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카페의 오전은 한가하다. 첫 손님은 모자 공방 주인 희정.
윤은 희정이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대기업에 다니다 건강이 나빠져 그만두고 이 동네에 모자 공방을 차렸다고 했다. 부잣집 딸이라 일하지 않아도 여유롭게 먹고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는 금수저라고도 했다. 예쁘장한 얼굴에 활발한 30대 초반의 희정은 윤을 언니라고 부르며 카페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런 희정의 최대 관심사는 연애. 희정은 만나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윤과 G를 붙들고 하소연했다.
“나는 왜 한 사람을 오래 만나지 못하죠.”
하지만 희정은 정작 질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희정은 아일랜드 바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괴고 G가 커피 내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G가 커피 두 잔을 들고 희정 앞에 앉았다. G는 희정의 가슴에서 공기처럼 떠다니는 자유로움과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을 함께 느꼈다.
“어제 남자 친구랑 헤어졌어요. 장난 삼아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가볍게 물었어요. 그런데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다고 굉장히 단호하게 대답하더라고요. 일로 성공하기가 현재 가장 중요한 인생 목표라고. 대치동에서 입시학원 해요 제가 헤어지자고 했어요. 재미로 한 말에 정색하고 대답하는 그 사람한테 갑자기 마음이 차가워지더니 정이 뚝 떨어졌어요. 그 사람도 너무 선선히 그러자고 했고요. 집에 왔는데 미련 따위는 하나도 없었고, 그냥 전과 다르게 생각이 많았어요.”
“그동안 습관처럼 남자를 만났던 것 같아요. ”
희정이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더듬었다.
“늘 불안했었거든요. 부족함 없이 자라 좋은 직장 다니고 그랬어도. 사랑하는 사람, 영혼의 단짝 이런 상대를 만나면 해결되려나 싶어 이 사람 저 사람 소개받으며 남자를 만났어요. 그런데 어제 갑자기 나는 남자를 원한 게 아니었구나. 그저 불안을 해결하고 싶었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귀던 사람과 헤어졌는 데도 너무 아무렇지가 않잖아요. 늘 그랬어요. 다른 사람을 또 물색했죠. 그러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희정은 평소보다 차분하고 진지했다.
"왜 한 사람을 오래 만나지 못할까?라는 질문에 답을 찾았어요. 웃기지만 제가 원한 건 사랑하는 사람, 영혼의 짝 이런 게 아니었어요. 난 결혼을 원했더라고요.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서 오랜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였어요. 결론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나도 모르게 남편감을 찾고 있었던 거죠. 나침반의 방향이 틀려 자꾸만 엉뚱한 목적지로 가고 있는 줄 몰랐던 거죠. "
"안정적인 가정을 만들고 싶었으면 선봐서 조건 맞춰 결혼해도 될걸. 괜히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면서 힘 빼고 다닌 거 같아요. 사실 저 연애 별로 안 좋아했어요. 감정적 밀당 이런 거 피곤해요. 사랑, 영혼의 짝 이런 말에 감흥도 없었어요. 입으로만 존재의 불안을 채워 줄 나의 반쪽 이러고 다녔지. 후후. 좀 순수하고 감성적으로 보이고 싶었나 봐요. 안정적 삶, 조건 맞는 결혼 이런 건 너무 속물처럼 보이잖아요. 그게 싫었나 봐요. 솔직히 엄청 속물이면서 아닌 척하느라 힘들었던 거죠. "
희정의 목소리가 밝다.
"그래 나는 여자의 자아실현 사회 활동 이런 거 별로 관심 없다. 모자 공방도 남들한테 내세우기 좋고 심심하니까 하는 거다. 돈 많은 부모덕에 많이 누리고 산다.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영혼의 단짝 이런 불확실한 것보단 능력 있고 돈 많은 남자 거기다 자상하기까지 한 남자랑 결혼하는 게 더 좋다. 가정 꾸리고 아이 낳아서 지금보다 더 편하게 잘 살고 싶다. 어때서? 나는 돈 좋아하고 편한 거 좋아하고 사랑보단 조건 따지는 완전 속물이다. 밤새 자기 비하인지 뭔지 이러고 나니까 막혔던 속이 뻥 뚫리고 너무 시원해졌어요. 속물이어도 자신한테 정직해지니까 기분은 좋아요. 속물이면 좀 어때서요?”
희정의 가슴이 파란 하늘빛이다.
"그런데 사장님 조건 맞는 남자 만나 결혼해서 아이 낳고 편하게 살면 내 오랜 불안이 잠잠해질까요? 그걸 잘 모르겠어요."
G가 씽끗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