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중순. 아직 한낮에는 덥다. 카페에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고 다녀갔다. 그런 날이 있다. 특별한 그날의 분위기나 날씨 같은 뭐라 콕 집어 단정하기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커피를 생각나게 하는 공통의 느낌이 강하게 작동하는 날. 종일 단골뿐 아니라 가끔 오는 사람 처음 보는 사람 심지어는 이곳에는 아주 흔치 않은 테이크아웃 손님까지. 윤과 G는 점심도 거른 채 저녁때까지 종일 분주했다.
늘 그렇듯 8시가 되자 카페가 한가해졌다. 윤은 오늘 지나를 만나 책 작업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남편은 회식으로 늦고 하나도 학원가는 날이다. 저녁밥으로 골목 어귀 큰길의 파스타 가게에서 마르게리타 피자 한판을 포장해 와 지와 나눠 먹었다. 지나는 9시가 조금 넘어 피곤한 얼굴로 혼자 나타났다. 이제 지나는 선영 없이 혼자 카페에 곧잘 온다. 다음 달에 촬영을 시작하는 드라마의 대본 연습을 하고 오는 길이다.
“언니 커피 진하게 한 잔 주세요. 간신히 운전하고 왔어요,”
“로맨틱 코미디라고 하지 않았어요? 대사가 많아요?”
윤이 물을 올리며 물었다.
“그냥 이런 밀고 당기는 사랑 타령 좀 지겨워서요. 내가 내년이면 30인데 극 중 배역이 실제 나보다 8살이나 어려요.”
“20대 초반 역할도 어색하지 않다는 건 좋은 일 아니에요?”
지나는 카페에 와서 책 작업을 하고 나서부터 점점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표현했다.
“감정 이입이 안 되니까 어색해 죽는 줄 알았어요. 전 건들거리는 여자 형사 해보고 싶어요. 대역 없이 액션도 찍고 욕도 하고요. 재밌을 거 같지 않아요? ”
윤은 오늘 지나가 책 마무리를 할 마음보다 촬영을 앞둔 드라마로 쌓인 불편함을 털어 버리고 싶음을 느꼈다. 책 작업 마감일이 정해 진 것이 아니니 급할 일은 없다. 윤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비교해 불과 몇 달 사이에 변한 지나의 모습을 보면서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화려한 프레임 속 이미지에 갇혀 있던 지나가 자유로워지는 데 자신이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생각해서다.
“언니랑 작업 너무 좋았어요. 여기만 오면 편해서 앞뒤 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했더니 신세계가 열린 것 같았어요.”
“그래요? 다행이네. 나도 좋았어요, 오랜만에 일도 하고. 지나 씨 얘기 듣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참 비밀 상담? 나도 그거 나도 해보고 싶어요. 선영 언니가 여기 단골들은 커피 말고 비밀 보장 고충 처리 이런 거 하러 온다던데?
‘맞아요. 호호. 사실 이 카페는 사람들이 자기 고민이나 비밀 이야기하고 낸 돈이 커피 팔아 버는 돈보다 훨씬 많아요.”
“그니까 나도 할래요”
“지나 씨도 은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요?~”
“남들 욕 실컷 해보고 싶어요. 말 한 번 잘못했다가는 큰일 나니까요. 선영 언니 말고 어디다 얘기할 데가 없어요. 단일 창구에 변화를 좀. ”
“언제 한 번 날 잡고 와서 실컷 욕하고 가요. 사장님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니 완전 비밀 보장이잖아요,”
“아 진짜 맞다. 오늘 예약하고 가야지.”
윤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선영이네?”
“여보세요. 응. 나랑 있어.”
윤이 전화를 받는 동안 지나가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어머 전화를 왜 이렇게 많이 했어?”
선영에게서 9번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무슨 일 있대요?”
지나가 윤을 쳐다보며 물었다. 윤은 잠깐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윤은 계속 알았다고 대답만 하다 전화를 끊었다.
“바꿔 주지 그랬어요. 전화하래요?”
“저 지나 씨”
윤이 머뭇거렸다. 선뜻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다.
“지나 씨 너무 당황하지 말아요.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지금 00 병원에서 응급 수술 중이래요. 내가 운전해서 데려다 줄게요. 얼른 차 키 줘요.”
지나는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뒀는데? 왜 없는 거야?”
지나는 울면서 가방을 뒤적거리다 내용물을 전부 테이블에 쏟아 버렸다. 지갑 파우치 잡동사니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자동차 키가 테이블에 떨어졌다. 윤은 안쓰럽게 쳐다보다 키를 집어 들고 지나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지나 씨 일단 진정하고! 자 나가요.”
지나는 손을 바들바들 떨며 윤의 손에 이끌려 카페를 나갔다.
00대로에서 급하게 차선을 바꾸려다 마주 오던 차를 들이받고 차가 뒤집혔다. 지나 엄마는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부터 의식이 없었다. 지나와 윤이 수술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사가 사망 선고를 내린 뒤였다. 먼저 와 있었던 선영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지나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지나 엄마는 소속사의 이사 신분이라 선영은 장례 절차 등 처리해야 할 일로 바빠졌고 그런 선영 대신 윤이 지나 곁에 있었다. 당황스러워 허둥대기는 지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삼오재까지 모든 장례 의식은 끝났다. 지나는 광주 집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돌아왔다. 지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그간 미뤄뒀던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개봉을 앞둔 영화 홍보, 화보와 광고 촬영,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관련 매체 인터뷰와 관련 행사까지. 선영은 지나가 바쁘면, 상실감과 슬픔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지나는 점점 힘겨워 보였고 드디어는 영화 시사회 내내 침울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었다. 인터넷에는 슬픔에 빠진 국민 연인 지나의 사진들로 도배가 되었다. 다행히 사람들은 엄마를 잃은 지나에게 동정적이었다. 하지만 선영은 지나가 내년 상반기까지 잡혀 있는 스케줄을 과연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이 깊어졌다.
초상 치른 지 얼마 안 된 지나를 소속사에서 너무 부려 먹는다는 인터넷 기사에는 선영을 향한 악성 댓글들이 점점 많아졌다. 게다가 선영에게 다소곳하고 의존적이었던 지나는 전에 없이 자기 멋대로 행동했다. 엄마 없는 집에 혼자 자기 무섭다며 새벽에 선영에게 달려왔다. 급기야는 이사하고 싶다고 떼를 쓰기도 했다.
곧 촬영에 들어가는 드라마가 하기 싫다고 소리 내어 울었고 어느 날은 자기만 두고 갑자기 떠난 엄마가 원망스럽다고 화를 냈다. 종일 먹지도 않고 잠을 자거나 멍하니 앉아 있는 날도 있었다. 지나는 야위고 더욱 창백해졌다. 선영은 이토록 우울하고 생기 없고 의욕 없는 지나가 낯설었다.
선영도 예민해졌다. 직원들에게 사소한 일로 불같이 화를 냈고 운전대를 잡으면 욕부터 했다. 불안하게 시간이 가고 있었다. 다음 주면 지나가 그렇게 하기 싫다던 드라마 촬영이 시작된다. 밤샘 촬영을 지나가 버텨 낼 수 있을지 웬만한 일로는 끄덕하지 않는 선영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윤은 집에 갈 채비를 했다. 지나는 장례식장에서 본 후 소식이 없다. 위로와 걱정의 문자를 보내도 답은 없다. 윤의 마음도 심란하다. 뜨거운 물에 목욕이라도 하고 일찍 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빠 가요.”
G는 식물도감은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윤을 카페 대문까지 배웅했다. G는 골목을 따라 총총히 걸어가는 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당에 서 있었다. 따뜻한 곳에 있다 나오니 한기가 들었다. 그래도 정신은 맑았다. 하늘을 쳐다봤다. 해가 진 어스름한 저녁 하늘이 깨끗했다. 입을 다물고 코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맑은 공기로 허파를 가득 채웠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상쾌하다. 긴 호흡을 몇 번 되풀이하고 카페로 들어왔다.
원두를 사러 온 동네 사람 외에 손님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G는 카페 문을 닫고 서둘러 청소를 끝낸 후 목공실로 내려갈 채비를 했다. 오늘부터 완성된 설계도를 보고 실지 크기의 10분의 1로 줄인 나무 보트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시험 삼아 만들어 물에 뜨는지 물은 새지 않은 지 점검하려고 한다. 맥주 두 캔을 챙기고 카페의 실내외 등을 전부 껐다. 바깥의 가로등 불빛이 카페 안을 희미하게 밝혀준다. G는 어둠이 익숙해지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걸었다. 카페의 하루는, G의 일상은 단순하지만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윤은 카페 영업 끝나고 만나자는 선영의 연락을 받았다. 남편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하나도 학원에서 돌아와 방으로 들어갔다. 윤은 두꺼운 카디건을 걸쳐 입고 집을 나섰다.
카페에는 선영이 아닌 티가 있었다. 지에게 나지막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티와 윤은 가볍게 목례하고 구석 테이블로 갔다. 선영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신호음만 한참 이어질 뿐 연결이 되지 않았다. 윤은 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들어간다.”
신호음이 한 번 울리고 선영은 한마디 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짤랑‘
선영이 들어왔다. 까칠하고 낯빛이 어둡다. 티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참이었다.
“황대표 오랜만이에요? 요즘 힘드시죠? 아무쪼록 잘 되길 응원합니다.”
반갑게 선영에게 인사를 했다.
“형사님은 신수 훤하시네. 요즘 돈 많이 버시나 봐요.”
“그냥저냥. 담에 한 잔 합시다. 그럼 얘기 나누십시오.”
윤은 아일랜드 바로 자리를 옮겼다. 선영이 윤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뭐 하느라 전화도 안 봤니?”
외박하고 들어온 남편 바가지 긁는 아내처럼 톡 쏘는 말투다.
“피곤해 그만해. 오빠 아무거나 시원한 거 한 잔만”
G는 오렌지 주스에 얼음을 띄워 가져다주고 지하 작업실로 내려가려고 했다.
“잠깐 있어할 말 있어.”
선영은 G를 잡아두고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숨도 쉬지 않고 주스를 들이켰다.
“간밤에 소주 한 병 원샷하고 곯아떨어졌더니 좀 났네.”
“왜? 지나 때문에? 너라도 정신 차려야지.”
“지나 걔가 여기 드나들고 너랑 작업하더니 말을 안 들어. 숨구멍 터줬더니 제일 먼저 날 들이박네. 어디서 반항 질을. 다 때려치우겠다고 난리다. 패 줄 수도 없고. 아무리 내가 능력자라도 그 많은 일정을 어떻게 다 취소해? 일단 미룰 수 있는 건 다 미뤘는데 다음 주 드라마 촬영은 어쩔 수 없어.”
“많이 힘들겠다. 사람 마음이 자판기도 아닌데 엄마 상 치르고 얼마나 됐다고 하필 멜로야?”
“나도 마음 아파. 그니까 그만해라.”
선영이 답지 않게 목소리에 힘이 없다.
“그래서 드라마 촬영은 어떡해?”
“뭘 어떻게? 해야지. 그래도 상도가 있지. 여기 오기 전에 진지하게 하기 싫으면 다 관두라니까 꼬리 내리지. 이번 것만 끝내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했어. 정신 좀 차린 거 같아.”
“많이 심각하구나.”
“지나는 엄마가 자기 우주야. 우주가 무너졌는데 큰일 났지, 게다가 요즘 속내를 너무 드러내. 길게 보면 좋은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지. 암튼 이 선에서 마무리.
선영이 G에게 주의를 돌렸다.
“오빠 이 집 사면서 은행에서 받은 대출금 이제 다 갚았어. 오빠 앞으로 명의변경 할 거야. 회사에서 사람 오면 필요한 거 협조해. 이제 이 집은 대출 없는 오빠 집이야.”
“진짜? 너무 잘됐다.”
G는 선영을 빤히 쳐다봤고 윤은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준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전세로 들어온 이 집의 주인은 일 년의 반 이상을 외국에서 생활하는 중년 남자였다.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아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많은 집을 팔고 싶지 않았다. 자신만큼이나 이 집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지가 맘에 들어 6년간 저렴하게 전세를 연장해 주었다. 그러다 가족이 전부 미국에 정착하자 주인은 시세보다 싸게 쳐 줄 테니 G에게 집을 사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세보다 싸도 검사 월급으로는 엄두가 안 나는 금액이었다. 대신에 강남의 사무실과 접근성이 좋은 곳으로 독립할 계획이었던 선영이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 그 뒤 선영은 집을 카페로 바꿀 때도 마땅치 않은 G에게 맘에 안 들면 전세금 빼 줄 테니 나가라고 협박했었다. 자신이 집주인이라며 카페 개조 비용도 모두 부담했다.
“지나 어머니 돌아가셔서 회사 건물하고 지분이랑 정리할 것이 많아. 이번 참에 이 집도 정리한 거야. 처음부터 이 집은 선물로 오빠네 사 주려고 했던 거였어. 언니랑 준이가 없어서 아쉽지만. 나 돈 많아. 그동안 많이 벌었더라고. 그니까 그냥 하라는 대로 해. 대신 이 층 내 방은 건들 지마. 그건 내 지분이니까, 언제든 맘대로 쓸 거야. 알았지?”
G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캐나다 언니한테도 현금 좀 보냈어. 해 바뀌면 한 번 다녀올 거야. 그리고 이건 윤이 거.”
선영이 가방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윤에게 주었다.
“지나 정신 좀 차리면 출판사 정할게. 그때 정식 계약서 쓰자. 이건 선수금. 받아 둬.”
“어디 멀리 가는 사람처럼 왜 그래?”
“몰라. 그냥 터닝 포인트?”
윤은 봉투를 받아 열어 보았다. 100만 원 권 수표 열 장이 나왔다.
“뭐가 이렇게 많아?”
“이번에 그 정도 수고는 충분히 했어.”
“돈 버니까 기분은 무지 좋네. 고마워 친구”
“자 다들 앞으로 잘해 봅시다.”
선영이 물 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다. G와 윤은 커피잔을 들어 술 없는 건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