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지나가 촬영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선영에게도 아무 말 없었다. 모범적인 배우 생활 10년이 넘었지만 처음이다. 지나 출연 분을 제외한 촬영이 진행되었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선영은 주저 없이 위약금을 물고 드라마 출연을 취소했다. 지나가 자취를 감추고 하루 만에 방송사는 주연 여배우를 교체했다. 선영은 발 빠르게 소속사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지나는 누적된 피로와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사망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촬영을 진행할 수 없다. 불가피하게 예정된 드라마 출연을 취소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치료와 회복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드라마 촬영 첫날 주연 배우 교체라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킨 점 팬들과 방송 관계자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인터넷과 방송에서는 온갖 추측과 소문이 돌았다.
지나가 잠적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굶주린 언론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던 지나는 점점 화제의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월요일 카페가 쉬는 날. 김밥과 만두로 이른 저녁을 해결한 G와 선영 윤은 아일랜드 바에 모여 커피를 마셨다. 선영은 연신 하품했다. 윤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지나 아버지 이리로 오시라고 했어. 사람들 부담스럽겠지.”
“아버지한테도 전화 없대?”
“없대!”
선영은 무겁게 감기는 눈에 힘을 주었다.
“오빠 커피 좀 더 줘.”
“좀 정리는 했어?”
“그냥 일정 다 취소했어. 이번 드라마 들어가면서 계약한 광고랑 화보 촬영 위약금도 물어줬어. 사람들 눈에 꼬리 잡히지 않고 지내다 조용히 돌아오면 돼.”
“왜 그랬을까?”
윤이 혼잣말했다. 선영은 자신에게조차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지나에게 화가 났었다. 하지만 분노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연민과 걱정으로 바뀌었다.
“오죽 견디기 힘들었으면 그 겁쟁이가 그러고 도망을 갔겠냐? 그냥 장례 끝나고 푹 좀 쉬게 둘 걸 그랬나 싶다. 감이 안 좋았는데 이게 이렇게 터지네. ”
“선영이 네가 알아서 수습해 줄 거라 믿었을 거야. 안 그랬으면 뒷일이 걱정돼 도망도 못 갔을 거야.”
“어디에 숨은 거지? 바보인 줄 알았더니 꽁꽁 잘 숨었네.”
선영이 피식 웃었다.
“몸 성하게 잘 있다 돌아오면 문제없어. 연예인은 하기 싫으면 때려치우고. 먹고사는 거야 원래 금수저고. 지가 벌어 놓은 것도 차고 넘쳐.”
“그러게 어디 있다고 연락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윤이 집으로 돌아가고 지나 아버지가 왔다. 큰 키에 흰 피부 잘생긴 외모에 귀티가 났다. 대번에 지나 아버지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지나는 아버지의 외모를 많이 닮았다. G는 목례를 나눈 후 커피를 한 잔 내려주고 지하 작업실로 내려갔다.
“황 대표 어디 갈 만한 데 없을까요? 실종 신고가 어려우면 사람이라도 동원해 찾아야 않을까요? 몹시 불안합니다.”
점잖게 이야기했지만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동안 일하면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어머니 일로 한꺼번에 터진 것 같아요. 어디서 혼자 지내다 곧 나타날 겁니다.”
선영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황 대표. 그렇지 않아요. 황대표에게 이야기 못 한 것이 있어요. 사실 지나가 없어졌던 날 새벽에 집에 갑자기 왔어요.”
“무슨 일로?”
“그게.”
지나 아버지는 잠시 말을 잊지 못했다.
“지나는 생모가 따로 있는데 그걸 알았데요.”
“네?”
선영이 화들짝 놀랐다.
“부끄럽지만 지나는 제가 불륜으로 낳아 온 아입니다. 지나가 지 엄마 유품을 정리하다 생모랑 찍은 자기 아기 사진을 본 거 같습니다. 내게 확인하러 그 새벽에 달려왔어요. 엄마밖에 몰랐던 애가 얼마나 충격이 컸겠어요? 자세한 사정은 듣지도 않고 흥분해서 나가 버렸어요, 그 후 연락이 안 되는 겁니다. 너무 걱정스러워요.”
“휴우.”
선영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거기까지는 몰랐습니다. 생각보다 간단치가 않네요. 일단 아버님 제가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버님도 계속 연락해 보세요. 문자도 남기시고. 그리고 혹시라도 갈 만한 곳이 있나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어릴 적에 부모님이랑 갔던 곳이나 가족들만 아는 장소라던가?”
“네 그러죠. 황 대표 수고 좀 해주세요.”
선영이 떠나고 중년 남자 둘이 맥주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초면에 실례가 많습니다. 황 대표가 오빠께서 말씀은 안 하시니 개의치 말고 좀 쉬었다 가라고 했습니다. 너무 늦지 않게 택시 부르겠습니다.”
지나 아버지가 맥주잔을 비웠다. 여전히 점잖다. G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새로 꺼내 더 따라 주었다.
“우리 딸이 여기를 자주 왔다고 하더군요.”
“세상이 전부 예쁘다고 하는 딸. 저는 맘껏 예뻐해 주지도 못했습니다.”
“고 이쁜 녀석! 실은 제가 아내 말고 다른 여자랑 사이에서 낳은 아입니다.”
“엄마 유품을 정리하다 알고서는 저한테 확인하러 왔었죠,”
지나 아버지는 잔을 비웠고 G는 다시 채워주었다. 침묵이 흘렀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지나 아버지는 경계심 없이 자신의 삶에 대해 아주 긴 넋두리를 했다.
“집사람 집안과는 오랫동안 서로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어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결혼도 부모님들끼리 일찍부터 정해두었습니다. 딸이 없었던 부모님께서 똑똑하고 경우 바른 아내를 어려서부터 아끼셨죠. 저에게는 여동생 같은 존재였죠. 제게는 따로 마음에 두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어요. 지나 생모였어요. 집사람을 키워준 유모의 딸이었죠. 어디 삼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웃긴 이야기지만 그 사람이랑 도망칠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집안의 기대를 저버릴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제가 누리고 있던 것들을 포기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냥 제 앞에 정해진 안전한 길을 택했습니다. 의대를 졸업해서 집안 가업을 이었고 부모님의 뜻대로 결혼도 했습니다.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능력 있는 의사로 효자로 충실한 남편으로 부족함 없는 삶이었죠.”
“결혼한 지 5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질 않았어요. 저는 별로 개의치 않았어요. 하지만 아내는 점점 더 불안하고 예민해졌어요. 그때쯤 지나 생모를 만났어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 몸이 안 좋아 쉬러 왔다고 하더군요. 반갑고 궁금해서 몇 번 만났습니다. 그런데 아내와 아이 입양 문제로 심하게 다툰 날 어찌하다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그 사람은 얼마 후 서울로 다시 돌아갔고요. 아이가 생겼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가 생기질 않자 입양을 결정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내가 지나를 데려왔습니다. 처음 아이를 안았을 때 제 자식이라는 걸 그냥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아내 모르게 유전자 검사를 했더니 제 아이가 맞더군요. 지나 생모는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 여자 사이에 어떤 이야기와 결정들이 오고 갔는지 모릅니다. 사실을 묻어 두기로 결심한 아내에게 제가 먼저 말을 꺼낼 수는 없었습니다. 오직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쭉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암묵적인 비밀이 있는 만큼 딱 그만큼의 거리감이 항상 있었습니다. 삶이 뭔가에 빚지고 있는 것처럼 무겁고 생기가 없었습니다. 어디다 다 털어 버리고 자유로워지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저 두 여자가 제게 내린 형벌이려니 했습니다.”
“지나가 끝까지 몰랐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냥 우리 부부와 생모 세 사람이 지고 갈 인생의 업보로 끝났으며 좋았을 걸을. 인생에는 늘 예상 못한 변수들이 끼어드는 것 같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인생이 슬프다는 생각 해 보셨습니까?”
“병원과 집 밖에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세상의 인정도 받았고 돈도 꽤 벌었죠. 그런데 안간힘을 쓰며 살아왔던 제 삶이 그냥 그저 그런 시시한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내가 죽고 나니 비난받기 두려워 지켜왔던 모든 것들이 전부 부질없어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다르게 살 수도 없지 않습니까?”
“지나가 저를 찾아왔던 날 여자랑 함께 있었습니다. 병원과 집안일을 관리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옆에서 욕심내지 않고 저를 보살펴준 사람이에요. 지나에게 털어놓고 남은 인생은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할 참이었어요. 그런데 얄궂게도 제 인생은 중요한 순간에 제 의지와 상관없이 늘 엇박자가 나는 것 같습니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지나를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픕니다. 지나가 저를 원망하고 비난하고 미워하고 이런 건 다 견딜 수 있습니다. 별일 없이 돌아오기만 하면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잘 생기고 점잖고 반듯한 해 보이는 중년 남자. 그는 지치고 쓸쓸하고 허전한 모습으로 카페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