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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석 Jul 24. 2020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 고대 그리스 철학

밀레토스 학파, 피타고라스, 헤라클레토이스, 파니메니데스, 엠페도클레이스

이런 그리스의 배경 상황에서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가 나타나요. 근데 탈레스는 그 시대 관점으로 봤을 때 철학자라기보다는 천문학자나 과학자 같은 행동을 많이 했어요. 우리가 탈레스 하면 떠오르는 세 가지 일화가 있어요. 첫째는 일식 월식을 계산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두 번째는 하늘을 보고 길을 걷다가 우물에 빠졌다가 길을 가던 아낙 내가 ‘어휴 똑똑하다더니 앞가림도 잘 못하네’라는 소리를 듣고 화나 가서 천문의 움직임을 본 후, 이번 해는 올리브가 풍년이겠구나 예측을 해서 투자를 잘하고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자신을 놀렸던 사람에게 통쾌하게 복수를 했다. 마지막으로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했다. 전자 두 개는 다 천문적 지식에 관련된 거죠. 하지만 천문학자가 아닌 철학자라 불리는 이유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라는 말 때문이에요. 세계의 규칙과 시작에 대해 어떤 신성한 힘이나 전능한 권능에 빗대어 해설한 게 아닌 실제로 보고 느끼는 물질이나 법칙에 의해 이 세계를 탐구하고 규정하려 한 최초의 시도였기에 철학적으로 높게 평가를 받은 거예요. 



밀레토스에서 탈레스처럼 만물의 근원을 탐구적으로 바라봤던 사람들끼리 무리를 하나 만들어요, 탈레스를 수장으로 해서, 밀레토스의 똑 독한 사람들의 모임을 가지는데 그것을 밀레토스 학파라고 부릅니다. 그 안에서 중요한 사람이 세 명 있어요. 수장인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데스입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가 말한 만물은 물이다는 걸 반박해요. 반박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탈레스의 말이 신앙 교의 같은 절대적인 규율이 아녔다는 데 의미가 있죠. 저 사람은 이렇게 찾아봤는데 내가 찾아보니 아니더라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던 거죠. 아낙시만드로스는 일단 만물의 근원이 물은 아닐 거라고 얘기해요. 우리가 아는 물질이 만물의 근원이면 그 물질이 엄청 쌔서 모든 걸 다 집어삼킬 것이니까요. 그래서 물이 세계의 근원이면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 다 물로 되어 있어야 하죠. 근데 그렇지 않으니 물은 아닐 것이에요. 만물의 근원은 우리가 아는 물질이 아닌 그 무언가, 즉 제일 실체인 아르케이다 라고 얘기해요. 이 주장을 아페이론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물질들이 조화롭게 균형을 유지시키는 다른 물질이 있을 것이다라는 거예요. 모든 것이 다 불타서 불바다가 되지 않고, 물이 넘쳐서 다 물바다가 되지 않게 하고, 땅만 너무 있어서 우리가 말라죽지 않게 정량을 유지하게 하는 물질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바로 아르케, 제일 실체라는 거죠. 이것이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입니다.



아낙시메데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 이론을 급진적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낙시메데스는 우리가 안 보이는 물질을 가지고 근원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는 제일 실제가 공기라고 했어요. 아낙시메데스는 모든 물질을 밀도와 뜨거움으로 해 보자고 했어요. 밀집해 있느냐 퍼져 있느냐 차갑냐 뜨겁냐로 구분을 해서 보자고요. 가장 밀집돼있지 않는 물질이 뭐냐? 공기다. 공기가 밀집하면 무엇이 되느냐, 수증기이다. 수증기는 물이 되고 물은 진흙이 되고 진흙은 흙이 되고 돌이 되고 넘어가서 뜨거워지면 불이 되고 차가워지면 얼음이 되고 뭐 계속 이런 식으로 만물을 읽을 수 있다고요. 이렇게 밀레토스 학파가 했던 제일 실체에 대한 논증은 그리스 철학의 시작을 알렸어요. 이렇게 시작한 근원 논증은 그리스 철학 끝까지 이어지는 주 요소가 됩니다.



밀레토스 학파처럼 물질에 의해서 세계를 설명하려 한 사람이 있는 한편, 피타고라스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피타고라스 하면 잘 아시죠? 피타고라스의 법칙. 삼각형 법칙 만든 사람이요. 그래서 피타고라스 하면 우리가 흔히들 과학자나 수학자를 생각하는데, 이건 또 약간 또 달라요. 피타고라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과학자는 아니었어요. 피타고라스는 오컬트 신비주의에 종교적인 기기괴괴한 새계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의 모임, 숫자 숭배자들의 원조격인 사람이에요. 피타고라스는 수비학이란 걸 이야기했어요. 수비학이란 우리 만물은 숫자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이에요. 그래서 노래도 숫자로 표현하려고 했고 우주의 해성 위성들도 숫자로 매겨서 설명하려 했어요. 근데 그 숫자가 정수만 의미해요. 아테네는 모든 사람이 정치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아네테에서 사람은 그리스인 귀족 남자 성인만 사람 취급을 해서 모든 사람이 정치 행위를 할 수 있다 라는 거잖아요? 피타고라스가 몰랐는지 아니면 무시했는지 몰라도, 숫자는 오롯이 정수뿐이고 정수만 진짜 숫자라고 한 거예요. 그리고 그런 정수가 만물을 형성하고 있다는 거고요. 이것도 일화가 있어요. 피타고라스의 제자가 정수와 정수 사이의 소수를 발견하니까 피타고라스가 어딜 감히 신성한 정수를 모독해하면서 절벽에 밀어 죽여버렸다 그래요.



피타고라스는 지적 관조가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했어요. 지적 관조가 어떤 것이기에 가장 고귀하냐에 대해 설명하면서 극장의 비유를 듭니다. 극장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이 누구냐. 연극을 하는 사람? 뒤에서 정리를 하는 사람? 연극을 주최한 감독? 극장 주인? 연극으로 돈을 버는 사람? 극장에서 가장 귀한 사람은 연극을 가만히 지켜보는 관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가장 귀하고 고귀하고 고고한 사람은 이 세계를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히 관조하고 지켜보는 우리 귀족들, 귀족들 중에서도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연구하고 탐구하는 -즉 이 세계는 숫자로 되어 있으니까- 숫자를 탐구하는 우리 같은 수학자들이 가장 고귀하다고 이야기를 해요. 이걸 지적 관조라고 하는데, 지적 관조를 하면서 탐구해나가는 기쁨이 가장 좋은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이런 식으로 지식적인 것에 대한 귀족적인 찬미 숭배의 모습이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면 꼴불견일 수 있는데, 러셀 아저씨는 결국엔 이러한 테도 덕분에 순수 수학이나 순수 과학이 발전할 여지가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러셀 옹은 그 예시로 원뿔에 대한 일화를 하나 들어요. 한 학자가 원뿔을 가르쳤데요. 근데 제자가 이렇게 말했데요. ‘원뿔은 아무 쓸모도 없는 것 같은데 원뿔을 왜 배워야 하죠?’ 그러니까 스승이 이렇게 말했데요. ‘그럼 너는 가서 농사나 배워라 농사하면 밥도 나오고 팔아서 돈도 벌 수 있으니까. 아니면 아예 돈을 받아 가라.’ 이렇게 망신을 줬데요. 실제로 그 시대 때 원뿔 계산은 하등 쓸모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한몇 세기 지나고 대포가 발명 됐거든요. 원뿔 계산하는 공식으로 대포의 포물선을 계산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때 그 시절에 피타고라스처럼 순수 수학, 순수 과학에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 중세인들은 포탄을 제대로 날리지 못했겠죠. 



 자 이때 넘어가서 다음 철학자는 헤라클레토이스에요. 버트런드 러셀이 말하길 헤라클레토이스는 불 같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헤라클레토이스는 비평글을 많이 썼거든요. 주로 비평을 하던 대상은 피타고라스나 바쿠스교의 윤회설이었어요. 윤회설 같은 신학적 지식이란 건 증명할 게 없으니까 절대적으로 옳을 수가 없는 지식들인데, 저들은 뭐를 믿고 그렇게 확신하느냐 이렇게 비판하죠. 개가 낑낑 우니까 피타고라스는 거기에 자기 친구 영혼이 들어갔다고 자기도 운다더라는 풍자도 아끼지 않으면서요.



이 사람도 그냥 악플러는 아니고 철학자이니 만큼 주관적인 철학이 있어요.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근원, 태초 원소가 불이라고 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활활 타는 불이라기 보단 불이 계속 변화하고 올라가는 모습을 태초 원소라고 했죠. 불같은 상태가 제일 좋다고 말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헤라클레토이스는 이 불의 상태를 윤리학에도 끌어들였어요. 영혼이 물에 가까우면 비천하고 영혼이 불에 가까우면 고귀하다고 했죠. 쾌락을 느끼다 보면 영혼이 점점 축축해지고 지혜롭고 선하면 영혼이 마른다고요. 또한 불처럼 변화하는 모습에 대해 강조를 해요. 그래서 흐르는 강에선 같은 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명언도 남기고, 통합보다는 대립이 더 좋고 평화보단 전쟁이 더 좋다는 악언을 남기기도 합니다.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나니까 투쟁이 더 좋다는 거죠.



이렇게 변화의 철학자 헤라클레토이스를 하고 넘어가서 다음에 나올 철학자는 파니메니데스라는 사람이에요. 헤라클레토이스는 변화나 대립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에 대비되는 사람이 파니메니데스에요. 파니메니데스는 이 세계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해요. 우리가 변화라고 생각했던 변화는 눈의 착시일 뿐이고 모든 것은 멈춰 있다고요. 또한 이 세계의 근원은 유일하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참된 일자이지요. 우리가 아는 이 움직이는 감각 세계는 전부 허상이고 분할할 수 없고 무한한 참된 일자만이 진짜 물질이라는 거죠. 그래서 차갑다는 뜨겁지 않다 일뿐이고 뜨겁다는 차갑지 않다 일뿐. 즉 변화는 허구인 거죠. 밝음은 어둡지 않음이고 어두움은 밝지 않다, 저것은 이것 아님일 뿐이고 이것은 저것 아님일 뿐이죠. 우리가 제논의 역설이라는 게 있죠? 화살을 쏴도 그 화살은 표적에 닿지 않는다. 닿더라도 그건 눈의 허상일 뿐이다. 이런 논리가 바로 파니메니데스에서부터 나온 거예요. 



파니메니데스의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언어학적인 근거가 하나 있어요, 우리가 말을 할 때 대상을 선택하고 말을 하잖아요. 사고가 이뤄지려면 우리 머리에서 ‘저것’이라 할 만한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해요. 그 대상은 늘 있어야 해요. 사고가 이어져야 하니까. 그런데 변화는 있다가 없는 상황을 말하는데, 있다가 없으면 사고를 할 수 없으니까 사고를 할 수 없죠. 그러나 우리는 사고를 하고 있고, 즉 변화란 없는 것이죠. 근데 러셀이 나름 논리 철학자이니만큼 이런 논리적인 부분에 있어서 직접 반박을 해요. 사고도 계속 바뀌고 물질도 계속 바뀌고 언어 역시도 끊임없이 변한다고 해요. 이 관계는 절대적인 게 아니며 늘 변한다. 이로서 파니메니데스의 논증은 틀린 것 이라며 집고 넘어갑니다.



다음으로 넘어갈 사람은 엠페도클레이스라는 사람이에요. 엠페도클레이스는 어떤 그 미친 철학자의 표본이거든요. 그래도 사람은 착했다고 해요. 치수를 해서 물의 방향을 틀어서 농사를 도왔다거나 병에 걸려 쓰러진 여인을 뭐 의술을 써서 했는지 어쨌는진 모르지만 다시 되살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타적인 일화가 있을지언정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서 욕심을 채우거나 하진 않았어요. 근데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래서 자기가 늙었을 때 자신이 신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화산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요.



이 사람은 일화만큼이나마 기묘한 방식으로 산발적으로 이것저것 이론을 많이 남겼어요. 우선 진화론을 설명한 게 유명하죠. 뭐라고 설명을 했냐 하면, ‘옛날에는 기기묘묘한 생명체들이 많이 살았다. 눈이 세 개인 사람도 있었고 다리가 하나인 사람도 있었고 눈이 둘인 개도 있었고 목이 다섯게인 그런 생명체도 있었다, 그런 이상한 이상한 생명체들이 많이 있었는데 게네들이 어쩌다가 어쩌다가 죽고 결국 살아남은 놈들이 지금 우리가 보는 생명체들이다.’ 이런 식으로 묘한 적자생존을 이야기했어요. 그게 그때 무슨 의미가 있었냐 하지만 결국엔 그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주목할 만한 거죠.



뭐 몇 가지 또 증명을 한 것들이 있어요. 물에 컵을 거꾸로 넣으면 그 공간에 물이 차지 않는다. 고로 그 빈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공기인데, 이로서 공기는 부피를 차지한다. 물을 담은 물통을 빙빙 돌리면 넘치지 않고 어떤 힘에 의해서 바닥에 붙어 있는다. 이렇게 원심력도 증명하기도 했죠. 이렇게 다양하고 재밌는 면모가 많은 철학자예요. 엠페도클레이스가 비록 피타고라스나 밀레토스 학파처럼 정말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어서 우리한테 큰 영향력을 주진 못했지만 어떤 흔히들 믿어왔던 일원론을 거부하고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결과를 도출해 냈다는 것, 자연을 목적이 아닌 우연과 필연의 과정으로서 봤던 그 면을 러셀은 높이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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