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bina Oct 26. 2024

첫 끗발이 개끗발

3월 초. 아직 춥다. 

짤랑~ 

풍경 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리고 윤이 들어왔다. 실내는 조용하다. 12시가 넘어야 환한 햇빛이 들어오는 카페 안은 아직 좀 어둡다. 인기척이 없다. 윤은 크게 G를 불렀다.


“오빠~ 나야~ 윤이요~ 지하에 있어요~? 커피 내릴 건데..?


 40대 초반의 날씬한 체형에 웨이브 굵은 단발 파머 머리. 옅은 화장. 평범해 보이는 외모지만 윤은 말소리가 특이했다. 보통보다 조금 높은 톤에 비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끝을 살짝 끌다 말꼬리를 내리면서 늘어지게 말했다.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부드럽고 나른한 말투다. 윤은 아일랜드 바 안 쪽으로 들어가 커피 내릴 준비를 했다. 로스팅 날짜와 원산지 이름이 붙은 원두 통들을 살피며 오늘의 첫 커피를 골랐다.


아일랜든 바 옆으로는 간단한 조리를 할 수 있는 주방 겸 다용도실이 있고 구석에 주인장의 지하 목공실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다. 윤이 다용도실로 몸을 돌렸을 때 상기 된 얼굴의 G가 나타났다. 

보통 키에 다부진 체격이다. 멋 부리지 않고 짧게 깎은 평범한 아저씨 스타일에 흰머리가 자연스럽게 섞인 반백. 주름이 별로 없는 깨끗한 피부. 턱선이 발달한 각진 얼굴에 남자답게 생긴 반듯한 이목구비. 굳게 다문 입술. 짙은 눈썹. 쌍꺼풀이 없는 보통 크기의 눈은 깊고 맑다. 목 부분에만 지퍼가 달린 짙은 남색의 편안한 면 티셔츠에 카키색 면바지 트레킹화 차림. 카페가 쉬는 월요일. 그는 지하에서 한창 대패질하다 올라왔다.


“오빠도 마시죠?” 


윤의 물음에 지는 잠시 눈빛을 주며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나 마시고 싶은 걸로 좀 진하게 내려요~” 


윤은 원두를 갈면서 말했다. 카페에서 사람들은 지와 이런 식으로 소통한다. 처음에는 다들 지가 실어증에 걸렸다고 걱정했지만 이제 모두 익숙하다. 지는 듣고 상대는 혼자 말한다. 

신선한 원두의 향이 조용하고 아늑한 실내에 가득하다. 지와 윤은 남쪽 데크 쪽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아 천천히 묵묵히 커피를 마셨다. 드디어 환하고 따뜻한 볕이 실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빠~ 선영이네 회사 배우 김 지나 알지? 선영이가 나더러 걔 책을 대필해 달래. 아니 대필하래~. 선영이는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명령조야. 하긴 걔 말 듣고 손해 본 적은 없지만.” 

    

윤은 나지막하게 말을 이어가다 G의 눈을 쳐다봤다. 눈이 웃는다.     


“내가 돈이 좀 필요하다고 했거든요. 요즘 하나가 공부는 안 하고 짜증 내고 화만 내서, 방학 때 어디 좀 보낼까 생각 중이었어요. 알아보니까 애들 모아 외국 여행 가는 여행학교라는 곳이 있더라고요. 괜찮아 보이는 데 비싸요. 남편한테 말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어요. 현실성 없다고 싫은 소리 할 거 같아서. ”


“근데 내가 분명히 고민 중이라고 했거든요. 아직 하나도 하나 아빠한테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대뜸 너 돈 필요하지? 일 줄게 얼른 튀어나와 이러잖아요. 여행학교 얘기 꺼낸 지 24시간도 안 됐어요. 1시까지 배우 데리고 여기로 온대요. 오빠도 선영이가 배우 데리고 오는 거 몰랐죠~?”     


윤은 투정 부리는 아이 같다. 사람들은 카페에서 주인장에게 혼잣말처럼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지를 투명 인간 취급하거나 신과 대화하듯 경건하고 진지하게 대할 때도 있다. 필요에 따라 주인장의 쓰임은 달라진다. 

지가 냉장고에서 몇 가지 재료로 뚝딱 요깃거리를 만들었다. 잡곡빵에 토마토와 치즈를 올린 후 잘게 다진 견과류를 뿌려 미니 오븐에 돌린 샌드위치. 윤이 커피를 더 내렸다. 두 사람은 조용히 늦은 아침을 먹었다.  

   


카페에 빛이 가득 들었다.

“짤랑~

시원스럽게 문이 열리고 키가 작고 다부진 선영이 들어왔다.      


“나 왔다~”     


남매는 많이 닮았지만 선영은 G에 비해 피부가 검고 눈이 훨씬 컸다. 강하고 센 인상이지만 쌍꺼풀 없는 큰 눈은 정직하고 선량해 보인다. 

G는 한 번 선영을 쳐다보고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선영의 뒤를 이어 키가 크고 날씬한 긴 생머리의 20대 여자가 따라 들어왔다. 단정한 핑크색 원피스에 자연스러운 화장. 하얗고 조그만 얼굴에 짙은 눈썹, 쌍꺼풀이 진 큰 눈과 적당한 크기의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 균형이 잘 잡힌 이목구비가 군더더기 없이 깨끗하다. 굉장한 미인이다. 윤은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선영은 지나를 데리고 G가 있는 아일랜드 바 쪽으로 왔다. 

    

“ 우리 오빠. 인사해. 전직 검사. 지금은 목수 일하는 카페 주인장.”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어요. 김 지나에요”     


지나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G는 가볍게 목례했다.     


“우리 오빠 말 안 해.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확인 불가. 아무튼 원래부터는 아니고. 그리고 옛날부터 티브이 안 봐서 너 누군지 잘 몰라.”     


지나는 아일랜드 바의 의자에 엉거주춤 반쯤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어색한 표정이다. 선영은 윤을 소개했다.      


“이쪽은 내가 말한 대학 동창. 무려 재학 중 신춘문예 당선. 소년 급제라는 입지전적인 기록을 남겼지만 아깝게도 결혼 이후 절필.”     

“안녕하세요? 언니 제일 친한 친구라고 말씀 들었어요. 잘 부탁드려요.”     

“너무 예쁘네요. 강소윤이에요.”     


윤과 지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 내리는 것 향 좋다. 우리 밖에서 마실래. 우리 먼저 나간다. 그리고 이건 커피값. 오늘 윤이 네가 마신 것까지 전부 다”      


선영은 윤에게 살짝 윙크하며 나무 상자 안에 오만 원권 지폐 한 장을 넣었다. 카페의 메뉴는 오늘의 커피와 아메리카노 카페 라테가 전부다. 처음 오는 사람을 제외한 손님들은 알아서 주문하고 또 알아서 계산한다. 단골들은 메뉴에 쓰인 정가보다 비싸게 값을 지불하고 나갔다. 행여 재정상의 곤란으로 자신들의 아지트가 문을 닫으면 어쩌지 싶은 걱정 때문이다. 카페는 주인이 신경을 쓰지 않는 것에 비해 부족함이 없이 잘 굴러간다.      

마당보다 살짝 높은 위치에 자리한 나무 데크에는 파라솔이 달린 둥근 나무 테이블 두 개와 의자가 있다. 카페가 살림집이었을 때는 거실과 연결된 야외 베란다였던 곳이다. 카페로 개조하면서 유리로 된 폴더형 전면 창을 달아 실내와 분리하고 볕이 좋은 따뜻한 날에는 활짝 열어 넓게 쓴다. 오전에는 볕이 활짝 들지 않아 약간 서늘하지만 해가 잘 드는 오후에는 볕 바라기를 하며 앉아 있기 좋은 카페의 명당자리다. 선영은 피곤한 얼굴로 멍하니 앉아 커피를 기다리고 지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여기저기를 살폈다.     

 

“언니네 오빠 인상 좋으시다. 여기 너무 맘에 들어. 전에 언니도 살던 집이었지? 이렇게 카페로 바꿔도 근사하다. 나 자주 와도 되지?”     


지나는 좀 전에 G나 윤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 명랑하고 말이 많다.     


“야 여기는 사무실 식구들 아무도 몰라. 나만의 쉼터라고. 그런데 자주 온다고? 아서라. 우리 오빠 봤지? 말도 안 하고 손님한테 관심도 없어. 네가 누군지도 잘 모르잖아. 나 없이 누구라도 데리고 왔다 간 죽는다! “     


선영의 말에는 거침이 없다. 지나에게 선영은 어머니와 자신이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존재다. 선영에게도 지나는 회사를 먹여 살리는 잘 나가는 연예인이기 이전에 세상 물정 몰라 돌봐주고 보살펴 줘야 하는 동생이다. 격식 없이 친밀한 관계다.     


“오빠는 검사 왜 그만뒀어? 그거 좋은 직업 아냐? 잘렸어?”

“많이 알면 다친다!”

“못됐다. 언니는 나에 대해 모른 게 하나도 없는데 나는 언니네 가족들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지나가 샐쭉해졌다.     


“조용히 해!”     


지나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선영에게 잠깐 눈을 흘기다 테이블에 턱을 개고 앉아 눈을 감았다. 오래간만에 엄마 없이 외출했다. 따뜻한 봄볕에 한가롭고 나른하기까지 하다.

윤이 두툼하고 투박한 흰색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가지고 왔다. 셋은 커피를 마시며 말이 없다. 아직 어색하다.


“각자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선영이 입을 열었다. 

윤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갑작스럽게 제안받고 오늘 나오기는 했는데, 사실 어떤 책을 쓰려고 지 설명도 못 들었고. 지나 씨는, 이렇게 불러도 되죠~?”

“네 괜찮아요”


선영에게 조잘대던 지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얌전하게 대답했다.


“지나 씨가 생각해 둔 책의 컨셉이 뭐죠~?,”

“그건 저도 잘 몰라요!”


지나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빠르게 말이 나와 버렸다. 

윤과 선영의 시선이 동시에 지나에게 꽂혔다. 선영이 눈을 크게 뜨자 지나가 황급히 말을 이어갔다. 


“그게 언니가 제 사진 보고 갑자기 포토 에세이 쓰면 대박이겠다고. 저더러 그동안 찍어둔 사진만 다 모아 놓으면 언니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지나가 말끝을 흐렸다.


“그니까 둘 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시켜서 여기까지 나왔다 이거지?”


선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언니 그게 아니라.”


지나가 얼버무렸다. 차분하고 단정했던 지나는 어린아이처럼 말이 짧아졌다.


“됐고! 지나 너 그동안 사진 찍어 둔 거 많지? 그거 너한테 중요해 안 중요해?”

“정말 소중해”

“그럼 그 소중한 걸 계속 아무도 못 보는 데다 처박아 둘래? 아니면 폼 나게 책으로 낼래?”

“책”


지나가 방긋 웃으며 경쾌하게 대답했다. 예쁘다. 

선영은 늘 이런 식이다.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걸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공격적으로 핵심을 찔러 묻는다. 그리곤 꼼작 못하게 붙들어 두고 대답을 받아낸다. 


“말이 좋아 스타지. 꽃다운 나이에 지나 네가 사생활이 있냐? 집 앞 편의점도 맘대로 못 가잖아. 그런 네가 순전히 자발적 의지로 재밌게 하는 유일한 일이 사진 찍기잖아.”


선영의 목소리가 잠깐 가라앉았다.


“그걸 세상에 내놓는 거야. 좋잖아. 내가 보니까 사진은 잘 찍어. 근데 솔직히 글은 아니잖아. 너 생일 축하 카드도 밤새 끙끙거리고 쓰잖아. 그래서 글을 대신 써줄 실력자를 내가 데려온 거지. 너는 작가 언니한테 사진 보여 주면서 이야기만 해. 그 사진에 관한 건 뭐든. 그러면 저 언니가 알아서 다 해줄 거야.”

“응~ 알았어.”


지나가 밝게 대답했다. 윤은 황당한 표정이다.


“근데 선영아”


윤이 끼어들었다.


“잠깐 질문은 몰아서. 이번엔 윤이 너”

“윤이 너 글 잘 쓰지?”

“몰라”


윤이 새침하게 대답한다.


“그지 넌 모르지. 근데 너 글 잘 쓰는 건 세상이 이미 검증했잖아. 그리고 나 공선영이 잘 알지. 내 안목이 보통 아니잖아. 그니까 됐고. 아까운 실력 지금 썩히고 있잖아. 니 작가 인생 첫 끗발이 개 끗발 되게 둘래?”

윤은 선영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윤이 너 요즘 바쁘게 하는 일 있어?”

“없어”


윤이 퉁명스럽게 답한다.

“그동안 푹 쉬었잖아. 이번 참에 몸 푸는 거야. 워밍업 몰라? 이 일 끝나면 너 쓰고 싶은 글 쓰는 거야. 이제 진짜 유명작가 돼야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야!”


윤이 목소리를 높였다.


“보너스로 책에 글 작가로 이름 넣어 줄게. 이 책 보나 마나 대박이야. 거기에 윤이 네 이름 넣어 준다니까. 그리고 원고료도 생기잖아. 노벨 문학상도 돈 안 되면 꽝이야. 계약금 넉넉히 주고 따로 인세로도 챙겨 줄게. 입 아프다. 이 책 대박이라니까. 돈 벌고 다시 이름 알리고 글쓰기 준비 운동도 하고. 윤이 네가 안 할 이유가 있어?”

“누가 안 하겠대?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분명치 않았으니까 그랬지.”

윤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맥없이 대답했다. 

“지금도 명확하지 않아?”


선영은 전혀 물러설 마음이 없다.


“됐어.”


윤은 더 이상 선영과 말씨름할 의사가 없다.    


“그럼 일단 나랑 지나 씨랑 사진부터 추리고 각각의 사진에 대한 story 작업부터 시작할게. 책의 콘셉트는 사진 추리고 충분히 이야기한 다음 함께 의논하고!”

“그렇지! 이래야 우리 윤이지.”


선영은 의자에 깊숙이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호탕하게 대답했다. 


“지나야 가자! 우리 볼일 다 봤다.”


윤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선영과 지나는 다음 일정을 소화하러 바쁘게 카페를 떠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