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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나다아재 Sep 30. 2024

아래층 여자

우리 아파트 아래층에는 아름다운 여자가 산다. 

우리 아파트는 총 다섯 개 동이 서로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서 있다. 


복도식인데 그런 형식으로 위에서 보면 오각형 모양이니 가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펼쳐진다.


“여기가 이래 봬도 경기도 변두리이긴 해도 미 국방성 펜타곤인가에 영감을 받아서 시공업자가 지은거래유~”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부동산 아줌마는 너스레를 떨었다. 


아침 출근길이나 퇴근길에 보면 마치 가로로 다니는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마치 원을 도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설계자가 의도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엘리베이터가 복도 중앙이 아닌 끝에 만들어 둔 덕분이다. 덕분에 불편하긴 해도 보는 사람들 동선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단지였다.. 


아파트 끝 쪽에 로비가 있다니 아이러니하다. 이걸 만든 건축가는 ‘미친놈’이거나 천재일 것이다. 난 이 아파트의 15층에 살고 있다. 내가 제일 높은 층이다. 이곳에서도 엘리베이터와 제일 떨어진 끝층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는 모든 사람들을 지켜보는 자리가 되었다. E동 1525호다. 


얼마 전 나는 나이 앞 숫자가 '사'자에서 '오'자로 바뀌면서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은행에 27살에 입사해서 약 23년간 정말 재밌게 일했다. 

일반 행원으로 입사해서 은행 지점장까지 해 보고 나왔으니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고 자부해 본다. 

여기까지는 사회라는 제도하에서 내가 사는 겉모습일 뿐이다. 


나는 국가 공인 킬러다. 내 소속은 이곳에 쓸 수가 없다. 다만 스파이 영화 007 시리즈에 나오는 제임스본드처럼 국가에서 유일하게 살인면허를 받은 사람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렇다고 무지막지하게 아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절대 아니다. 특히 나는 여자와 아이들은 절대 죽이지 않는다. 그건 내 상관들도 잘 알기에 나에겐 그런 임무를 주지도 않는다. 


일은 아주 가끔 있다. 1년에 많으면 서너 건이라 투잡을 해도 괜찮다. 이쪽 세계에 발을 담그기 전에는 몰랐다. A급이나 B급은 주로 난이도가 높은 일을 한다. C급은 그냥 의뢰를 받아서 업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수입도 들쑥날쑥이고, 잘못하면 감옥에 가서 자동 은퇴처리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쪽 세계에서는 나름 A급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살짝 지질해 보이는 모습을 자주 연출하기도 한다.  


왜 음식을 먹고 나면 이렇게 쓰레기가 많이 쌓이는 것일까. 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서 비닐봉지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이런 순간에는 제발 아무도 안 만나기를 마음속으로 소망해 보지만 그건 절대 한 스무 번쯤 타면 겨우 한번 이루어지는 확률 오 퍼센트짜리 기원일 뿐이다. 오늘은 바로 아래층에서 잡혔다. 


띵동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는데 아무도 타지 않아서 문 닫힘 버튼을 누르려다가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서 코만 살짝 엘리베이터 선상에 내밀고 밖을 보니 아래층 여자가 고개를 돌리고 서 있었다. 나는 얼른 열림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 열렸습니다.”


여인은 멈칫하더니만 고개를 바닥을 향해 처박고 인사를 하듯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고개를 숙이고 타는데 내 눈동자는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훈련을 받은 것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눈 주위에 든 시퍼런 멍 자국은 시간이 오래된 것이 아니다. 


“날씨가 너무 덥죠?”


내가 부채를 흔들었다. 


내가 먼저 양보를 해서 여자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다. 그리고 나도 버렸다. 수도를 틀고 음식물 쓰레기 통도 씻고 손도 씻었다. 


‘차 한잔 하실래요?’


내가 여자에게 먼저 말했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 마음속으로 한 말일 뿐이었다.  


여자를 힐끗 보니 눈자위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남자를 대표해서 마음이 아팠다. 내가 알기로 이 여자는 혼자 산다. 


이렇게 이쁜 여자를 쥐어패는 새끼는 뭐 하는 놈일까? 


물론 가끔 이 여자를 찾아오는 배가 남산만큼이나 나온 중년의 사내가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30대 초반처럼 보이는 아직 싱싱한 여자를 가끔 찾아오는 남자는 늘 아파트 입구 쪽 일반인 자리 옆에 장애인 자리를 반쯤 걸쳐서 주차를 하곤 한다. 여기는 수도권 외곽 아파트라 아파트 주차자리도 넉넉해서 별도의 주차 차단봉도 없고, 막는 사람도 없다. 지하주차장도 있지만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 그만큼 1층이 넓고 넉넉하다.  


아파트 1층 흡연구역에서 너무 잘 보이는 주차구역이라서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불뚝이 남자는 짙은 눈썹을 하고 늘 인상을 쓰고 내려서는 아파트를 한번 올려보고 화단에 대고 ‘카악’하는 소리와 함께 경멸을 내뱉었다. 


차는 철 지난 고급차다. 늘 어두울 때와서 해가 뜨기 전에 사라진다. 

덩치가 크고 날개길이가 2미터는 족히 되는 돼지박쥐가 있다면 어울리는 별명일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배불뚝이 남자는 일주일에 두세 번 들린다. 보통 저녁 9시나 10시경에 오는데 대리기사가 문을 열어주고는 떠난다. 

그리고 다시 한두 시간 있다가 밤 12시나 새벽 1시경에 대리기사가 와서는 태우고 어디론가 떠난다. 


이곳에 이사 온 지 6개월 밖에 안되었지만 난 바로 패턴을 파악했다. 


여자는 키가 아담하고 작은 편이다. 가냘픈 몸매지만 수영을 다녀서 그런지 몸에 근력은 제법 있어 보인다. 탄탄한 몸매의 여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일을 나간다. 저녁에 나가는데 용쾌도 그런 날은 배불뚝이 남자도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일정을 서로 공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배불뚝이 남자는 나랑 키가 비슷하다. 눈으로 봐도 백팔십 센티미터는 넘는다. 남자의 손바닥은 크고 굵었으며 석 돈은 족히 돼 보이는 금반지는 채무자에게 뺏었거나 직접 맞춘 것으로 보인다. 한두 번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적이 있었는데 내가 목례를 해도 받아 준 적이 없다. 


“어, 여기 거래처 접대 중이야. 한잔 더 하고 갈게.”


둘이 타고 있는데 버젓이 통화를 끊고는 14층 도착소리가 나자마자 굵은 발자국을 소리를 내면서 사라진다. 엘리베이터가 곡선으로 생겨서 문을 닫기까지는 그 남자가 걸어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다 보였다.   


여자의 눈에 푸른 멍이 보이지 않았으면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사회이니까 말이다. 남녀 간의 지지고 볶는 일이 그 얼마나 흔하든가. 그렇게 있다가 또 언제 싸웠나는 듯이 헤헤거리고 웃고 떠들기도 하는 것을 보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하던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올라가는데 여자는 원피스의 목 부분이 축 늘어져서 당장 버려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것 같은 낡은 여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눈에는 초점도 없어 보였다. 내 존재를 생각도 못하는 듯이 바닥에 내려놓은 음식물 쓰레기 통을 집는데 여자의 몸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의도치 않게 봐 버린 풍만함에 놀라서 내가 고개를 돌렸다.


그날 저녁 9시 즈음에 담배를 피우러 1층으로 내려갔다. 남자의 차는 이미 주차장에 비스듬히 주차되어 있었다. 난 엘리베이터에서 15층이 아닌 14층을 눌렀다. 여자의 집은 1425호다. 

우리 집 바로 아래층이다. 이곳은 특이한 점이 또 있었다. 아파트 비상계단이 외부로 도드라져 있었다. 25호 라인 밖으로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각 동 25호 라인은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게 인기라서 매매가격도 25호 라인만 살짝 높다고 부동산 아주머니가 말했던 기억이 났다. 


아파트 비상계단이 25호 라인으로 내려와서 이쪽은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복도 쪽 창문이 손가락 한 뼘 크기로 열려 있었다. 


낡은 아파트라 복도등 센서는 군데군데 고장이 나 있었다. 난 그 어두운 그늘에 잠시 서 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남자의 말이 창문 틈으로 흘러나왔다.


“이제 그만 만나요. 우리. 이런 것 저도 이제 신물이 나요. 계속 만나자고 하면 아내분께 말하겠어요.”


“뭐라고?” 남자의 외침이 라디오 볼륨을 갑자기 킨 것처럼 커졌다. 


‘짝’하는 소리와 ‘꽝’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아악, 왜 때려?”


“야 이년아, 너 내가 너 룸살롱에 빚진 것 갚아주고 데리고 온 것 잊지 마라. 그것 다 갚으면 내가 떠나 줄게. 이 미친년이 내가 너 그냥 좋아서 그 딴 빚 갚아준 줄 착각하지 마라. 넌 내 배설구야 그냥 배설구라고. X 같은 년이 어디서 대들어 대들기는. 지가 무슨...” 남자는 씩씩거리고 있었다.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배웠다. 사격에서 총을 든 여자나 총을 든 아이에게조차 나는 주춤거렸다. 


“정찬주 훈련생, 지금 어디에 신경 쓰는 거야. 넌 그놈의 약한 마음 때문에 실패할 거야.” 교관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교정에 쩌렁쩌렁 울렸다. 


교관들은 하나같이 그 부분을 가지고 나에게 박한 점수를 주었다. 하지만 사격 1등, 목표 탈취 1등, 달리기 1등 같은 눈에 보이는 수치에서 성과를 보이니 나에게 수료증을 주지 않을 순 없었다. 


“무슨 양아치인가요. 담력 센 사람이 1등 하게요. 두고 보세요. 저는 제 방식대로 반드시 해 낼 겁니다.”


난 그렇게 말했다. 


첫 임무는 일본 스파이였다. 야마모토란 자는 온몸을 문신까지 하고 야쿠자로 위장을 하고 있지만 그의 실체는 일본 우익단체에 한국의 군사정보를 넘기고 있는 사내였다. 


“들키면 어금니 깨물어.” 훈련기간 내내 교관이 했던 말이다. 

마치 권투선수가 링 위에서 마우스피스를 끼듯이 임무 중에는 어금니 쪽에 치사량의 캡슐을 붙여둔다. 

비상시에 강한 힘으로 씹으면 몇 초안에 사망하는 엄청난 독약캡슐이었다. 


그게 원칙이었다. 고문을 당하면 우리 측 정보를 다 불어야 했다. 물론 체포 시에는 국가에서는 나를 부인한다. 나는 우리 소속의 특성상 원하는 데로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신분증을 발급받았다. 우리는 어디에나 속해있었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단순히 죽이는 게 목표가 아니야. 증거도 남기면 안 돼. 거긴 사방이 CCTV야. 내 말 뭔지 알지?” 


상관은 그걸 새삼 또 강조했다. 월급 외에 공작금도 받았다. 통장을 분리하라는 조언을 받고 공작금 통장은 따로 분리했다. 회사명으로 돈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숫자 영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세어지지가 않았다. 3자에 영이 하나 둘셋넷... 여덟 개나 되었다. 3억 원이란 거금에 내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다시 세어보아도 3억 원이었다. 


“공작금 남는 건 다 니 거야. 그렇다고 아끼진 말고. 하다 보면 차 몇 대 부서지는 경우도 있고 물론 그런 것은 회사에서 다 처리할 거야. 주어지는 임무의 난이도에 따라서 주어지는 거니까. 저 새끼가 우리나라에 주는 피해를 생각하면 너한테 지급되는 공작금은 조족지혈이야. 하다 보면 가끔 죄 없는 민간인이 피해를 입는 경우도 생겨. 최대한 그것만 조심해. 기분 더러우니까.” 상관은 양쪽 입술을 다 같이 올려서 웃는 법이 없었다.


“아, 쓰발 오늘따라 할 말이 X나 많네. 절대 불가피한 상황 말고는 총 쓰지 마. 특히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너 그거 쓰는 순간 국내가 문제가 아니야. 외국 스파이들은 당장 알아. 우리가 벌인 짓이라는 걸” 


야마모토가 한국에 들어와 있는 기간은 딱 4박 5일이었다. 그 안에 박살을 내자는 것이 상관의 계획이었다. 그 조직 내에도 협력자가 있었다. 동선을 쫓아보니 부산 해운대 나이트클럽이 들어 있었다. 웨이터 복장으로 VIP룸을 살피니 남자 6명에 여자 6명이었다. 남자들은 다 조폭이고 여자들은 사전 예약한 아가씨들이었다. 


기관에서 지원팀이 따라붙어서 나를 서포트해 주었다. 낡은 봉고에 긴급전기보수라고 쓰인 차는 전봇대 밑에 서 있어도 아무런 이질감이 없다. 나는 웨이터 복장을 했지만 내가 보는 시선은 실시간으로 차량 안 대기팀에도 보였다. 사실 이 팀은 비상상황이나 긴급 비상구 역할을 하기에 나만 잘하면 사용할 일이 없었다. 


“잘 들리지?”

나는 대답대신 손가락을 내 눈앞에 들어 보였다.


나는 이렇게 요란 떨면서 일해야 하는 것이 킬러라면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상관은 그때 표정을 굳힌 채로 딱 잘라 말했다. 


“야, 인마, 정 프로. 착각하지 마. 너 감시하는 게 아니고. 너 도와주려고 하는 거야. 여기 선배들도 다 그렇게 지금 이 자리까지 와 있는 거야. 너 이거 몇 번하고 잘한다 싶으면 다른 사람 도와주러 빠지니까 걱정 마라. 니 폼이 지금 얼마나 엉성한지 상황 판단은 괜찮은지 다 피드백해 주려고 하는 거니까. 이 새끼는 지가 무슨 최고의 에이스인 줄 착각해요. 착각을.” 


상관은 혀를 찼다.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난 위스키를 타면서 목표에게 잔을 한잔 올리겠다고 말하고 위스키 잔에 17년 산 위스키를 부었다. 옆에 앉아 있던 덩치가 손바닥을 펼치면서 잠깐 저지를 했다. 자신의 오른쪽 끝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야, 끝에 앉는 귀염둥이 이름이 뭐냐?”


“써니예요. 써니.”


“네가 먼저 먹어봐라. 독 탄 것 먹으면 안 되니까. 우리 귀한 손님.”


“ここで毒になったか確認するために、あの女にまず酒を食べてみるように言いました。(여기에 독을 탔을지도 몰라서 확인을 하려고 저 여자에게 술을 먹여보겠습니다.)”


옆에 앉은 한국 조폭이 일본어로 뭔가 말하고 있었다. 일본 야쿠자는 알겠다는 듯이 시선을 여자 쪽으로 돌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는 위스키 병에 살짝 이뇨제를 떨어뜨렸다. 


훈련장에서 마술을 배웠다.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카드는 그리 신기했다. 마술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의 시야 앞에서 깜쪽같이 일을 해야 하는 우리의 일과 닮아 있었다. 난 이 가루약을 넣어야 하고 이들은 몰라야 했다. 어두운 조명아래에서 이 정도 가루약을 넣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내 손바닥에 숨겨져 있던 가루약은 위스키병을 내려놓는 사이에 완벽히 들어갔다. 


사실 마술이야 그렇다 해도 내가 왜 외국어까지 배워야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킬러가 외국어를 배우는지. 하지만 혹독한 언어 훈련 덕분에 영어는 기본이고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까지 마스터를 했다. 그때 알았다. 맞으면 안 외워지는 것은 없다. 공부의 왕도는 없다는 말을 틀렸다는 것도. 공부의 왕도는 매였다. 하루에 기본 50대는 맞았다. 다만 때리고 방치하진 않았다. 예쁜 간호사가 들어와서 치료도 해주고 마음도 풀어주었다. 그건 심리치료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길게 버텨야 한 시간이다. 화장실 인근에서 나와 우리 팀이 대기했다. 화장실을 가는 것을 기다려서 머릿속으로 움직임에 대해서 체크를 한번 했다. 녀석의 뒤를 따라가서 문의 잠금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녀석이 뒤를 돌아보는데 안주머니에 준비한 칼로 ‘손님 잠시만요’라고 말하면서 예리한 칼로 정확히 허벅지 경동맥까지 찔러 넣었다. 


사내는 ‘아악’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시끄러운 소리에 묻혀서 멀리 퍼지진 못했다.


소매와 손바닥에 피가 뿜어져 나왔다. 

“길어야 1분이야.”


내가 일본어로 말했다. 

“이 끈 빌려줄까. 손바닥으로는 안돼. 이걸로 막으면 살 수는 있어. 같은 패가 누구야?”


“정 프로, 타깃과 말하지 마라.” 이어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넘어 들렸다. 

야마모토의 피가 온몸의 문신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화장실 바닥이 남자의 몸 근처에서 붉게 번져갔다. 


“빨리 말해, 이제 30초 후면 넌 죽어.”


잠시 동안 망설이던 야마모토가 말했다.

“김점백이라고 한국인이 있다. 내가 전달할.....”


그의 눈빛이 허공에 머물러 초점이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화장실 문을 살펴 시 열고 나왔다. 문 밖을 지키던 사내가 건넨 망토 속으로 들어갔다. 

이동하면서 ‘수리 중’ 팻말을 뗐다. 사람들이 볼 때는 마치 저절로 문이 열리고 팻말이 혼자 바닥에 떨어진 듯이 보였다. 하지만 화려한 사이키 불빛과 레이저 광선 귀를 찢을 듯한 비트음에 취한 사람들에게 구석진 화장실 입구에서 벌어진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이 X발 년이 확.”


욕설은 내가 현관문 쪽에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어서 내 귀에 옷이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싫다는 소리 등이 들렸다. 여름 끝이라 각 아파트마다 문을 닫고 에어컨을 돌리는 소리와 문을 활짝 열고 거실에서 TV를 보는 소리 등이 섞여서 생활소음을 만들어 냈다. 집안에서 난동을 피우지만 이 근처에서만 소리는 머물렀다. 배불뚝이 사내는 적당한 데시벨을 유지하면서 화를 내고 있었다. 


난 입술을 오므렸다. 


난 계단 옆을 지나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슴 높이까지 올라간 콘크리트 난간은 떨어지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난간 위에는 경비실에서 올리지 마라고 경고를 계속한 터라 그나마 소형 선인장 화분을 올린 곳이 그래도 더러 있었다. 난 담배를 꺼냈다. 어차피 낮에는 내려가도 밤에는 가끔 집 앞에 나와서 피는 사람들이 있다. 평소에는 잘 피우지 않기도 하고 복도식 아파트에서 그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 자체를 경멸하던 나였다. 그늘에서 불빛이 맞은편 동에서 보이지 않게 계단 쪽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하지만 아무리 얘인이라지만 저렇게 막무가내로 폭행을 일삼는 남자를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어머니가 늘 맞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이런 모습을 보면 옛날 어릴 적 트라우마가 확 올라왔다. 그걸 우리를 담당했던 교관들도 늘 걱정했다.  


특히 우리의 모든 생활까지 담당했던 생활 교관은 마지막 임무에서 얼굴에 칼을 맞고 결국 일선 임무에서 빠졌다고 했었다. 괜한 시비에 걸려서 일반인을 상대로 너무 방심했다는 것을 자책했었다. 


“너희들 꼭 한 가지만 명심해라. 화가 나서 사람을 죽이면 킬러 그만둬야 해. 우린 국가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는 것을 잊지 마. 국가에 수백억 수천억 아니 수십조의 피해를 주는 벌레들을 청소하는 게 너희들이야. 너희 몸 값이 얼마겠니? 그런 엄청난 일을 해야 하는 너희가 한낱 치정이나, 순간의 울분으로 화가 나서 사람을 죽인다고 치자. 그렇게 너희 신분이 노출되면 사실상 너희는 무용지물이야. 꼭 명심해라. 첫째도 평정. 둘째도 평정. 셋째도 평정. 너희 한 명 한 명은 국가의 자산이자 이순신장군이고 세종대왕이야. 그걸 항상 잊지 말고 어디서든지 국가의 최첨병이란 자부심을 가져.”


마지막 수료식을 마치고 소주잔을 든 채로 우리들의 생활 교관이 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날 미친 듯이 술을 마셨다. 각자 소주 3병씩 이상 마셨지만 아무도 취한 사람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게 우리의 마지막 테스트였다는 점이고 교육기간을 통틀어서 우리 기수만이 유일하게 아무도 낙제한 사람이 없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자네 습관이 있는 것 알고 있나?” 교관이 가게 앞에 따라 나와서 내 옆에 서서 담뱃불을 붙였다.


“네, 입술 오므리는 것 말입니까?”


“그래, 아무도 없을 땐 괜찮겠지만, 타깃 앞에서는 조심해. 자네 화가 나거나 긴장하면 입술을 오므리더군.”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낮은 목소리이지만 절도 있게 말이 나왔다.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래층 여자의 현관문이 열리고 배불뚝이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 25분이었다. 본능적으로 복도 그늘에서 아래쪽을 살폈다. 검은 반팔 후드를 입은 채로 남자에게 돌진했다. 


“저기요. 아저씨 여자를 그렇게 패면 어떡합니까?”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남자가 힐끗 내 쪽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넌 뭔데 남의 가정사에 감 나와라 배 나와라 하는 건데.” 남자가 오른손을 들어서 내 멱살을 잡았고 나도 그의 멱살을 동시에 잡았다. 난 상대가 잡아 준 것이 고마웠다. 남자의 힘이 내 멱살에 실리는 순간 난 그의 멱살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가슴팍 옷을 한 움큼 잡아서 그대로 던져버렸다. 


배불뚝이 남자는 그대로 14층 화단으로 떨어졌다. ‘쿵’하는 소리가 났다. 

‘악’하는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는 많이 놀랐나 보다. 내 귓가에 그냥 ‘흐윽’하는 소리를 남겼을 뿐이었다. 굳이 난간에 목을 쭉 빼고 내려다보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 녀석을 던지면서도 최대한 마치 스스로 떨어진듯이 난 자세를 낮추었다. 본능적으로 낮은 자세로 아파트 복도 바닥을 살폈다. 혹시 바닥에 뭔가 흘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피던 담배갑이나 라이터 혹은 동전도 단서가 될 수 있다. 거의 앉은채로 빠르게 바닥을 살피는 데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현관문이 열려 있고 아래층 여자가 원피스가 거의 다 찢어진 채로 서 있었다. 여자의 마스카라는 처마밑 고드름의 형상처럼 턱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난 여자와 한동안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내 머리는 순간 정지되어 훈련 때로 돌아갔다.


“제군들, 필요 없는 살상은 절대 하지 마. 하지만 목격자는 절대 살려두어서는 안 돼. 그건 타깃과 순위를 같이 한다. 알겠나? 복명복창한다.”  


여자는 어디서부터 본 것일까. 나는 여자를 아직 단 한 번도 죽여본 적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이 오므려졌다. 

남자에게 얻어맞고 유린당한 여자는 원피스가 사이사이 다 뜯겨서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어서 마치 걸레를 걸친 듯했다. 머리카락도 산발이었다.  


낮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때는 정숙한 여인이 갑자기 저녁에는 거지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너무 섹시하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내 목의 울대가 움직였다. 여자가 내 눈을 피하지도 않고 자신의 오른손을 밀어서 현관문을 더 넓게 열었다. 


그건 말로 하지 않는 초대였다. 잠깐 생각을 했지만 내 의사와는 다르게 내 발걸음은 여자 쪽으로 향했다. 여자의 머리 너머로 엎어진 상이 보였고, 깨진 소주병과 안주들이 거실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안방 침대는 사용도 하지 않은 듯이 깨끗했다. 나를 앉혀 둔 채로 여자가 샤워를 하고 나왔다. 까무잡잡한 그녀의 몸이 내 곁에 함께 누웠다. 여자의 입에서는 치약냄새와 소주냄새가 같이 났다. 모처럼 깊은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거실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손을 베인 듯 여자의 한쪽 손가락에 밴드가 감겨 있었다. 


여자는 테이블 위에 북엇국과 하얀 쌀밥을 해 놓았다. 눈을 쳐다보면서 같이 밥을 먹었다. 아니 정확히는 다 먹지는 못했다. 배가 고팠기에 서둘러 입속에 밥과 국을 마구 밀어 넣었지만 반도 다 먹지 못했다. 그럴 줄 우린 서로 알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밥과 국을 남긴 채로 우리는 장소를 옮겼다. 이번에는 내가 그녀를 양팔 그네에 태워서 옮겼다. 아직 우린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침대에서 나오면서 내가 물었다. 


“괜찮아요?”

“네, 고마워요.”


뭐가 고맙다는 것인지는 이해가 금방 되질 않았다. 나도 그녀도 1층의 상황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밤사이 엠블란스 소리와 경찰차 소리가 오고 가고 했지만 우린 할 일에 열중해 있었다. 가 보지 않은 산을 오르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다.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알았다. 여자의 목이 길고 하얗게 백양목처럼 길어지고 뒤로 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밤사이 몇 번이나 백양목을 보았다.


난 여자를 마지막으로 한번 힘껏 안아주고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 작별을 고했다. 


담배생각이 나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라이터와 담배는 제자리에 있었다. 1층 화단 근처에는 샛노란색의 접근금지라고 쓰인 테이프가 사각으로 둘러쳐 있었다. 


차량 사이 간격을 체크하고 있는 녹색 새마을 모자를 쓰고 있는 경비아저씨 옆에 섰다. 흡연구역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이지만 대충 담배를 피워도 용인되는 경계선상이었다. 

나를 힐끗 곁눈으로 보고는 묻지도 않은 답을 했다. 


“아이고, 말도 마. 어제 여기 누가 와서 자살을 한 것 같아.”


“자살요?”


“그래, 우리 아파트 사람도 아니더구먼.”


“어떻게 들어왔어요. 우리 아파트 사람도 아닌데.”


“몰라, 나도. 가끔씩 여기 지인이 있나 봐. 놀러 오곤 했는데.”


“경찰은 왜 자살이래요?”


“떨어진 사람이 엄청난 거구려. 가슴까지 오는 복도 난간을 어떻게 넘어와. 스스로 몸을 던지지 않으면.”


“아까 경찰이 와서 물어보길래 나도 잘 모른다고 했어. CCTV 복사해 갔으니 뭐 나중에 다시 수사 나오겠지. 뭐.”


경비아저씨의 목소리는 평생 직업군인으로 사셨던 경력만큼이나 카랑카랑했다. 아파트는 사방이 콘크리트 벽이라 소리가 마치 에코마이크처럼 울린다. 경비아저씨의 말이 크게 말하면 내 방에서도 들린다. 


위를 올려다보니 14층의 여자가 한 팔을 턱에 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람 곁에 휘날리는 여자의 머리카락은 마치 초원을 달리는 사자의 갈기 같이 용맹스럽게 보였다. 


그제야 난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났다.


문자를 보냈다.


‘김점백, 제거완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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