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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Nov 01. 2020

초발심시 변정각

처음 마음 낸 그 순간처럼

                                                                  고군분투

대학원 공부를 다 마치기 전에 결혼을 하고 출산을 했습니다. 대학원에서 전공은 영화 이론이었습니다. 평론과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싶었지요. 부모님에게서 독립하고 싶어서 결혼을 했지만  임신과 출산 계획은 없었습니다.       

집에서 독립하면 많은 것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를 너무 몰랐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개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니까요. 친정 부모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대학원 과정을 끝내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고학력 전업 주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공모를 내 볼까?' '지인들을 찾아 박봉이라도 취업을 부탁해 볼까?' 많은 경우의 수를 놓고 저울질했지만 그 어느 것도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미루어 추측하고 있던 스스로보다 훨씬 소심했고 유약했고 나만의 세계에 갇혀있던 몽상가이자 아집 쟁이였으니까요. 


나 같은 처지의 아줌마들을 알게 되어 책 한 권을 공동으로 출간했습니다. 그 후로는 닥치는 대로 글 쓰는 일을 했습니다. 매체를 가리지 않았고 대필도 했습니다. 내게 글쓰기는 나도 '쓰임이 있는 인간이라는 걸 세상에서 인정받기'였습니다. 들인 품과 시간에 비해 수입은 신통치 않고 고생스러웠습니다. 전장에 나가는 군인처럼 비장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는 4권의 책을 파트너와 함께 한 권의 책을 혼자 쓴 출간 작가가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작가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출판사나 기획자가 원하는 것을 맞춤 생산해주는 하청 업자지 진짜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창작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늘 따라다녔으니까요. 


거의 10년을 함께 한 단짝 파트너와 자그만 공동 작업실을 차렸습니다. 각자 쓰고 싶은 글을 기획해서 쓰고 출판까지 하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내가 진짜로 쓰고 싶었던 글은 소설이었습니다. 

지인들을 불러 개업식을 하고 많은 덕담과 축하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채 2주도 되지 않아 우리는 함께 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내게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이젠 혼자라는 엄청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글쓰기 감옥에 갇히다


조그만 내 방에 작업실을 꾸몄습니다. 좋아하는 소품들과 영감을 주는 문구들로 스스로를 응원했습니다. 의욕이 넘쳤지요. 하나의 문이 닫히니 또 하나의 문이 다시 열린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 쓸 글의 목록과 계획들을 세우느라 신이 났습니다. 

.  

글은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고 써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디어가 글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나는 성급했습니다. 혼자 힘으로 하루빨리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첬습니다.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가혹하게 나를 몰아붙였습니다. '글을 써야 해. 오늘은 한 줄도 못 썼어.' 그럴수록 글은 더 써지지 않았다. 정작 글을 쓰지는 못하면서 글을 써야 한다는 감옥에 갇힌 꼴이 되었습니다. 창작 에너지를 모두 고갈시키고 있었습니다. 심신이 지치고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처음 마음을 낸 그 순간처럼


50이 될 때까지는 거의  글쓰기는 잊고 살았습니다. 봄에는 꽃구경, 가을에는 단풍 구경, 여름에는 물놀이, 겨울에는 맛있는 거 먹으며 친구들과 수다 떨며 한가롭게 보냈습니다. 부모님 시부모님과 해외여행도 다녔습니다. 인도로 명상 공부를 하러 가기도 했지요. 그래도 가끔은 불현듯 마음속에서 글을 언제 써라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습니다. 


팔자 좋게 먹고 놀고 마음공부 까지 하다 보니 사는 것이 조금씩 평화로워졌습니다. 삐죽하고 메말랐던 마음에도 여유와 관대함이 생겼습니다. 이젠 세상이 살만해졌습니다. 사는 것이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글을 쓰고 싶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언제 처음 저 마음을 품었을까요? 

초등학교 때 일기 검사를 했습니다. 숙제기 때문에 대충 써가지만 가끔은 자발적으로 나의 느낌과 감정을 쓰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면 참 잘했어요 도장 밑에 '재밌네. 너는 글을 참 잘 쓰는구나'라는 선생님의 칭찬 말이 덧붙여지곤 했습니다.  '내가 글을 잘 쓰는구나. 내 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네'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던 것이.      

그때 품었던 그 마음이 50이 된 이제야 다시 살포시 자신을 봐달라고 손짓을 합니다. 


다시 글을 씁니다. 더디지만 예전처럼 글쓰기가 고통은 아닙니다. 처음 마음을  낸 그 순간처럼 좀 설렙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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