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전날. 카페에는 손님이 많았다. 지와 윤은 종일 바빴다.
특별한 날이 데리고 온 분주함과 소란스러움 물러나자 카페는 크리스마스 전등만이 깜박거릴 뿐 적막하다.
텅 빈 카페. 지나가 왔다. 밤마실 나온 고양이처럼 은밀하고 조심스럽다. 화장 안 한 얼굴에 회색 스웨터와 청바지, 운동화 차림이다. 지는 유자차를 내줬다.
“사장 아저씨 독심술 하시나 봐요. 오늘은 커피 말고 따뜻한 유자차를 마셔야지 했는데.”
웃고 있지만 눈에 슬픔이 가득하다.
"세상의 모든 밝고 행복한 것은 다 누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내 인생.
삶의 모든 동기가 엄마였던 바보 같은 나. 엄마 마음에 들려고 그렇게 애쓰지 말 걸 그랬어요. 엄마가 그냥 좋았어요. 든든한 산처럼 언제나 내 편인 줄 알았어요. 빛나는 별이 되어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던 나의 바람 나의 미션.
그런데 내 존재 자체가 엄마에겐 슬픔과 좌절이었음을 알았어요. 이제는 세상의 빛나는 별이 되었지만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나의 미션. 그것도 모르고 참고 견디고 버텼던 날들.
서러워 울었어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울었어요. 혼자가 두려워 울었어요. 엄마 없는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서 울었어요. 숨을 쉴 수 없었어요.
엄마를 사랑했어요. 행복했던 기억이 많아요. 그래서 상처받았지만. 가슴이 너무 아프지만. 엄마를 떠나보내야만 해요. "
지나의 가슴에서 숭숭 황량한 바람 소리가 났다. 대여섯 살 된 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아이의 텅 빈 옆자리가 춥고 쓸쓸하다. 지의 가슴이 운다. 눈물이 강이 되고 커다란 손이 나왔다. 아이의 조그맣고 동그란 등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지나의 가슴이 환한 빛으로 따뜻하다.
지나는 티의 도움을 받아 당분간 혼자 지낼 오피스텔을 구했다고 했다. 엄마 없는 세상. 아버지로 대신할 수 없는 엄마의 빈자리. 자신 앞에 놓인 혼자 감당해야만 하는 수만은 결정과 책임의 순간들. 당장은 무서워 도망쳤지만 돌아오려면 연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나가 운전석 문을 열고 앉았다. 실내등을 켜고 시동을 걸었다. 갑자기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 사람 하나가 차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순식간이었다.
지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너무 놀라 몸을 움직일 수 없다.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모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살짝 눈을 떴다. 앳된 얼굴의 여자가 지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다.
“괜찮으세요?”
순하고 착한 목소리다.
“누.. 구세요.....?”
지나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커다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내 이름은 김하나. 우리 엄마는 강소윤. 우리 엄마 절친은 공선영. 나는 언니 누군지 알아요. 언니 진짜 이뻐요.”
“작가 언니 딸?”
지나는 그제야 허리를 펴고 한숨을 내쉬며 조수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네 쭈니 아빠 보려고 왔었는데 언니가 나오길래.?”
지나는 눈에 힘을 주고 하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가 이 시간에 왜 여기 있어? ”
“집 나온 지 일주일 됐어요”
“뭐? 가출했다고?”
“방학 동안만요. 개학 전에 들어갈 거예요.”
“어머머 너 그동안 어딨었어? 빨리 집에 가자. 데려다줄게.”
“친구 집에 있었는데 일이 생겨서 갈 데가 없었는데 잘 됐어요. 언니가 좀 재워주세요.”
“갈 데가 없으면 집에 가야지. 어서 엄마한테 전화해. 안 그러면 지금 내가 사장 아저씨 데리고 나온다.”
“언니도 잠적했잖아요. 내가 그날 언니 사라진 거 보고 용기 얻어서 집 나간 건데요?”
지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뭐? 얘가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누가 들으면 내가 가출을 부추긴 줄 알겠네. 너랑 나랑 같니. 넌 미성년이잖아.”
“이대로는 집에 못 들어가요. 언니도 답답해서 도망친 거잖아요. 언니 맘 100퍼센트 이해해요. 저도 비슷하단 말이에요. 언니가 자꾸 이러면 저도 선영 이모한테 전화해서 지금 언니랑 같이 있다고 할게요.”
“너 지금 나 협박하니? 어머 너 엄마랑은 너무 다르다. 어쩜 이렇게 당돌하니?”
“그럼 어떡해요. 계획이 있어서 아주 큰맘 먹고 나온 거라 말이에요. 언니 제발 부탁이에요. 언니가 카페에서 나오는 데 구세주를 만난 거 같았어요. 제발 부탁해요.”
“알았어. 일단 엄마한테 전화부터 해.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나랑 같이 자고 내일은 집에 들어가는 거다. 알았지?”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할래요. 아무튼 오늘은 언니가 좀 재워주세요. 저 너무 피곤하거든요.”
지나는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 자신의 마음을 100퍼센트 이해한다니. 거기다가 자신과 비슷하다고까지 하는 저 맹랑한 꼬맹이. 어이없게 이런 꼬맹이의 가출 공모자가 될 줄이야. 그런데 옆에 있는 이 꼬맹이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오피스텔은 경복궁역과 사직동 사이의 공원 옆에 있었다. 대로변에서 조금 떨어진 곳. 공원 주변에는 오피스텔이 유일한 건물이다. 한적하고 조용하다. 지나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앞으로 몇 달 지내야 할 16층으로 올라갔다. 오피스텔 내부는 널찍했고 생활하기에 적합하게 잘 갖춰져 있다.
“뭐 좀 먹어도 돼요. 저녁도 못 먹고 배고파요.”
“맘대로 챙겨 먹어”
지나는 커리어에서 옷가지들과 화장품을 꺼내 정리를 시작했다, 하나는 라면 끓일 물을 받고 있다. 지나는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근데 진짜로 가출은 왜 했어? 집이 답답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니? 어른이나 애나.”
“그러는 언니는요?”
“얘가 웃기네.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야지.”
“고등학교 가기 전에 엄마 아빠 간섭 없이 살아 보고 싶었어요.”
“세상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돈을 버는지 그런 거도 알고 싶고.”
“그런 게 왜 궁금하니?”
지나는 개켜둔 옷가지를 한쪽으로 밀어 두고 하나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해 봐.”
“관심 있어요?”
하나는 심드렁하다.
“응.”
“내일이면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 데 다 소용없어요.”
하나가 시무룩하다.
“사실대로 다 말하면 여기서 당분간 지내게 해 줄도 있어”
하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말요?”
“응”
지나는 하나의 눈을 쳐다보며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왜 그랬는지? 그동안은 어떻게 지냈고 또 앞으로는 어쩌고 싶은지. 어서 말해봐. 뭐든 다 들어줄게. 네 이야기가 무지 궁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