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우선순위
“암입니다. PET CT를 찍어보도록 하죠. 위치를 봐서는... “
남편의 하반신을 촬영한 MRI 영상에 시커면 덩어리들이 보였다. 담당의가 내비친 말 줄임표는 나를 극도의 불안으로 몰고 갔다.
“지금 예상하시는 게 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원발암이 있을 겁니다.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뇌종양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저희 남편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
지긋한 나이의 담당의는 언제나처럼 기계적인 말투로 남편이 죽을 수도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잠시 얼어붙었다가 이내 그의 옷깃을 붙들고 오열하고 말았다.
"그건 안 돼요 선생님... 그럴 리가 없어요... "
그를 교수님이라 칭하며 둘러싸고 있던 있던 무리 중 유독 인간적으로 느껴졌던 한 여의사가 눈시울을 붉히는 것이 보였다. 얼마간을 울었을까… 나는 담당의를 붙들고 애원하듯 물었다.
“그런데요 선생님, 저 MRI 영상에서 골반뼈와 대퇴부에 종양이 보인다는 거, 밝혀지건 그거 말곤 없는 거잖아요? 아직 정확히 모르시는 거죠? 그렇죠? “
“암세포가 자리한 위치를 보았을 때 원발암이 있을 겁니다.”
그의 확신에 찬 어조에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본인의 환자에게 큰 불행이 닥쳤다는 사실에 그는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의 분노를 감지했는지 눈이 빨갛게 충혈된 여의사가 다가와 가만히 내 어깨를 잡았다.
“잘 드시는 거 많이 챙겨주세요.. 뭐든...”
그 말을 뒤로하고 그들은 차트를 뒤적이며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지? 혹시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어느새 정이 들어버린 수간호사 선생님이 다가와 내 등을 쓰다듬어주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나는 현실감을 잃고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아직 뭐가 뭔 지 모르겠다. 정신이 없었다.
세수를 하고 병실에 들어가 아무렇지 않은 척 남편 옆에 누웠다. 여느 때처럼 우리는 좁은 병상에 함께 누워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한편 보았다.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남편 옆에서 겨우 눈물을 참으며 병동에 불이 꺼지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병동에서는 밤 8시만 되면 잘 준비를 한다. 환자는 밤 새 고통에 시달리다 새벽녘에나 겨우 잠이 들지만 병원의 하루는 이에 개의치 않고 매우 일찍 시작되기 때문이다. 남편이 잠든 후 나는 아무도 없는 병동 휴게실을 찾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남편이 뭘 잘못했다고 암에 걸렸단 말인가? 나는 뭘 그렇게 잘못 살았기에 내게 소중한 것들을 계속 앗아가려는 것인가? 이 불운의 끝은 어디인 거지?
도대체 왜 우리에게 잇따른 불행이 찾아오는 건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시선에 담기는 모든 것이 원망스럽다는 듯 눈앞이 다시 뿌예졌다.
남편은 소방관이다. 성실하고 무료함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그는 일부러 사건사고가 많은 소방서를 골라 다니며 바쁘게 일했다. 우리는 10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프리랜서 생활을 고집하던 나는 결혼 후 안정적인 소득을 원하는 남편의 설득으로 결국 회사에 들어갔다. 남편의 주도로 우리는 착실히 돈을 모았다. 작은 빌라에서 전세로 시작한 지 4년 만에 우리는 내 직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아파트를 소위 영끌로 구입했고, 아파트값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두배로 뛰었다. 어둑한 동네의 좁은 빌라에서 주변에 온갖 편의시설이 모여 있는 번듯한 아파트로 이사하니 우리의 삶은 훨씬 풍요롭고 여유로워졌다. 더 좋은 물건을 쓰고 더 좋은 음식을 먹었다. 장난꾸러기들에게도 해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나는 늘 일에 치여 살았고, 가진 가진들에 대해 감사하거나 인생을 즐길 마음의 여유 따위 갖지 못했었다.
남편이 무려 암에 걸리고 나서야 그간 놓치고 있던 행복이 보인다.
일을 할 때의 나는 늘 업무의 우선순위를 매긴다. 중요하고 시급한 일에만 에너지를 쏟고 덜 중요한 일은 과감하게 놓아버리거나 뒤로 미루기 위해서다. 이 원칙은 프리랜서로만 전전하던 내가 큰 조직에서 살아남고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내 삶의 우선순위는 완전히 잘못 선정하고 있었다. 진정 내게 행복을 주는 것들은 언제나 나중으로 미루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간의 삶을 돌이켜보니 마치 내 잘못된 생각과 선택들로 인해 연속된 불운이 시작되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 불운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날 내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결론은 없었다. 다만 절대 손 놓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며 온 힘을 다해 저항하겠다고 결심했을 뿐이다.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은 불운을 몰고 왔을지 모를 잘못된 생각의 고리를 끊고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잡는 것이다. 담당의를 만나고 차갑게 식어버렸던 가슴이 다시 뜨겁게 달궈지는 것 같았다.
남편이 암이다. 게다가 그는 움직이지 못한다.
내가 강해져서 이 시기를 버텨야 한다. 남편 몫까지 해야 한다.
나는 병동 휴게실에서 뜬눈으로 지새운 이날 밤을 내 인생의 전환점으로 기억한다. 악에 받쳐서 어디 한번 해보자고 다짐한 것에 불과했지만, 내 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투지가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내 삶에 대한 태도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