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무게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입원 환자는 물론 보호자의 외출도 통제되고 있었다. 방문객의 면회도 금지되었으며 집이라도 다녀오려면 다시 PCR 검사를 받고 결과가 나온 뒤에나 병실에 들어올 수 있었다. 처음 입원했을 때 우리는 숨 가쁘게 달려온 인생에 잠시 쉼표를 찍는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긴 시간 병원에 갇히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남편이 배정받은 신경과 병동의 병실에는 우리를 포함한 6명의 환자와 그들의 보호자가 생활하고 있었다. 6개의 병상은 커튼으로 분리되지만 좁은 공간이 주는 갑갑함, 세상과 단절되어 버린 것 같은 고립감이 싫어 평소에는 커튼을 열어 두고 지내게 된다. 자연스럽게 저마다의 사정을 알게 되고 서로를 짠해하며 전우애가 싹튼다. 비좁은 병실에서 그나마 공간을 여유롭게 쓸 수 있고 채광이 드는 창가 자리는 장기 입원환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우리도 처음에는 화장실 옆의 구석자리를 배정받았었지만,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환자가 퇴원을 하면서 그 자리로 옮겨 갈 수 있었다. 짐을 올려 둘 공간이 생기고 햇볕이라도 드니 훨씬 나았다.
오랜 입원기간 동안 다양한 환자들이 이 병실을 거쳐갔다. 대부분 신경학적인 희귀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배정되었는데 모두 가지고 있는 병이나 증상이 달랐다. 길랑바레 증후군, 모야모야병, 감마글로불린병.. 입원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병명들이었다.
그러던 중 한 어린 환자가 그의 엄마와 함께 우리가 처음 썼던 화장실 옆 병상을 배정받고 들어왔다. 2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앳된 얼굴의 그는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원인 모를 통증에 늘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유독 이 환자에게 마음이 갔더랬다. 정확한 병명조차 모르고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항상 씩씩해 보였다. 과일이나 간식을 나눠 주고, 공용 세면대를 깨끗하게 닦아 놓는 그의 어머니도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어느 날 그 어린 환자와 어머니의 절규를 듣고 나는 어쩌면 남편이 암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보다 더 큰 충격과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한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날 그는 통증이 극도로 심해져 잠을 이루지 못했고 언제나처럼 꾹꾹 참아보려 해도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달려와 진통제를 투여하고 환자를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끝날 줄 모르는 신음소리와 흐느낌이 이어졌다. 그 환자는 마치 수십 개의 칼이 온몸을 헤집는 것 같다며 울부짖었다. 제발 본인을 좀 살려 달라고 엄마를, 간호사를 붙들고 밤새 애원했다.
나는 종교가 없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제발 그가 통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저렇게까지 가혹할 수는 없는 거라며 신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사실 나는 남편이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무려 암환자라는 점에 매몰되어 다른 환자들의 병을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못했었다. 다른 환자들이 고통을 호소할 때면 마음이 쓰이다가도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할 형편이냐고 자문하고는 이내 시선을 거뒀다.
그러나 왜 하필 남편에게, 왜 유독 나의 남편에게만 이토록 큰 시련이 닥치는가에 대한 억울함은 내 그릇된 피해의식일 뿐이었다. 드러나 보이지 않더라도 모두 저마다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었다. 타인이 가진 고통의 무게는 내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가 가진 고통의 크기를 비교한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며 불순할 뿐이다.
남편이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진통제를 맞고 겨우 잠들고 나면 나는 불 꺼진 휴게실에 멍하니 앉아 눈물을 훔치곤 했다. 남편이 암이라니, 아무리 마음을 독하게 먹어도 여전히 겁이 났다. 고통에 시달리는 남편을 보면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나 자신이 한없이 나약하게 느껴졌다.
남편을 위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감정이 추스러지면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아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면 좋을지 생각을 했다. 매일같이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무척이나 생소한 경험이었다. 뭐가 그리 바빴는지 늘 시간이 부족했고 잠이 부족했다. 한적하게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여유는 일 년에 한두 번 휴가를 떠날 때나 부릴 수 있는 사치 같았다. 그렇게 매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생각들이 차분하게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았다. 병원 근처 작은 도서관에서 마음에 위안이 될 만한 책을 빌려다 남편과 함께 보기 시작했다. 암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고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으며 희망의 불씨를 살리려 애썼다. 의학지식은 전무했지만 남편의 상태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골육종, 혈액암 환자들의 연구 케이스들을 읽다 보니 남편과 상당히 비슷한 증상을 보인 환자에 대한 논문도 찾을 수 있었다. 그 환자의 경우 희귀 암이었지만 예후는 좋았다. 물론 내가 읽은 논문의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읽기를 거듭할수록 남편의 예후가 좋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통제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자.'
나는 내 안의 소리를 따라 계속 움직였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는 대신 책을 읽고 남편의 증상에 대해 공부했고, 세상을 원망하며 온갖 저주를 퍼붓는 대신 조용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 시간들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