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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Oct 26. 2024

주인장
    

   

내 이름은 공 건. 검사 짓을 20년 했다. 

조사의 신. 피의자들에게 자백을 잘 받아내는 나를 다들 그렇게 불렀다. 그러길 수년. 어느새 나는 G가 되어 있었다. 조사의 신(GOD), 검사 공(GONG) 건(GEON)’에서 가져온 이니셜 G.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이상한 호칭. 근무하는 지청마다 은밀하게 소문도 퍼졌다.     

‘G는 조사실에서 모든 걸 끝낸다. 기소한 사건은 재판에서 다툼의 여지없이 구형한 그대로 유죄 확정판결이 난다. 상대를 꿰뚫어 보는 신기가 있으니 검사가 아니면 분명 무당이 되었을 거다.’ 

하지만 이 모두는 심심하고 따분한 검찰 공무원들이 술자리 안주용으로 재미 삼아지어 낸 과장된 헛소리다. 

피의자들은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반인권적인 방법을 사용한 적도 당연히 없었다. 더하고 덜하지도 않게 딱 지은 죄만큼의 합당한 형량을 구형하려고 오랜 시간 심사숙고했다. 출세하려는 정치적 야망은 원래부터 없었다. 억울하게 감옥 가는 사람 없이, 죄지었으면 합당한 벌 받게 하는 것. 나의 유일한 직업 소신이었다. 그뿐이다. 검사는 그저 밥벌이를 위한 나의 쉰내 나는 생업이었다.       

         


내게는 어릴 적부터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다. 그리고 이 비밀이 검사 짓을 하는 데 도움이 되긴 했다.           

“건이 이제 다 컸네. 우리 아들 최고”

초등학교 입학식. 어머니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격려와 응원을 보냈다. 

갑자기 가슴에서 어머니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와 가쁘게 내쉬는 짧은 숨소리가 느껴졌다. 아주 강렬한 느낌이었다. 

‘엄마가 떨고 있구나.’

어린 마음에 어머니가 안쓰러웠다.

“저는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 말에 당황스러워하는 어머니의 표정 뒤로 안도의 한숨이 느껴졌다.     

그 후로 이런 경험을 자주 했다. 상대방의 속마음을 아주 생생하게 느끼는 경험.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사람들의 겉모습과 속마음은 많이 다름을.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혹은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일부러 거짓말을 하거나 가면을 쓰는 사람보다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는 것을. 웃고 있지만 화난 사람. 화를 내고 있지만 겁먹은 사람. 씩씩하지만 우울한 사람.      

타인의 내면을 느낀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내면 세상이 행복하고 기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상대의 고통이나 슬픔이 그대로 느껴져 힘들었다. 몰랐으면 좋았을 진심을 알고 상처받을 때도 있었다. 

나는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사람보다 책이 편했고 대화보다 음악이 좋았다. 


검사가 된 이후로는 달랐다.      

일말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는 악랄한 반사회적 범죄자, 단순 무식한 조폭,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의 약한 고리를 틈타 기생하는 사기꾼, 험한 세상의 풍파에 휩쓸려 의도하지 않게 범법자가 된 나약하고 무능하고 어리석어 가엽기까지 한 사람들. 내가 검찰 조사실에서 상대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랬다. 조사실에 불려 온 그들의 속마음을 느낄 수 있음은 검사에게는 유용한 능력이었다. 

“억울해요?”

“두려워요?”

“걱정돼요?”

“화나요?”

“혼란스러워요?”

“후회돼요?”

피의자의 진짜 속마음을 되돌려 물으면 심문은 쉽게 풀렸다. 상대가 말하게 했다.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속마음을 느끼고 다시 되돌려 주고. 핑퐁처럼 주고받기가 이어지면 결국 그들은 진실을 이야기했다. 상대의 내면을 느낀다는 오랜 비밀이 나를 조사실의 신으로 불리게 했다.     

검사를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였다. 지방 국립대학의 법학과를 졸업하고 두 번의 사법 시험 낙방 후 은행에 취직해 평생을 성실한 직장인, 남편, 아버지로 살았던 아버지. 늘 온화한 표정의 과묵했던 아버지.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가슴에서 소처럼 죽어라 일만 하며 늙어 가는 삶의 비통함을 자주 느꼈다. 내게 거는 기대와 희망도.

특별히 하고 싶었던 일도 없었고 고단했던 아버지의 삶에 기쁨이 된다면 내 삶도 충만하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서울에 있는 법대에 진학해 사법 시험에 합격했고 검사가 되었다.     

 


부모님이 소개해준 사람과 결혼했다. 아내는 한동네에서 자란 네 살 어린 여자였다, 상냥하고 자상한 아내는 말이 없고 일밖에 모르던 무뚝뚝하던 나를 자주 웃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겉모습과 내면이 별로 다르지 않아 참 좋았다. 밝고 담백한 사람이다. 결혼 일 년 후에 아들 준이 태어났다. 준은 무럭무럭 잘 자랐고 나보다 머리 하나 더 키가 컸을 때 고등학생이 되었다. 내 인생은 부족함도 넘침도 없었다. 평화롭고 행복한 때였다.     

준은 고등학생이 되었던 그해 6월, 학교 옥상에서 떨어져 세상을 떠났다. 바지 주머니에서 옥상 열쇠와 담배, 라이터가 나왔다. 타살로 볼 외상이나 상처는 없었다. 유서도 학교생활에서의 이상 증후는 없었기에 자살로 볼 수도 없었다. 결론은 실족에 의한 추락 사고사. 경찰 수사에 허점이나 빈틈은 없었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들은 그날 밤 출입이 금지된 학교 옥상에 왜 올라갔을까? 담배는 왜 피웠을까? 교사들만 가지고 있는 옥상 열쇠는 어떻게 얻었을까? 내가 모르고 있었던 아들의 모습이 있었나?  

아들과 나눴던 대화, 함께했던 시간을 복기하고 아들이 남기고 간 행적을 쫓아다녔다.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더욱 말이 없어지고 지옥 같은 생각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채 죽기 두려워 생존하고 있었다. 그러길 거의 1년. 아내는 동생이 있는 캐나다로 떠났다. 

“그냥 어느 날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접싯물에 코 박고도 죽는 대잖아. 그 이유가 그렇게 중요해? 걘 죽었다고. 그러고 있으면 죽은 애가 살아 돌아와.? 제발 좀 그만해. 숨 막혀. 17살 먹은 애가 학교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무슨 합당한 이유가 있겠어? 이제 나는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아. 그냥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신 우리 아들을 다시 볼 수 없어서 죽을 만큼 슬프다고!!”     

완전히 혼자가 된 나. 검사를 그만뒀다. 미련 따위는 없었다. 먹고사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더 이상 내 가슴에서도 사람들의 가슴에서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나는 아들의 속절없는 죽음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비참한 아비일 뿐이었다.      


나는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실어증에 걸린 것이 아니다. 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침이면 눈을 떠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산에 갔다. 죽지 않을 만큼 먹었다. 산에서 돌아오면 대패질을 했다. 나무 냄새, 손끝에서 느껴지는 매끈하고 반들반들한 나무 결. 지하 작업실에는 나무로 만든 잡동사니들이 쌓여 갔다.      

졸지에 혈혈단신 홀아비가 된 나를 위로하기 위해 가족. 몇몇 지인들이 찾아왔다. 불쑥 집에 들이닥쳐 식사를 챙겨주거나 안부를 묻는 그들마저 내칠 수는 없었다. 말을 아예 하지 않는 나를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난리를 치던 사람들도 차차 나의 침묵에 익숙해졌다. 


그들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자신들도 고통을 겪어 알고 있노라며 묻어두었던 상처와 아픔에 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나는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인생은 아이러니다. 사람들은 자식이 먼저 죽어 버리고 아내마저 떠나버린 천하의 재수 없는 나보다는 그래도 자신들이 낮지 않겠냐는 식으로 위안을 얻었다. 나는 그들에게 미안함이고 다행이고 위로였다. 

‘아무렴 내가 당신만큼 힘들겠어요.’ 

게 혼자 사는 내 집은 지인들의 고통 처리 전담반이 되어갔다.      

준이 떠나고 3년. 조그만 정원과 지하 주차장이 있었던 우리 집은 일 층은 카페, 이층은 나의 주거 공간인 카페‘성북동’이 되었다.     


그럭저럭 장사가 된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하지만 커피 내리는 솜씨는 훌륭하다. 번잡하지 않은 수준에서만 손님을 받는다. 내가 목공 일에 열중해 있을 땐 대신 주인장 역할을 사람도 생겼다.      

막내 선영의 단짝인 윤. 강소윤이지만 우리는 그녀를 그냥 윤이라 부른다. 대학 신입생 시절 영화 동아리에서 처음 만난 윤과 선영은 늘 붙어 다녔다. 선영은 몇 년 전 독립해 나가기 전까지 나와 함께 살았기에 윤은 친동생처럼 익숙한 존재다. 그녀는 신춘문예에 당선된 등단 작가였지만 결혼하고 글 쓰기를 그만뒀다. 그리고 강산이 두 번 이상 바뀔 즈음 윤은 중 3짜리 딸이 있는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여전히 선영과는 매일 통화하고 캐나다로 가 버린 아내와도 친자매처럼 지낸다. 그런 윤은 오전이면 카페에 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카페의 잡다한 일을 하고 손님들을 상대하다 해가 지면 돌아간다.      


하나. 윤의 외동딸. 중학교 삼 학년 한참 사춘기다. 네 살 많은 준을 쭈니라고 불렀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하나는 준을 야무지게도 쭈니라고 불렀다. 이후로 하나에게 준은 계속 쭈니였다. 형제자매가 없는 하나에게 쭈니는 오빠의 다른 대명사였다. 나는 당연히 쭈니 아빠였다. 쭈니와 쭈니 아빠. 우리 부자는 이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아이들은 사이가 참 좋았다. 하나는 준이 그렇게 가 버린 후 우리 부부만큼 상심했다. 시시때때로 카페에 불쑥 찾아와 코코아를 마시고 나를 돕다 마지못해 집에 간다.  

    

선영. 나보다 8살 어린 우리 집 막내. 집안의 피를 물려받아 말이 짧다. 대학 시절 내내 영화에 빠져 지냈다. 감독이 꿈이었으나 첫 직장인 영화제작사에서 신인 배우 지나의 매니저 일을 하다 그녀를 데리고 독립해 일인 기획사를 차렸다. 윤의 말에 따르면 업계에서 꽤 잘 나간다고 한다. 대학 입학 후 쭉 함께 살다 독립한 지 5년이 되었다. 하지만 혼자된 오빠를 챙긴다는 이유로 바쁜 중에서 카페에 뻔질나게 드나들다 결국 집을 카페로 만들어 버렸다. 선영은 불쑥불쑥 찾아와 자기 멋대로 카페를 이용한다. 


티. 나랑 배가 잘 맞았던 전직 강력계 형사다. 이름이 태영탁.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영문 이니셜의 T 두 개에서 따 온 티로 불리길 원했다. 사람들은 그를 티 형사로 불렸다. 잘 생겼다. 옷도 잘 입는다. 바람둥이 같지만 사귀는 여자는 없었고 지금도 없다. 현장을 좋아했던 경찰대 출신의 엘리트 형사. 10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다단계 사기 사건 검경 합동 수사 때 처음 만났다. 넉살 좋게 형님이라 부르며 나를 따랐다. 갑자기 찾아와 밥을 먹고 술을 먹자고 했다. 그래봤자 그가 하는 이야기는 온통 과장된 남들 이야기이거나 어디서 본 듯한 영화나 드라마를 짜깁기 한 수사 무용담들이었다. 내가 심드렁한 반응을 보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이 잡아들인 용의자가 취조실에서 자살을 시도해 코마 상태에 빠진 후 형사를 그만뒀다. 그 후 사설탐정 비슷한 일을 하며 엄청나게 돈을 벌고 있다. 하지만 그가 허허롭고 외롭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역시나 카페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커피보다는 나와 술을 마신다,     


자식을 잃고 아내마저 떠나버리고 온전히 혼자였던 날. 상실과 슬픔이 나를 집어삼켜 버린 날. 나는 없어지고 끝도 없는 침묵과 고요 속에 환한 빛과 하나 되던 날. 비로소 고통에서 자유로와 지던 날. 

그날 이후 나는 사람들의 말을 귀가 아닌 온전히 가슴으로 듣는다. 가슴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입으로 무슨 말을 하던 내게는 가슴의 진실이 들린다.  그들의 가슴이 울고, 화 내고,  기뻐하고, 상처받고,  가슴에서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새소리가 나고.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가슴으로 듣는다. 


카페에 나를 찾아온 사람들 대부분은 가슴이 들려주는 자신의 진실을 듣지 못한다. 

누군가 가슴이 하는 말을 온전히 듣게 되는 순간,  상대와 나의 가슴이 밝은 빛으로 연결되고 아름다운 진실의 꽃이 피어난다.  오늘은 누구에게 그런 순간이 찾아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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