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불능
“원발암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좌측 골반뼈와 우측 대퇴부에서 발견된 종양이 전부입니다. "
마치 남편이 곧 죽을 것처럼 말하던 담당의는 PET CT 결과가 나오자 완전히 태도를 바꾸었다. 물론 그는 본인이 뱉은 한마디에 내가 어떤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추호도 관심이 없다. 이제 남편은 신경과 소관이 아니니 정형외과로 전원을 준비하라고 한다. 내 착각이었을까? 그는 마치 원발암이 없어서 실망한 것 같았다.
"뼈에 위치한 암이니 골육종일 가능성이 크지만 정확한 건 조직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열어서 꺼낼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 세침술을 시도해 보겠지만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는 이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주치의를 찾았다. 말만 주치의지 암 진단이 난 이후로는 병실에 코빼기 한번 내비치지 않는 그였다. 내가 영 반갑지 않은 눈치였다. 재차 따져 묻는 내게 그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혈액암일 가능성도 있고요.. 정말 애매해서 그래요.. “
의사들이 하는 말은 일관성이 없었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세상 의욕 없어 보이던 담당의는 남편 몸에서 암세포를 발견하고서야 처음 눈을 빛냈다. 그는 그렇게 전에 없이 눈을 반짝이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암을 다 언급했고, 그렇게 조심성 없이 내뱉어진 말들에 나는 매일 공포에 떨어야 했다. 정말 남편이 떠나버릴까 봐 너무 겁이 났다.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뜬눈으로 며칠밤을 지새웠다.
뇌나 주요 장기에서 암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그가 그토록 확신하던 원발암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을 때, 나는 먼저 안도감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고 곧 담당의를 쏘아보며 눈으로 할 수 있는 온갖 욕을 다 퍼부었다.
사람 마음이 그렇게 간사하다. 간절하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어놓고도 감사함은커녕 잠시 스쳐가는 안도감의 몇 곱절의 크기로 분노와 원망이 표출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임을 알고 있다. 그 당시 나에겐 원망할 대상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 아닐까? 잠깐동안이었지만 분노의 감정이 예고 없이 들이닥친 비극을 버텨내는 원동력이 되어준 것도 사실이다.
여전히 분노에 휩싸인 채로 나는 밝혀진 사실만 따져보기로 했다.
'담당의는 남편의 몸에서 발견된 종양의 위치만 보고 원발암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지. 마치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처럼 말했어. 하지만 원발암 같은 건 애초에 없었고, 저들은 남편이 아픈 원인을 아직도 찾지 못했어.'
한국에서 가장 저명한 병원 중 한 곳에서 내로라하는 의사들조차 남편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검사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 상황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없을지언정 그들의 말에 휘둘릴 이유 또한 없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성급하게 내뱉는 어떤 말도 믿지 않기로 했다.
이제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만약 내가 암이라면 어떤 식으로 이 소식을 듣고 싶을지 차분히 생각해 봤다. 나라면 다른 사람이 아닌 남편의 입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가감 없이 전해 듣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하는 남편이 크게 좌절하는 모습이 아닌 덤덤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겨낼 수 있다고 믿고, 묵묵히 옆에서 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병실로 들어갔다. 나는 가만히 남편의 손을 잡고 덤덤하게 그가 암임을 알렸다. 핸드폰으로 찍어 둔 그의 PET CT 사진을 열어 그의 몸에 자리 잡고 있는 3개의 검은 덩어리들을 보여주었다. 뼈에 붙은 암이라 골육종이나 혈액암일 가능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의사들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추가 검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눈물이 유난히 헤픈 나지만 다행히 눈물은 눈치를 챙겨주었고 차분하게 얘기를 마칠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조금이라도 좌절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나는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을 했을 것이다. 남편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알겠다고 말하고 이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다음날 정형외과 교수가 병실에 들렸다. 우리 부부는 듣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작은 체구에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나타난 그는 골육종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세침술 결과가 나와봐야 안다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말을 던지듯이 내뱉고는 역시 차트를 뒤지며 바쁜 걸음으로 병실을 빠져나갔다.
검사결과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피가 마른다는 느낌을 실감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검사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어차피 바꿀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잡아 먹히지 않으려고 나는 수도 없이 이 말을 되뇌었다. 내 안에서 우선 할 수 있는 것 들에만 집중하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