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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Nov 01. 2020

글쓰기 참 좋은 시절

     

나는 글쓰기에 좋은 조건과 장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남편 덕에 먹고사는 문제를 신경 써 본 적이 없습니다. 부양의 의무 때문에 글쓰기를 접어 두지 않아도 됩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며 글을 쓰고 있는 많은 작가나 작가 지망생들의 궁핍함도 내게는 없습니다. 혹은 글쓰기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전업 작가들이 겪어야 하는 스트레스도 없습니다. 누구는 절박함이 없다는 것이 안락한 독이 될 수도 있다고도 합니다. 그래도 밥벌이를 면제받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입니다. 남편에게 제일 고맙습니다.      


20년이 넘는 결혼 생활. 부모로 살아가기는 내 글쓰기를 풍요롭게 해주는 밑거름이자 영감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자식을 낳고 키우지 않았더라면 나만의 세계에 갇혀 쓰디쓴 커피를 마시며 독백처럼 삶을 읊조리며 살았을 것 같습니다. 결혼했기에 건강한 생활인으로 거듭나고 다양한 관점으로 인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나만의 contents가 생겼습니다.      


남의 글을 대필하고 매체를 가리지 않고 그저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지면 앞 뒤 없이 원고를 썼던 고달프고 조금은 서러웠던 무명 프리랜서 작가 생활 10년. 

초짜라고 또 아줌마라고 은근히 무시당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쓴 원고를 편집자가 자기 맘대로 무지막지하게 난도질을 해도 끽소리 하지 못했습니다. 힘들여 쓴 원고가 정작 다른 사람의 이름을 걸고 세상에 나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도 씁쓸하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취재하고 원고 쓰느라 들인 시간과 공에 비하면 통장에 들어오는 원고료는 너무 야박했습니다. 그래도 이런 모든 건 나를 존재 증명하기 위해 일이 절박했던 간절함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간절함이 있었기에 글쓰기의 필력을 키워가는 트레이닝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전장에 나갈 무기는 내 손에 쥐고 있습니다. 이 또한 감사합니다.      


나는 글쓰기에 젊지도 또 아주 나이 들지도 않았습니다.

젊으면 뭐든 도전해 볼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도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건강과 활력이 뒷받침됩니다. 창조력. 상상력. 열정. 체력 등 젊다는 건 여러모로 글을 쓰기에 유리합니다.

하지만 글을 쓰기에 적당히 나이 먹은 것이 좋을 수 도 있습니다. 글쓰기에는 열정과 영감만큼 인내심과 끈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글 한 줄이 써지지 않아도 버터야 하고, 욕심껏 맘껏 써지지 않아도 부족한 대로 이를 수용해야 합니다. 많은 어려움과 좌절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온 세월만큼 단련된 내공입니다.       

나는 더 이상 재기 발랄하진 못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걸 경험하고 시도해 보기 위해, 나를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특히나 남녀상열지사처럼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삶의 유혹도 별로 없습니다. 글이 쓰고 싶다면 그저 묵묵히 글만 쓸 수 있어 좋습니다. 단조롭지만 여유와 안정감이 있는 나이입니다.      

나는 더 이상 젊지 않습니다. 하지만 글을 쓸 수 없을 만큼 아주 나이 먹지도 않았습니다. 노안이 오긴 했어도 글을 읽고 쓰는 것이 크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오랜 시간 앉아 있으면  힘에 부치지만 조금 쉬면 육체가 감당할 만큼의 체력은 됩니다. 기억력이 떨어지긴 했어도 꼭 필요한 것은 잊지 않고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나에게는 지금이 글쓰기 참 좋은 시절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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