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인간을 꼼짝달싹 못하게 밀어붙일 때가 있다. 선영도 윤 부부도 그랬다. 당황하고 겁먹고 우왕좌왕했다. 나중에야 깨닫는다. 일어나야 했던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인생의 필연성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리 괴로워하지는 않았을 것을.
‘엄마 아빠 나 방학 동안에 한 달만 친구 집에서 지내다 올게. 부모님이 일하셔서 늦게 오시는 집이고 안전한 곳이니까 걱정하지 마. 허락 안 해 줄 거 같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미안해. 엄마 아빠한테 불만 있어서는 절대 아냐. 그냥 집에 있으면 공부 말고 할 것도 없고 답답하기만 해. 고등학교 가기 전에 엄마 아빠 간섭이나 도움 없이 한 번 생활해 보고 싶어. 일 생기면 연락할게. 꼭 들어갈 거야. 제발 한 번만 믿고 기다려줘. 나 찾겠다고 괜히 학교 친구들 괴롭히지 말고.’
겨울 방학 하루 만에 하나가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아침 카페에 지, 윤이 부부, 선영, 티 형사가 모였다. 새벽에 하나의 가출을 알게 된 윤이 다급한 마음에 소집한 모임이다.
“하나처럼 편지까지 써 놓고 제 발로 집을 나간 경우, 실종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해도 적극적으로 수사하지는 않아요. 핸드폰 위치 추적이나 통화 내역조회는 영장이 필요한 일인 데다 지금은 하나가 전원을 꺼버렸으니, 현재로선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아직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 조금 지켜보면 좋겠어요.”
티는 차분하고 진중했다.
“미성년이 부모 허락 없이 한 달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겠다는데 실종 사건이 아니라니 말이 이게 됩니까?
하나 아빠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하나 아빠.”
윤이 남편의 손등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학교 친구들을 만나서 구슬려서 만나보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보통 청소년 가출이나 실종은 주변인 탐문 탐색이 제일 효과적이죠. 다행히 방학이라 결석으로 학교에서 문제 될 것도 없고. 소문나면 좋을 일도 없으니 조용히 친구들에게 알아보도록 하죠.”
티가 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윤아 네가 형사님한테 친한 애들 연락처 알려줘라. 원래 애들 머리 크면 자기 엄마건 남의 엄마건 엄마라는 사람이 물어보면 대답 잘 안 해. 삼촌이라 그러고 만나 봐요.”
선영의 말에 윤이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우발적으로 집을 나가면 지낼 곳도 마땅치 않고 돈이 없어서 안 좋은 일이 많이 생겨요. 다행히 하나는 머물 곳도 정해 놓고 돈이랑 필요한 것들도 챙겨 나갔으니 너무 앞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티가 윤이 부부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하나가 힘들면 제 발로 들어올 거야. 그니까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예단하지 말자.”
선영이 윤의 손을 꼭 쥐고 부드럽게 말했다. 지가 윤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윤과 티는 아이들의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하나 아빠는 일단 출근했다. 지는 카페 문 열 준비를 했고 선영은 부족한 잠을 보충하러 2층으로 올라갔다.
오후 3시.
카페에는 손님이 제법 있다. 지는 커피를 내리느라 분주했다. 선영과 윤은 커피를 마시며 3시까지 오기로 한 티를 기다리고 있다.
‘짤랑’
문이 열리고 빠른 걸음으로 티가 들어왔다. 술 돌린 틈도 없이 경과를 설명했다.
“은지랑 몇몇 친구들은 뭔가 아는 것 같지만 얘기는 안 해줘요. 다그치면 아예 입을 닫아버리니까 어른 도움 필요하면 전화하라고 연락처를 남겼어요. 요즘 이슬이라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랑 친하게 지낸다고 해서 만났어요. 그 친구 말이 하나가 방학 때 아르바이트하고 싶다고 이거 저거 물어봤다고 해요. 집 나갈 낌새는 없었대요. 좀 기다려 보죠.”
티는 일이 있다며 급하게 카페를 떠났다.
“하나 고거 맹랑하네,”
선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애가 간도 크지.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걱정이야.”
“우리 때도 속상하면 친구 집 가서 자고 그랬잖아. 친구 집에 있을 거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 남편은?”
“출근했어도 일이 손에 안 잡히지. 나보다 더 걱정해.”
“지나는?
윤은 잊고 있던 지나의 안부가 궁금했다.
“아직. 이번 주까지 기다려 보고 소식 없으면 티 형사한테 알아보라고 할 거야.”
“여기 실종수사대네. 그래도 지나는 성인이잖아.”
“세상 물정 모르는 건 하나보다 더하지.”
지는 방금 내린 커피를 선영과 윤에게 내어 주었다.
“오빠 혼자 바쁘게 해서 미안해요.”
“야 나는 우리 오빠가 이렇게 일 잘하는지 몰랐다. 너무 신경 쓰지 마. 하나 고것이나 빨리 찾아야지.”
선영이 윤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독거렸다.
하나가 집 나간 지 일주일째다. 티는 아이들 사이에 눈에 띄는 변화가 없는 걸로 봐서 별일 없는 것 같다며 윤 부부를 안심시켜 주었다. 윤은 평상시처럼 11시쯤 카페에 나왔다 해가 지면 돌아갔다. 기운은 없었다.
하나 아빠는 퇴근 후 매일 카페에 들러, 지와 맥주를 마시다 갔다.
그는 자신이 다정한 아빠나 남편은 아니었다고 자책 비슷한 말을 했다. 어느 날은 주변의 딸 가진 친구 동료, 다 거기서 거기 별로 다르지 않다며 왜 하나만 유별난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아이스크림 사주고 장난감 사주면 아빠 최고야 하면서 볼에다 뽀뽀해 주던 꼬마도 아닌데, 사춘기 딸이 어색하고 얼마간의 거리가 생기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며 항변할 때도 있었다. 걱정이 너무 된다며 약한 모습을 보이다가 아내가 전과는 달리 지금의 상황을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것이 자신에게 많은 힘이 된다고까지 했다. 아내와 딸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는 전에 없던 변화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종잡을 수 없는 그는 인생 최대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카페가 쉬는 월요일. 12월이 며칠 남지 않았다. 새벽부터 눈이 내린다. 지는 2층을 대청소했다. 진하게 커피 한 잔을 내려서 카페 밖으로 나왔다. 눈이 이제는 더욱 탐스럽게 내렸다. 눈은 내리는 족족 쌓였다. 나무에도 카페 간판에도 정원에도. 눈이 세상의 모든 소음을 흡수해 버리고 바깥은 고요하다.
지는 갑자기 먹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주먹만 하게 눈을 뭉쳐 소복이 쌓인 눈 위에 굴렸다. 처음에는 어른 주먹만 했던 눈덩이가 축구공만 해졌다 점점 더 커졌다. 어느새 초등학생 키 정도의 눈사람이 완성되었다. 나뭇가지로 눈, 코, 입을 만들었다. 몸에서 열이 나고 얼굴이 발그레하다.
그 사이 눈발이 가늘어졌다. 빗자루로 카페 입구에서 골목 어귀까지 눈을 치웠다.
지는 발을 탈탈 털고 안으로 들어왔다. 윤이 신경 쓰지 않은 카페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지는 주방 옆 붙박이장에서 크리스마스 장식물을 꺼냈다. 묵은 먼지를 털고 물걸레로 닦아 주었다. 미니 트리를 테이블 중간에 놓았다. 크리스마스 전구는 아일랜드 바 안쪽의 키 높이 선반에 대충 걸었다. 전구를 켰다. 썰렁하던 카페에 온기가 돌았다.
“짤랑”
문이 열리고 선영이 들어왔다.
“오빠가 만들었어? 눈사람 예쁘네. 크리스마스? 커피!”
지는 커피를 내려주었다.
지와 선영은 마트에서 장을 봤다. 남매는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과 된장찌개를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배가 부르자 선영은 자기 방에 들어가 낮잠을 잤다. 지는 원두를 볶았다. 카페가 쉬는 월요일에는 평소보다 많은 양의 원두를 볶는다. 선영과 윤을 위해서다. 볶은 원두에서 선영과 윤에게 줄 것을 미리 챙겨 두었다. 로스팅 기계를 꼼꼼하게 청소했다. 눈이 그치고 날이 어둑해졌다. 선영이 이층에서 내려왔다. 개운한 낯빛이다.
“오빠 커피 좀 줘. 오랜만에 진짜 잘났다.”
지는 커피를 내리고 선영 몫으로 덜어 둔 원두를 지퍼 백에 담아 주었다. 선영은 핸드폰을 확인하며 커피를 마셨다. 문자에 답을 해 주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나지막하게 통화도 했다.
일곱 시. 밖은 완전히 깜깜하다. 선영은 돌아갔고 깜깜한 실내에 크리스마스 전구가 깜박거린다. 지는 아일랜드 바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가만히 하나를 떠올렸다. 가슴이 따뜻하다. 편안하다. 분명 하나는 잘 지내고 있다.
잠자리에 들려던 지는 윤의 문자를 받았다.
‘오빠 나 좀 갈게요.’
지는 유자차를 한 잔 내주었다. 윤은 컵을 두 손으로 꼭 감쌌다.
“오빠 나 참 못됐어.”
목소리가 잠겼다.
“바람 쐬러 나왔다 집 앞 편의점에서 하나 친구가 엄마랑 같이 가더라.”
“행복해 보였어요.”
“나만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것 같아 서러웠어요. 하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무서웠어요.”
“오빠가 생각났어요. 그래도 하나는 살아 있으니까. 내가 오빠보다는 낮다고. 오빠도 저렇게 살고 있는데.”
“오빠의 불행이 지금 내게는 위로가 돼요. 어쩜 좋아요. 미안해요”
지는 들썩이는 윤의 어깨를 가만가만 두드려 주었다. 윤은 소리 내지 않고 한참을 울었다. 지의 가슴에서 환한 달빛이 새어 나와 깜깜하고 답답한 윤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고요함이 흘렀다.
윤을 큰길까지 데려다주었다. 윤이 탄 마을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고통이 부모만의 몫은 아니다. 하지만 자식은 부모의 걱정과 근심 속에서도 무탈하게 자라 어른이 된다. 살아만 있다면. 지의 가슴이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