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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석 Jul 24. 2020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 존 듀이, 논리분석철학

존 듀이, 논리분석철학(버트런드 러셀)

다음 철학자는 존 듀이예요. 그는 사유를 진화의 한 과정으로 생각했어요. 따라서 완전한 전체에 다다르기 전 까진 어떤 지식도 완전치 못하다고 논리를 이어갔죠. 러셀은 듀이의 주장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기 전에 자신의 진리관을 드러넵니다.



무엇이 참일까요? 러셀은 낱말이 아니라 낱말의 의미가 참을 결정한다고 해요. 1942년에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했다는 사실을 아랍어로 번역하면 무함마드 기원년으로 바꿔야 하죠. 아랍어와 영어의 단어 차이는 나지만 그 안에 담인 의미는 달라지지 않아요. 어떤 문장을 단언할 땐 그것이 어떨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그 믿음은 어느 언어로 쓰여도 달라지지 않죠. 믿음은 참, 거짓, 어느 정도 참이라는 세 가지 부류로 나눠지고, 우리는 믿음에 대해 탐구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 믿음에 전부 어떤 의미가 부여되진 않아요.     



다시 듀이로 넘어와요. 듀이는 참을 목표하지 않고 모순을 거짓으로 단정하지 않아요. 그저 탐구라 불리는 한 형식이라 했죠. 즉 그것이 진실 진리가 아니라 논리의 형식, 관계라고 본 거예요. 그리고 그 탐구는 세계를 유기적으로 통합하려는 일반적 관계의 일부라고 했죠. 처음에 말했던 그 완전한 전체 말이에요. 러셀은 이에 대해 왜 지식의 끝에 통일된 전체를 예상하는지 의문을 품습니다. 탐구가 세계를 통합하게 하며, 또한 통일된 전체를 예상한다는 이론은 논리적으로 순서가 뒤바꾸어 있다고 해요. 예를 들어 뒤죽박죽이 된 카드 한 벌의 순서를 탐구할 때 정상이라면 탐구 과정을 거쳐 카드 순서를 말하겠죠. 그러나 듀이 식이라면 카드를 순서대로 배열한 후 이것이 탐구 과정에 따른 결과라고 대답해야 하니까요.     



듀이는 진리가 탐구하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의견이라고 해요. 그러나 유기체에게 모든 환경은 불만족스러울 수 있고, 그 개선 과정이 탐구라고 했어요. 러셀은 이에 대해서도 그런 탐구의 만족은 전체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며 반박합니다. 특히나 전쟁 상태 때, 적군이 이동한다는 탐구 결과가 나왔을 때 그 보고가 장군에게 만족스러운지, 불만족스러운지는 싸워 봐야 알 수 있죠. 적군이 실제로 이동했다면 그를 믿고 싸움을 걸은 결괏값이 승리하거나 패배하더라도 적군의 이동 사실 자체는 참일 거예요. 그러나 듀이는 이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왜냐면 장군에겐 여전히 승리한다는 ‘만족스러운 믿음’과 패배한다는 ‘불만족스러운 믿음’이 있을 테니까요. 따라서 탐구가 전체적인 만족을 향상한다는 논리는 믿음으로 인한 결과가 아닌, 결과를 따라 믿음을 바꾸는 아이러니한 오류를 범하게 돼요.  


   

러셀은 듀이는 믿음을 결과에 의해 판단하고 나(러셀)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원인에 의해 판단한다고 정리해요. ‘믿음을 형성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참이다.’라는 검증된 미래 보장 가능성은 미래를 만족스럽게 인간이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 기인해요. 즉 인간이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도구주의적인 철학은 인간의 재배력에 감명받은 이들이 주로 끌리죠. 그리스인들은 필연과 숙명을 믿었기에 교만하지 않고자 했고 중세에서는 신에 대한 겸손, 복종하는 태도가 주를 이뤘죠. 르네상스에선 인간의 자긍심 회복했지만 무정부 상태의 재앙까지 갔다가 근대에 접어들며 인간 공동체의 힘을 과시하며 인간을 신처럼 생각했죠. 이에 대해 러셀은 우주에 대한 불경을 느낀다며 불안감을 토로합니다.     



마지막으로 논리분석철학이 등장하는데요. 사실상 러셀 본인의 주장이에요. 논리분석철학은 쉽게 말해 과학적 방법론을 뜻하며, 그중에서도 사실상 순수 수학과 과학에 관련된 거예요. 순수 수학과 과학은 문법 구조를 통해 존제한 다는 믿음이 바로 논리분석철학이에요. 그 문멉 구조는 수학적 언어와 관련된 지식이죠. 피타고라스는 일 더하기 일이 선험적 지식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이는 언어적 약속, 문법 구조에 의한 결과 물라는 거예요. 러셀은 물리학이 양자 역학을 통해 물질을 덜 물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심리학은 무의식을 통해 정신을 덜 정신적인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요. 철학 역시도 철학을 덜 철학적인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이겠지요.     


러셀은 총정리를 하면서 철학은 두 부류로 나뉜다고 해요. 세계 본성을 탐구하는 영역과 최선의 삶, 윤리를 탐구하는 영역이죠. 앞서 지나온 수많은 철학의 대부분은 이 두 영역을 충분히 명료하게 분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많은 오류가 생겼다고 말해요. 어떤 증명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학자의 직무라 생각했기에 과거의 결점을 발견하고 그 대안으로 자신의 증명을 제안했고 그 증명을 타당하게 보이기 위해 오류를 범하였고 하죠. 러셀은 논리분석철학자들은 위 증명을 모두 거부한다고 해요. 그리고 그들은 인간 인식이 이에 대한 결정적 해답을 찾을 수 없을 거라 고백하기까지 하죠. 그러나 오리혀 이 체념하는 태도 덕문에 오히려 오리무중이던 요소들의 많은 문제에 답할 수 있었어요. 광신 행위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통일을 이루는 소수의 힘 중 하나가 과학적 진실성이에요. 과학적 진실성이란 지역적 편견, 기질적 편견을 벗어나 객관적 관찰과 추론을 바탕한 습관을 의미해요. 객관적 방법을 적용하는 곳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광신 행위는 감소하고 공감 능력과 서로 이해하는 능력은 증가하게 될 것이며 철학이 일부 독단적인 주장을 포기한다고 해서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 삶에 영감을 불어넣는 일 까지 그만두진 않는다는 말을 끝으로 러셀의 서양 철학사는 끝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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