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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Oct 26. 2024

하나

4월. 꽃봉오리가 만개하고 봄 내음이 짙어지고 봄이 차오른다.


“쭈니 아빠, 나 심심해. 오늘 학원 없어. 학교 끝나고 놀러 가도 돼?”


점심 무렵 하나에게 문자가 왔다. G는 그러라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준보다 네 살 어린 하나는 어릴 적에 서툰 발음으로 불렀던 쭈니라는 호칭을 커서도 계속 사용했다. 하나에게 준의 아빠였던 G는 자연스럽게 쭈니 아빠다. 형제자매가 없는 준과 하나는 서로에게 각별했다. 준은 하나에게 자상하고 믿음직스러운 오빠이자 친구였고 하나는 준에게 웃음과 사랑을 주었던 예쁜 동생이었다. 준이 죽고 나서 하나가 받은 충격과 상실감은 매우 컸다. 한동안 우울하고 기운이 없고 잘 웃질 않았다.      


“쭈니 아빠. 나 왔어.”


하나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아일랜드 바로 직진했다. G는 커피를 내리다 말고 환하게 웃었다.

보통 키에 통통한 몸매. 흰 피부에 얼굴은 동그랗고 조금 크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쌍꺼풀 없는 보통 크기의 눈과 높지 않은 콧대, 작고 야무진 입매. 하얀 얼굴의 납작한 이목구비가 귀엽다. 하나는 교복 상의를 벗어 가방과 함께 아일랜드 선반 아래에 집어넣었다. 


“그거 내가 갖다 줄게. 두 잔이니까 저기 있는 사람들 거지?”


하나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젊은 남녀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G가 끄덕거렸다. 

하나는 잽싸게 커피를 가져다주고 왔다.


“이제 뭐 할까? 일 있으면 시켜.”


지가 오른쪽 검지손가락으로 주방을 가리켰다. 하나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쭈욱’ 뺐다.


“설거지? ~오케이”


하나는 앞치마를 꺼내 주방으로 갔다. 세제를 묻혀 거품을 충분히 낸 수세미로 컵 접시 믹서기 등을 싹싹 닦았다. 따뜻한 물을 틀어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헹궜다. 설거지를 마친 그릇들은 물기를 떨어 건조대에 엎어 놓았다. 수세미에 세제를 조금 더 묻힌 후 싱크대 개수대를 구석구석을 닦은 후 뜨거운 물로 씻어냈다. 수세미는 세제 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헹군 다음 물기를 꼭 짜서 선반 위에 걸쳐뒀다. 하나의 손은 또래에 비해 작았지만 손놀림은 재빨랐다. 

주방에서 나온 하나는 행주를 들고 카페를 돌아다니며 테이블 위를 닦았다. 


‘짤랑’

손님이 왔다. 


“어서 오세요. “


하나는 주문받고 커피를 나르고 손님이 나가면 빈 잔을 수거해 설거지했다. 

8시. 해가 지고 깜깜해졌다. 카페에는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자 손님뿐이다. 


“배고파.


하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랩으로 덮은 접시를 꺼냈다.

랩을 벗기자 햄과 치즈 토마토를 넣고 만든 샌드위치가 나왔다.


”나 먹으라고 만들어 놓은 거구나? 히히.”


하나는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었다.

9시. 카페 영업이 끝났다. 하나는 마지막 손님의 빈 그릇을 설거지한 후 음식물 쓰레기를 봉투에 넣어 잘 여며두고 앞치마는 벗어서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다. 지가 청소기를 돌리는 동안 화장실 청소를 끝내고 휴지통의 쓰레기들을 종량제 봉투에 담아 입구를 단단히 묶은 후 카페 밖에 내놓았다.  


“끝!!! 나 일당 줘 오늘 일 많이 했잖아”


하나가 명랑하게 말했다. G는 아일랜드 바 위의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고 손을 쓱 집어넣은 다음 오만 원권 한 장을 꺼내 하나 앞에 놓았다. 


“이렇게 많이? 나 겨우 세 시간 일했는데?”


G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머지는 용돈이라고? 그럼 땡큐!”


하나는 돈을 교복 치마 주머니에 집어넣고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이 쉴 새 없이 반짝인다.


“애들. 학원 끝난 시간이라.”


“근데 쭈니 아빠 원래 인생이 이렇게 재미없는 거야?”


16살짜리 입에서 인생이라는 말이 나오자 G는 웃음이 났다. 


“애들이랑 노는 것도 별로야. 똑같아. 쇼핑하거나 노래방 가지 않으면 연예인이나 남자 친구 얘기만 해. 새롭고 신나는 일은 하나도 없어. 그래서 애들이 남자 친구 사귀고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그러는 거야. 공부는 재미없지. 그렇다고 공부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우리도 알고 보면 참 불쌍해. 꽃다운 나이에 이게 뭐야?” 


하나가 입을 삐죽거렸다.


“나 친구 집에서 몰래 걔네 아빠 술 먹으면서 담배 피워봤다. 근데 술 담배를 왜 하나 몰라. 그냥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하고 으쓱한 기분이 잠시 들다 말았어. 그리고 몰래 하니까 좀 짜릿하기도 하고. 히히. 쭈니 아빠는 별로 안 놀라네. 엄마는 지구 멸망 앞둔 사람 표정을 했을 텐데. 걱정하지 마. 그때 이후로는 안 해. ” 


하나가 별일 아니라는 듯 부러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흥미진진한 사건이 나한테도 일어났으면 좋겠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이제부터 내 인생을 찾겠다며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는 거야. 나는 졸지에 집안일하면서 학교 다니는 안 된 애가 되고. 그런데 반전. 청소 요리 집 꾸미기 이런 걸 아주 잘하니까. 이걸 유튜브로 만드는 거지. 그러다 청소년 살림의 여왕으로 유명해지고. 그럼 돈 벌어서 내 가게를 차려. 뭐든 맛있고 재밌는 거는 다 만들어서 파는 내 맘대로 가게. 크크.”


상상의 나래를 펴는 하나의 표정이 행복하다. 하나의 가슴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는 설렘과 호기심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지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지는 솜털처럼 가벼워지고 가슴 부위가 간지러웠다. 


“나 일 잘하지? 학교에서도 청소나 환경미화 이런 거는 잘해. 샘들이 칭찬해. 공부 말고 다 잘한다고. 몸으로 하는 일이 최고야. 내가 엄청 능력 있는 사람, 쓸모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거든. 공부는 할수록 멍청이 바보가 되는 느낌인데.”


하나의 목소리는 빠르고 경쾌하다.


“학교 학원 집 아닌 세상은 어떨까? 재밌을까? 궁금해.”


G는 하나의 이야기가 늘 흥미롭다.


“내가 이런 말 하면 친구들이 비웃어. 크면 다 알게 될 걸 별게 다 궁금하다고.

뭘 하면 이런 따분한 중딩생활이 재밌어질까? 쭈니 아빠는 혹시 알아? 알면 말은 안 하니까 문자로 알려주라.”


하나가 장난스럽게 G의 손등을 쳤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근데 쭈니 아빠, 우리 엄마 진짜 웃긴다. 공부하라는 잔소리 안 한다고 자기가 괜찮은 엄마라고 생각하나 봐. 짜증 나게 자꾸 공부 말고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 아니 내 나이에 그런 거 아는 애가 얼마나 된다고. 여기서 끝이 아니야. 모르겠다고 하면 걱정이 태산이야. 우리 엄마 알지? 걱정 중독자. 걱정만 하지 말고 도와주던지. 아니면 좀 내버려 두던지. 나 너무 속상해. 어른인 엄마가 나 좀 봐주고 위로해줘야 하는 거잖아. 근데 나만 보면 세상 심각하게 걱정하고 한숨만 쉬는데 거기다가 대고 내가 무슨 소릴 해? 아빠도 나한테는 관심 없어. 성적표 나오면 공부 못한다고 야단이나 치고. 우리 집에 내 편은 하나도 없어.”


지는 하나의 가슴에서 똑똑 눈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지의 가슴에서 따뜻한 빛이 햇살처럼 퍼져 울고 있는 하나의 가슴을 감쌌다. 고요하다. 하나의 가슴에서 쪼그맣고 싱그런 연둣빛 새싹이 올라왔다. 하나의 가슴이 살포시 웃는다.

하나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이럴 때 쭈니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확실한 내편이었을 텐데.”

“쭈니 아빠도 힘들지? 쭈니가 그렇게 가 버렸으니까. 그래도 쭈니 아빠는 다 괜찮아 보여.”


G가 온화하게 웃었다.


“그래서 난 쭈니 아빠가 좋아. 같이 있으면 나도 뭐든 다 괜찮은 거 같거든. 히히.” 


하나의 가슴에 노란색 미니장미 한 송이가 활짝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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