 방향이었을까? 그른 방향이었을까? 그걸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한국에 돌아오고서 의미 없는 가정을 해보며 고민해 본다. 사실 '나라 vs 나라'로 생각했기 때문에 심각해지는 것이지, 지나오는 회사, 스쳐갔던 집단들, 친구들, 살던 지역 등 우리는 이미 수많은 '스며듦'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변하든지 마지막까지 '나다움'을 단단히 지켜갈 수만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