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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석 Jul 24. 2020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 베르그송과 월리엄 제임스

이제 여기서부터는 러셀 본인 시대의 지식인들이 등장합니다. 그 첫 타자는 베르그송이예요. 베르그송은 반지성주의자였어요. 좀 더 알기 쉽게 말하면 반이성주의자였죠. 그의 저작은 논리적이진 않았지만, 시를 쓰듯 수려한 문체가 사람을 홀렸다고 해요. 베르그송의 첫 주장은 세계는 생명과 물질로 나눌 수 있다는 거예요. 생명은 상승 운동을 하고 물질은 하강 운동을 하죠. 생명의 진화는 상승하고자 하는 창조적인 과정이고요. 그 창조의 과정 속에 최고 상태에 오른 본능이 바로 직관이에요.



베르그송은 직관과 이성을 비교하며 직관을 더 좋게 평가해요. 그의 말에 따르면 있는 그 자체로서의 세계는 별도의 고체가 생겨나지 않고, 끝없는 생성의 흐름만 있데요. 한데 지성이 형성되자 윤곽과 통로가 생겨났고 이성의 분별함으로 인해 물체들이 분열됐다고 해요. 이러한 지성을 접어 두고 직관을 사용해 분열되지 않는 세계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해요. 분열되지 않는 세계의 지속은 그 자체로 자아를 살게 내버려 둬요. 지속에 분열된 요소가 있지만 그 안에 있은 의식 상태는 서로 녹아들어 결합되죠. 지성은 이 세계를 분열시키고 실체와 멀어지게 만들어요. 순수 지각을 사용해야만 실제 하는 대상과 접촉할 수 있죠. 그러한 순수 지각은 실제 물질과 하나가 됨으로써 물질적 성질을 띄고, 그 물질과 정신의 교차점에 기억이 생겨나요. 따라서 이성은 우주의 위대함을 보지 못하죠. 이성은 음악을 즐길 수도 없고 명상에 집중할 수도 없으며 심지어 여유를 찾을 수도 없으니까요.



러셀은 베르그송의 주장을 반박하고 싶은 마음도, 반박할 의미도 없다고 합니다. 베르그송이 강조한 것은 목적 없는 활동이라 일축하죠. 만약 목적 없는 활동이 선해 보인다면 베르그송에 끌릴 것이고, 부정의가 적고 고통도 덜한 세계를 향한 통찰이나 예시에 의해 고무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베르그송의 철학이 비논리적이라는 것에 애석치 않을 것이라 평합니다.     



그다음은 월리엄 제임스예요. 제임스는 근본주의, 도구주의, 실용주의자이죠. 그는 물체에 대해 사유가 만들어지기 전 까진 그 물체의 재료나 본질은 없는 것이라 주장했어요. 즉 물질의 근본 재료는 순수 경험인 거죠. 버클리나 헤겔이 생각나는 논리인데요. 러셀은 그럼 달 뒤편 같이 경험되지 않는 사물을 아예 없는 것 취급할 수 없고, 또 의식은 경험을 통한 사유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습관에 의존하기도 한다며 비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의 의지에서 뭔가를 찾으려는 모습이 과거 영혼 개념의 잔재라고도 하죠. 영혼이 물러가자 이성이 자리에 앉았고, 이성이 물러가자 의지가 자리에 앉았다고요.



제임스의 순수 경험주의는 ‘믿으려는 의지’와 이어집니다. 믿으려는 의지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잔재인데요. 제임스에 따르면 진실엔 두 가지 의무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진리를 믿으라’와 ‘거짓을 말하지 말라’ 에요. 회의주의자들은 후자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진리를 믿을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하죠. 진실의 두 가지 의무가 동일하게 중요하다면 나(제임스)는 진리가 될 후보자 중 하나를 뜻대로 믿어도 무방해요. 나는 진리를 믿을 동등한 기회를 얻지만 판단을 유보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거든요. 차라리 무언가를 믿고, 그것이 그것의 결과가 좋다면 참이라 여기는 편이 훨씬 낫죠. 제임스는 신의 이름을 빌어 ‘신이 존재한다는 가설이 넓은 의미로 좋은 효과를 낸다면 그 가설은 참’이라고 해요.



러셀은 제임스가 진실을 말하라는 의무에 너무 집중했다고 비판합니다. 만약 우연히 만난 사람의 이름이 ‘에비니저 윌크스 스미스’일까 라고 자문한다고 가정해봐요. 만약 모른다고 대답하면 나는 믿을 기회를 잃어버리고, 에니비저 윌크스 스미스라는 이름이 맞다고 믿기로 한다면 나는 참으로 믿게 될 기회를 얻게 돼요. 그럼 제임스의 이론을 확장하면 나는 반대할 만한 결정적 증거를 얻기 전 까진 내가 이름을 모르는 모든 사람의 이름이 에니비저 윌크스 스미스 일 거라 믿도록 고무하게 돼요. 제임스의 논리가 이렇게 이상해진 이유는 바로 개연성이 없기 때문이에요. 러셀은 제임스의 진실 계율을 수정해 줍니다. ‘당신이 고려할 만한 가치를 지닌 어떤 가설이든지 바로 증거가 보증하는 만큼 신용하라’



또한 제임스의 믿음 이론에 큰 난점이 있다고 하죠. ‘무언가 믿을 때 그 결과가 좋다면 참이다.’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려면 무엇이 ‘좋은’ 것인지 또 믿고 난 다음의 결과가 어떤지 알아야 해요. 콜럼버스가 1492년에 대서양을 횡단했다는 것을 알고 싶다면 콜럼버스가 1492년에 대서양을 횡단했다는 믿음의 결과가 어떤지 고찰해 봐야 하고, 또 1491년에 횡단했다는 믿음과 1293년에 대서양을 횡단했다는 믿음의 결과와 어떻게 다른지 탐구해 봐야 하죠. 또한 이런 믿음은 전통 신앙과도 마찰을 일으키는데요. 그저 좋기 때문에 믿는다면 내가 신을 믿는다면 행복해야 한다는 말과 다를 게 없거든요. 진정한 신도라면 내가 신을 믿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해야 해요. 만약 제가 히틀러는 실존한다는 믿음이 있다는 게 꼭 히틀러가 실존한다는 믿음의 결과가 좋은 게 아닌 것처럼요. 러셀은 제임스의 학설이 전형적인 근대 철학의 주관주의적 광기를 드러넸다고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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