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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나다아재 Sep 25. 2024

쪽지

용기가 없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 


검사 결과를 보고 의사는 말 없이 잠시동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사실 수 있는 날이 길어야 1년, 정말 살도 빼시고 운동도 하시면서 항암치료를 잘 받으시고 하시면 조금 더 오래 사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병원을 나서면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제 겨우 막 사십대 후반인데 암이라니. 하나님,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원망이 마구마구 올라왔다. 


바람난 아내와 합의 이혼한지 5년이 되어 이제 좀 숨이 쉬어지고 주변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체중을 줄어야 합니다. 아침에 살살 좀 걸으세요. 지금 당뇨수치도 높고, 고혈압에 고지혈까지 환자분 몸은 지금 현재 종합병균선물세트 같은 몸이에요. 당장 입원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조금 웃어줄 만도 한데, 의사는 더 겁을 주었다.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러닝화를 사고 기능성 반바지에 땀 잘 배출해 준다는 티셔츠도 샀다. 

그렇게 동네 개천가를 걷기 시작했다. 


저녁에도 걸어 보고 낮에도 걸어 보고 시행착오를 몇 번 거쳤다. 새벽 6시가 딱 좋을 것 같았다. 아침의 동이 트는 앞 뒤의 적당한 시간대였다. 운동화 끈을 조이고 나가 첫날은 500미터 즈음 걷었다. 둘쨋 날은 1킬로 정도 걸었다. 그렇게 한달 두달 계속해서 나갔다. 


새벽공기는 정말 상쾌했다. 밤새 푹 자고 있어난 풀들이 내는 신선한 산소는 무더위에 누운 소도 벌떡 일으킬 것 같았다. 현상유지를 위한 몸부림이자 최소한의 운동이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10월의 중순이 되자,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쌀쌀해져 갔다. 여름에는 그렇게 많던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지 않고 습관처럼 운동하는 사람들만 남았다.  


한달 정도 지나고 나니 새벽 걷기에 몸은 조금씩 적응해 갔다. 늘 같은 시간대에 나와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눈에 익었다. 


특히, 검정색 기능성 티셔츠에 검정 반바지를 입은 늘씬하면서 키 큰 여자와는 자주 마주쳤다. 그녀는 항상 운동을 시작하기전에 약 10분 정도 긴 다리를 쭉쭉 펴가면서 스트레칭을 하고 ,조깅을 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건강해 보여서 항상 눈길이 가곤 했다. 


저렇게 바싹 마른 몸으로 무슨 운동을 해서 살을 더 빼려고 하는지 이해는 안됐지만 이마에 땀까지 뚝뚝 흘리면서 조깅을 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그렇게 걷기만 하다가 나는 무리를 해서 조금 뛰어 보았다. 숨이 이내 턱까지 차오르고 쓰러질 뻔한 고비를 몇 번을 참았다. 당연히 집에 도착하고 아침을 먹고는 TV를 보다가 그대로 소파에 뻗어서 잤다. 


다음날은 너무 피곤해서 쉬고 싶었지만 그래도 키 큰 여자의 얼굴도 한번 더 볼 겸해서 억지로 나갔다. 시계를 보았다. 새벽 6시. 아치형 다리를 지나면 거기에서 항상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터였다. 멀리서 여성의 얼굴이 보였다. 여성의 얼굴이 보이기 전까지는 터벅터벅 걷고 있었는데 어느듯 난 두 다리에 살짝 살짝 힘을 줘서 뛰고 있었다. 아, 이놈의 허세. 그건 허세였다. 


여자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서 마주했다. 여자는 개천방향으로 다리를 벌려서 한 다리씩 쭉 뻗어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상체는 구십도 돌려서 내가 다가가는 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덕분에 난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이마에는 검정 운동밴드가 둘려져 있었고 나이는 많아야 사십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였다. 


‘아니, 새벽부터 왠 화장.’


여자의 입술은 살짝 붉었고 눈가에는 아이쉐도우 같은 것이 옅게 칠해져 있었다. 어제 지우지 않고 잠을 잤거나 새벽에 운동을 나오면서 화장을 한 것 같았다. 


곰곰히 생각해 봐도 지난 몇 달동안 여자가 화장을 한 적은 없었다. 남자가 생긴 것인가, 일하는 사이사이 생각을 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긴 대화도 한번 해 본 적이 없는데 무슨 남이사 어떻게 살던 무슨 상관인가. 이혼하고 혼자 사는 나만 잘 살면 그만이다. 


누가 그랬었다. 하루가 가는 속도는 내 나이에 ‘살’자만 빼고 그 자리에 ‘키로미터’를 넣으면 나온다고. 스무살때는 하루가 시곳 20킬로미터로 간다더니 지금은 하루가 49킬로미터로 간다. 생각보다 시속 49키로는 빠른 속도다. 아침 먹고 디자인 작업 좀 하고 숨돌리고 나면 금방 점심시간이다. 점심먹고 나면 또 저녁시간이다. TV 좀 보다가 9시나 10시에 어김없이 잠이 들었다. 


다음날도 새벽 5시에 눈이 떴다. 밤 10시 즈음 잠을 자면 의사들의 권고하는 가장 깊은 렘수면을 할 수 있는 시간대가 들어가 있기에 7시간만 푹 자고도 개운하게 깰 수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자료도 좀 찾아보고 커피도 한잔 마시고 움직이다 보니 5시 50분이었다. 


반바지에 티셔츠 하나 핸드폰을 넣고 뛸 수 있는 탄성 좋은 허리밴드 그리고 무선이어폰이면 준비가 끝난다. 아직은 반바지를 입고 있어서 단목양말을 신고 운동화를 신으면 모든 준비는 끝이다. 


“오빠, 반바지 입고 운동할때는 중목양말 신지마, 완전 아재같아.”

단목양말은 미국에서 잠깐 들어온 여동생의 칼 같은 잔소리를 듣고 바꾼 양말이었다. 난 귀가 얇은 편이다. 내 주관도 별로 없다. 키만 멀대마냥 크고 몸무게만 조금씩 빠져서 점점 더 환자처럼 보이고 있었다. 


이혼하고 바로 운동 좀 시작할 걸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살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냥 이혼한 여편네 동정이나 살피면서 허송세월을 지내온 느낌이었다. 5년만 젊었어도 지금처럼 시한부 인생만 아니었어도 대쉬한번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화장을 하고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여자는 노골적으로 내 눈을 응시했다. 

조깅을 하다가 마주치면 절대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가 눈이 마주치면 눈과 고개를 살짝 다시 길쪽을 향해서 본다. 


“야, 그거 너한테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저녁 술자리에서 부랄친구 태손이가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자기의 주장을 내 귓속에 쳐 넣으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거긴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각 테이블마다 있어서 다들 남의 테이블 이야기는 관심이 없다. 이래 죽어도 그만 저래죽어도 그만인 식의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그것이 마치 엔꼬가 난 차에 부어진 기름같은 역할을 했다. 나도 감정의 기름,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마치 꿀처럼 썼다. 세상에는 달달한 약도 있지만 쓴 꿀도 있는 법이다. 의사 선생님의 불호령이 어디선가 느껴졌다.  


그날 이후부터 난 그녀를 조금씩 뜯어보기 시작했다. 키는 크다. 물론 나보다는 작지만. 체형은 늘씬하다. 다리가 하도 길어서 엉덩이가 내 배 정도 넘어가는 듯 하다. 운동화부터 머리밴드까지 전체가 검정색이다. 누가 죽었나. 왜 다 검정이야. 운동복은 그것 하고 하늘색 운동복이 있다. 나는 하늘색을 입었을때가 더 예쁘게 보였다. 일요일에는 운동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나도 일요일은 조깅을 나가지 않았다. 물론 6일중에 거의 매일 그녀를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렇게 또 2년이 흘렀다. 의사가 시한부 인생을 말한 것이 2년전인데 아직 난 살아있다. 그것만으로 감격이었다. 


그녀는 점점 더 말라갔다. 몸매는 늘씬하다 못해 깡 말랐다. 조깅을 하다보면 어느정도 뛰고 나면 일단 조금 숨을 고르기 위해서 걷는다. 그러다가 다시 휴식이 좀 되어 팔과 다리에 에너지가 차면 다시 뛰기 시작한다. 우린 그런식으로 자주 마주쳤다. 어쩔때는 그녀가 뛰고 있고 내가 걷다가 마주치기도 하고 어쩔때는 그녀가 걷고 내가 뛰다가 마주치기도 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말은 한번 걸어 봐. 너 그러다가 죽는 순간에 후회한다.”

친구의 말은 가끔 교과서보다 백배 낫다. 


늦은 저녁 혼자 밥을 먹다가 문득 그녀와 말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아침에 화장을 하고 나타나는지 등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녀의 하늘색 츄리닝이 검정색 보다 더 예쁘다고 말도 해 주고 싶었다. 내가 그녀와 사귄다거나 거창한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원하는 것은 그냥 한번 대화를 해 보는 것이었다. 긴장할 것도 부산을 떨 일도 아니다. 


그래서 작은 쪽지와 꽃 한송이를 준비했다. 다음날 어김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집 안에서 부산히 움직이다가 시간 맞춰 하천가로 운동을 나갔다. 내 손에는 꽃 한송이가 들려 있었고, 호주머니에는 간단한 쪽지가 있었다. 


뭐, 이제 얼마남지 않은 인생의 끝에서 새로운 여자를 사귀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의 생각은 그냥 외로운 내 삶에서 누군가와는 대화다운 대화, 말다운 말을 나누고 싶었다. 운동을 해서 그런지 내 정기검진 결과는 점점 좋아졌다. '한 3년은 더 사시겠는데요'라고 의사는 말했다. 하지만 수술을 할 수 없는 부위에 자리잡은 암의 뿌리는 캘 수가 없었다. 다만 이유는 모르지만 암이 더 이상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만 말했다. 


“모릅니다. 갑자기 커지면 3개월이 될지 아니면 다음주가 될 수도 있어요.”

항상 마지막에 겁주는 것을 잊지 않는 의사는 권투경기중에 자신의 선수가 라운드 중간에 사각 코너로 돌아오면 의자와 양동이를 놓고 최대한 빠른시간에 회복과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하는 권투 경기의 코치나 세컨 같았다. 


몸 안에 살아있는 암을 지니고 다니는 것은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을 넣고 다니는 것과 같다. ‘째깍째깍’ 내 남은 생명시간을 갉아먹고 있는 종양은 다 타 버리고 남아서 본래의 형태가 뭉그러진 양초 위에 남은 촛불 심지 같은 거였다. 더구나 지금 나처럼 회복불가 판정을 받으면 말이다.  


그나마 감사한 것은 항암치료를 받으면 남들은 그렇게 아프다고 하던데, 아직 나는 버틸만 하고 참을만 했다.


조금 더 뛰면 아치형 다리가 나오고 그 다리 아래에서 여자가 몸을 풀 장소였다. 슬슬 뛰기 시작했다. 맞은 편에 여자가 보이는데 내 쪽으로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여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서 여자의 팔을 부축하듯이 하는 남자가 보여서 나는 얼른 장미 한 송이를 등 뒤로 숨겼다. 혹시나 여자가 내쪽을 볼까해서 여자의 얼굴을 봤지만 여자는 핸드폰을 켜서 보고 있느라 다행히 내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웃으면서 옆에 서 있는 남자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여자의 치아가 아주 하얗고 투명하다는 것과 미소띈 얼굴이 정말 예쁘다는 사실을. 


곡선 구간에서 상대 여자와 남자가 보이지 않는 사실을 인지한 나는 꽃을 빼서 하천쪽으로 던져버렸다. 그날은 그렇게 끝났다. 


그날 이후로 나의 새벽 조깅도 힘을 잃었다. 새벽을 버텨주고 지난 1년간 나를 지탱하던 꼿꼿한 지팡이 같던 의지는 어느 순간 물을 먹어 썩은 나무토막처럼 좀먹어 갔다. 


여름 더위가 한참이라는 것을 핑계로 한달을 쉬었다. 9월 초입이 되자 몸이 근질근질하기도 했고, 다시 몸무게가 올라간다는 것을 굳이 체중계에 몸을 달아보지 않아도 느끼게 된 나는 운동을 나섰다. 


내가 뛰는 개천가의 토끼굴 입구에서 여자가 있는 곳 까지 거리는 대략 500미터 정도 된다. 조금 걷다가 이내 난 뛰기 시작했다. 손목시계를 보니 6시다. 여자가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터였다. 

다리아래를 빠른 뜀으로 지나면서 오른쪽을 보았다. 어라, 왠일로 여자가 보이질 않았다. 내가 뛰는 방향과 여자가 뛰는 방향은 정 반대 방향이라 보이지 않는 것은 오늘 나오지 않았거나 내가 도착하기전에 이미 뛰었다는 뜻이다.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전에도 한 두번 있던 상황이라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그 날이 이후로 여자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의 몸은 조금씩 더 나빠졌다. 


“길어야 6개월입니다. 지난 3년간 정말 기적적으로 잘 버텨 왔습니다. 이제 정말 길어야 6개월입니다.. 운동도 이제 절대 무리하시면 안됩니다. 절대 뛰지 마시고 그냥 걸으세요. 천천히요.”


저번 정기검진을 갔을 때 의사는 강력하게 말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세상과의 조우도. 

마지막으로 그 여자의 얼굴은 한번 더 보고 싶었다. 


새벽 6시. 아치형 다리 아래를 향해서 천천히 걸었다. 

이제 500미터조차 걷는 것이 숨이 찼다. 

여자가 늘 스트레칭 하던 장소에서 혹시나 하고 두리번 거렸으나 여자는 나오지 않았다. 


잠시 다리 아래 벤치에 앉아서 쉬기로 했다.

그때였다. 어떤 남자가 다가왔다. 


“저 혹시...”


남자는 핸드폰을 켜더니 사진을 보고 나에게 보여준다. 어라. 그건 내 모습이었다. 

내 눈이 나도 모르게 커졌다. 나는 퍼뜩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게 무슨....


“저 여기...”

남자가 나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뭔가요?” 나는 여전히 의아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누나가 시한부 암이었어요. 의사가 1년도 못 산다고 했는데 3년을 살았다고 기적이라고 했어요. 누나가 건강했으면 여기 선생님 같은 분하고 데이트도 하려고 했는데 너무 아쉽다고 자기 죽으면 이 편지를 꼭 선생님께 전달해 달라고 했어요. 덕분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받았다고 꼭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남자는 정중하면서도 차분히 말했다. 


“그런데 혹시 누구시죠? 관계가?” 나는 남자의 누나가 시한부로 생을 달리 했다는 말보다도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아 저는 남동생입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알아보셨을까요?” 내 의심은 끝나지 않았다.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렸다. 거기엔 지난 달에 남자와 있던 여자를 지켜보던 내 모습이 찍혀 있었다. 약간은 놀란 듯한 모습의 내가 조깅복을 입고 거기에 박제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탁’하고 내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건 아쉬움이었다. 


돌아서서 집으로 향하는 내내 갑작스런 비가 쏟아졌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에 나는 도무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끝.




[에필로그]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지난 3년간 새벽 조깅에 항상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제가 몸만 이렇지 않았어도 먼저 대시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늘 건강한 모습으로 조깅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그 에너지를 빌려 저도 투병 생활중에 건강히 지내왔던 것 같아서 고마운 마음에 짧은 인사를 드립니다. 부디 이 좋은 세상 늘 건강하게 잘 사세요. 


효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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