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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순 Dec 14. 2023

연명 vs 완화

공포를 넘어 죽음을 껴안는 사회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여러 단어들이 이야기되는데, 지금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연명의료와 완화의료인 것 같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연명의료의 현장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고 있고, 한편에서는 이런 죽음이 우리 삶의 마지막 풍경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나오고 있다. 

가장 많은 문제제기가 나오는 집단은 아마도 의사들을 비롯한 의료인들이 아닌가 싶다. 죽음의 현장에서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등 연명의료를 실행하는 주체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의료계 전체에 비한다면 소수겠지만, 현장 속에서 생기는 문제의식들이 생생하게 전해지곤 한다.  

영국을 ‘죽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시슬리 손더스도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동안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 죽음을 맞는 수많은 환자들을 보아왔다. 그리고 죽어가는 이들을 조금 더 잘 보살필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며, 새로운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장을 열었다. 

우리보다 왕진의료가 훨씬 발달된 일본의 경우, 노인들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며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듣고 고통에 일그러진 노인들의 얼굴을 숱하게 봐왔던 의사들이 ‘다른’ 의료와 돌봄을 꿈꾸며 재택의(왕진의사)의 길을 걷는 경우도 많다. 

우리 사회에서도 여러 사건과 논란을 겪으며, 2018년부터는 연명의료를 거부하는 의사를 미리 밝힐 수 있게 되었다. 법 시행 약 5년 후인 지난 10월까지 200만 명 넘는 사람들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임종이 닥쳤을 때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힌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실제 의료기관에서 연명의료 중단 등을 결정한 경우도 30만 건에 달한다고 한다. 임종의 순간을 늦추기 위해 의료기기에 매달려 있다가 삶을 마감하는 것이 유일하거나 최선의 길은 아님을 우리 사회도 서서히 인정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물론 의향서를 작성했다고 해서 존엄한 죽음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고, 이 법 역시 여러 문제들을 안고 있다. 그래서 『죽음을 배우는 시간』의 저자이자 의사인 김현아 씨는 연명의료를 거부하고 고통 없는 죽음을 맞이할 권리는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살다 죽을 권리와 그 뿌리가 닿아 있다고 말한다. 왕진제도나 가정형 호스피스 등을 포함한 법과 제도들은 우리들의 좋은 죽음을 위해 앞으로 따로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주제로 남겨둔다.  

김현아 씨는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작별할 수도 있던 아버지를, 의식도 없이 억지로 육체만 세상에 붙들어놓았다 보내고 난 후에야 연명이, ‘의학적 의미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연명의료, 더 나아가 병원에서의 죽음에 대해 반대론자가 된 것 같다.  

‘어떻게 되겠지’만으로 좋은 삶을 살기가 힘들 듯 ‘어떻게 되겠지’만으론 좋은 죽음 역시 힘들다. 그런데,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문화는 ‘공포’와 ‘회피’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공포는 수많은 위험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생존능력이다. 그러나 피할 수 있는 위험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끝까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삶을 정리하고 완성하며 맞이하는 죽음은 불가능하다. 

아직까지 일반적인 죽음의 풍경인 연명의료의 현장이나 조금은 갑작스러운 듯한 안락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밑바닥에도 어쩌면 죽음에 대한 지나친 공포나 회피가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렇다면 그 공포의 실제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막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 산모와 아이의 고통이 필수이듯 죽음의 과정에서도 각자가 겪어야 할 아픔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가족과 사회가 감당해야 할 몫도 있을 것이다. 따뜻한 죽음의 문화가 뿌리내린 영국의 경우 등을 보면, 사회가 한 개인의 죽음의 과정을 진심으로 함께 할 때 그 개인은 공포에 잠식당하지 않고 조금 더 삶과 죽음의 주체로 살다 갈 수 있는 것 같다. 한 사람이 의미 있고 평온하게 삶을 완성하고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교육이, 의료가, 돌봄이 어떠해야 할지 바닥부터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절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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