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 선영과 지나가 떠난 테이블에 앉아 친구가 졸지에 안겨주고 간 일거리를 곱씹었다.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작가 인생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고?’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자신에 대해 단정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버리는 선영. 그것도 잘 나가는 새파랗게 젊은 애 앞에서. 선영을 알고 지낸 시간만큼이나 흔한 일이다. 그래도 오늘은 괘씸했다. 물론 그 섭섭함이 오래가진 않지만. 자신의 약점과 상처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선영.
20년 전 영화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 날. 분위기가 무르익고 선배들은 마구 잔을 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술잔이 쉼 없이 돌아갔다. 취기가 올라오고 윤에게 다시 잔이 왔다. 이 잔을 받으면 확 취해 버릴 것 같았다. 윤은 선뜻 잔을 비우지 못했다. 주는 대로 받아먹고 취해 버릴까? 이쯤에서 적당히 요령껏 자기 차례를 피해 볼까? 1분도 안 되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그때 앞자리에 앉았던 선영이 윤이 만지작거리던 잔을 확 잡아채더니 단숨에 마셔버렸다. 선배들은 휘파람을 불고 환호성을 지르며 ‘흑기사’를 연호했다.
“너 공주냐? 이따위 술 한 잔에 뭘 그리 망설여? 매사에 꽃길 깔아주면 가고 아니면 안 가지? 왜 억울해? 억울하면 한 잔 받고 아니면 고맙다고 해.”
선영은 호기롭게 빈 잔을 채워 윤 앞에 내밀었다. 어이없이 선영을 쳐다보다 윤은 오기가 생겼다.
“공주? 웃기고 있네. 흑기사 따윈 개나 줄래?.”
윤은 거침없이 잔을 비우고 선영에게 빈 잔을 건넸다.
“제법이네. 그럼 우리 호연지기로 관포지교의 연을 맺어 볼까? 내 잔 받아라.”
“오케이!”
윤은 목으로 달게 넘어가는 소주와 선영의 시원시원한 말투와 기세를 업고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 다음 날 윤은 선배 언니 방에서 나란히 누워 자고 있던 선영의 코 고는 소리에 잠을 깼다. 그 뒤로 선영과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었다.
차분하고 얌전해 보이지만 가슴속에서는 늘 감정의 드라마가 역동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윤. 선영은 이런 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열정을 끄집어냈다.
“야 혼자 듣기 아깝다. 그거 글로 써라. 책은 내가 내줄게.”
“소설 쓰고 있네. 윤아 너의 이런 예민함. 글 쓸 때나 써먹어. 자꾸 이러면 살기 힘들다.”
민감하고 생각이 많은 윤이지만 선영에게는 안심하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감이 좋은 선영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윤의 마음을 그냥 알아 버리기도 했다. 스캔하듯 느끼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꿈이 작가 지망생으로 늙어 죽는 거냐? 연습은 그만 됐고. 실전에 뛰게 내가 너 한 번 굴려줄까?”
아픈 상체기에 사정없이 소금을 뿌리기도 했다.
“망설이는 걸로 도망치지 마라. 남의 속은 잘도 꿰고 있는 똑똑이가 자기 맘을 왜 몰라? 모르고 싶은 거지. 비겁하게 핑계 대지 말고 인정해라. 실패할까 두려워 시작도 못 하는 겁쟁이라고.”
하지만 독하게 한마디 듣고 나면 속이 후련하고 개운해졌다. 혼란이 걷히고 명확해졌다. 투박하고 때론 무례하지만 선영의 말에는 본질을 꽤 뚫는 힘이 있었다. 윤은 그래서 자기 방식대로 친구를 위해 주는 선영의 말을 신뢰했다.
‘그지 이러다 진짜 첫 끗발이 개 끗발이 되지.’
윤은 4학년 때 공모전에 당선된 이후로 글을 쓸 수 없었다. 주변의 기대와 칭찬이 다음 작품을 쓰는 걸 망설이게 했다. 별 부담 없이 썼던 첫 소설은 운이 좋아 어쩌다 걸린 횡재 같았다. 축포를 너무 일찍 터트렸던 걸까? 그렇게 작가로서의 화려한 시작은 활짝 꽃을 피우기도 전에 사그라들었다.
윤은 다시 시작할 기회마저 주지 않는 자신을 선영이 늘 안타까워한다는 걸 알고 있다. 깡패 같은 말투에 독불장군 같은 밀어붙이기. 이는 아끼는 친구에 대한 선영의 원색적인 애정 표현이다.
“미친년아 결혼하니 좋냐? 꿈과 재능과 바꾼 대단한 결혼! 그래 잘 살아라! 아니면 내 손에 죽는다.”
결혼 전날 선영은 잔뜩 술에 취해 전화기에 대고 소릴 질렀다.
꿈을 향해 가는 길에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기로 했던 약속.
“야 너 도원결의 알지? 우리 그거 하는 거야. 너는 작가, 나는 영화감독, 같이 성공하기로 뜻을 모은 거다. 건배.”
함께 그리고 만들어 가자고 했던 세상. 이 모두로부터 자꾸만 도망가려고 하는 친구를 향한 섭섭함과 안타까움, 아쉬움.
선영의 말에 윤은 대꾸하지 못하고 한참 소리 없이 울었다.
윤은 ‘워밍업’이라고 했던 선영의 말이 자꾸 맴돌았다. 묻어 두었던 단어, 입 밖으로 소리 내 기도 민망해진 말. ‘작가’‘나의 꿈’ ‘나의 바람’
뭔가 뭉클하고 묵직한 것이 가슴에서 올라왔다.
“나쁜 년! 또 낚였어.”
3월의 끝자락. 서로를 방해하지 않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나지막한 대화 소리. 거슬리지 않는 소음들과 작은 분주함이 어울려 한낮의 카페는 생기 있다. 윤은 카페의 그 어느 것 하나에도 방해가 되지 않으려 조용히 움직였다.
남향의 널찍한 안방은 문을 없애자 카페에서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공간이 되었다. 기다란 나무 테이블 두 개와 의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장식물도 가구도 없다. 남쪽으로 넓은 창이 있어 종일 해가 들어 환하고 따뜻하다. 윤은 여기서 빛 바라기를 하며 일기를 쓰곤 한다. 윤이 카페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윤은 카페를 한 번 쓰윽 돌아봤다. 집처럼 익숙한 곳. 집보다 기분 좋은 곳.
이곳이 카페가 된 후 윤은 출근하듯 왔다. 손님이라기보다는 무급 직원 혹은 가족 운영자에 가까웠다. G가 자리를 비우면 대신 커피도 내리고 손님을 받는다. 단골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말을 건네고 아는 척을 하는 것도 윤이다. 돈통이 꽉 차면 차곡차곡 봉투에 넣어 G에게 주는 것도 윤의 몫이다. 식자재나 휴지 등 필요한 것들을 사 오기도 한다. 도시락을 가져와 G와 함께 먹기도 한다. 샌드위치나 오믈렛 국수를 만들어 달라고 G를 귀찮게 할 때도 있다. 윤은 집 말고 매일 와서 할 일이 있는 카페가 좋다. 자신이 쓰임 있는 존재라는 것이 기쁘다. 윤이 없더라도 카페 운영에 지장은 없다. G도 알고 윤도 안다. 하지만 G는 제집 드나들 듯 와서 참견하고 시키지도 않는 일을 자기 맘대로 하는 윤을 부담 없이 받아 준다. 게다가 언제든 카페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특권까지 주었다. 윤은 G의 이런 마음 씀씀이가 고맙고 든든하다.
점점 날이 길어지고 있다. 4시가 훌쩍 넘었는데 아직 한낮의 느낌이다. 남작가와 희정 씨는 돌아갔다. 카페에는 이제 지와 윤뿐이다.
“띵동”
조용한 카페에 문자 알림 소리가 요란하다. 화들짝 놀라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은지 생일. 학원 끝나고 좀 놀다가 감’
하나다.
‘어디서?’
아침에는 아무 소리 없다 갑자기 생일이라니. 늦은 하나의 귀가는 부부 사이의 잦은 분쟁거리다.
‘명동’
윤은 한숨이 나왔다. 하나는 엄마의 물음에 항상 단답형이다. 묻는 것 이상의 정보는 절대 먼저 알려 주지 않는다. 윤은 당연히 또 물을 수밖에 없다. 항상 꼬치꼬치 캐묻는 자신과 마지못해 짧게 답하는 딸. 둘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다.
‘갑자기 생일이라니 좀 당황스럽네. 학원 끝나면 8시 넘는데 언제 오려고?’
윤은 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원하는 답을 얻어 내기 위해 신경 써서 문자를 보냈다.
답이 없다. 물리적인 시간보다 답을 기다리고 있는 마음의 시계가 더디게 가고 있다. 한참 뜸을 들이고 답이 왔다.
‘나도 학교 와서 알았음. 학원 끝나고 밥 먹고 노래방에서 좀 놀다 가면 11시?’
11시라니? 윤은 가슴이 답답했다. 안 된다고 하면, 딸은 공격하고 자신은 방어하는 대결이 이어지고 감정이 상한 하나가 자기 맘대로 해 버릴 거다. 쉽게 허락하고 넘어가면 앞으로 잦아질 늦은 귀가의 빌미를 줄 터이니, 뭐가 되었건 칼자루는 늘 하나가 쥐고 있다. 윤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이 불리한 싸움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오빠 이것 좀 봐”
윤은 G에게 하나와 주고받은 문자를 보여줬다.
“뭐라고 답하지. 안 된다고 하면 난리 칠 거고, 그러라고 하면 앞으로 대 놓고 늦게 다닐 건데,”
G는 윤을 쳐다봤다. 윤은 눈이 마주치자 크게 한숨을 쉬었다.
G가 윤의 전화기를 가져가 문자를 보냈다.
“오빠?”
윤은 예상치 못한 G의 행동에 적잖이 놀랐다.
“알아서 해!”
문자는 간결했고 너무 뻔했다.
“웬일? 화났음?”
바로 답이 왔다. 이런 빛의 속도로 답장이 오긴 처음이다.
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G는 얼른 윤의 전화기를 잡아채서 다시 문자를 보냈다.
“알아서 하라고! 끝!”
G는 전화기를 윤에게 주고 눈짓으로 출입문을 가리켰다. 그만 집에 가라는 의미다.
“알았어요.”
윤은 짐을 챙겨 카페를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