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Round] 진심이 건너는 길

《시의 문장들》《어느 양형 이유》

by 필화

지난 편지에서 판에 박힌 듯한 인사말임에도 너무나 기뻐하시는(!) 필화 님의 반응을 보고 퍽 신선했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깨달음도 얻었죠. 누구나 따분히 여기는 클리셰적인 표현조차도, 정말이지 클리셰가 작동할 수 없는 환경에다 던져 놓으면 신선하게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을요! 이것이야말로 미스매치의 미학…



그건 그렇고,

역시 우리가 괜히 친구가 아니었어요. 그 강의 말입니다, 저는 심지어 얼리 어답터로 할인받아 사전등록까지 해놓고… 네… 어디까지 들었더라? 기억의 심연 아래 묻힌지도 오래되어 완전히 망각의 강을 건너가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돈 아까우니 이제라도 찾아 들어야겠습니다. 흑흑.



‘의도적으로 이 마지막 문장을 향하여 조준하고 쓴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저는 일종의 전율을 느꼈답니다. 왠지는 지금부터 말씀드릴게요. 요즘 한참 신나게 읽고 있는 책이 있는데, 마크 포사이스가 쓴 《문장의 맛》이라고 하는, 수사학 책입니다.


수사라니! 레토릭! 수사가 과하다는 지적을 에둘러 받는 제가… 수사학 책에 환장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요? (네 불치병이에요, 포기하세요 K pd님 ㅋㅋㅋㅋㅋ)


고양이가 고등어를 지나치지 못하듯 저도 뭐 비슷할 거예요. 아무튼, 지금 영시에 대한 챕터를 읽고 있는데 필화 님이 말씀하신 내용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해설이 있어요! (광분했다) 인용해 드릴 테니 꼭 봐주세요!!! (진정해라 나 자신) 중요한 건 원문이니까 번역문은 빼겠습니닷. 운율이 중요하니 꼭 소리 내어 읽어주세요!


「Dark house, by which once more I stand

Here in the long unlovely street,

Doors, here my heart was used to beat

So quickly, waiting for a hand,

<앨프리드 로드 테니슨, 인 메모리엄In Memoriam>」



ABBA, 각운이 순서대로 “and-eet-eet-and”로 끝나는 이 한 연의 멋진 점은 반드시 네 행이 있어야 전체 내용을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행연구로 쓰면 두 줄이면 다 끝난다. ABA 교차 운율을 쓰면 세 줄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한 연의 네 번째 행 마지막 음절에 도달하고 나서야 첫 행이 비로소 시적으로 이해된다. 내용은 연기되고, 또 연기되다 마침내 완료된다. 그래서인지 시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 문맥에 맞지 않게 인용되는 안타까운 일도 생긴다.


「I hold it true, what’er befall;

I feel it when I sorrow most;

‘Tis to have loved and lost

Than never to have loved at all.」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싶으시면 맞아요, 많이 인용된 유명한 시구죠. 아예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는 사랑하고 잃는 것이 낫다, 그런 뉘앙스로.


머리 아픈 형식에 관한 내용은 대강 넘어가셔도 돼요. 저도 잘은 몰라요, 제가 영문학도도 아니었는데 저라고 뭘 알겠어요.


중요한 건 네 번째 행 마지막 음절에 도달해서야 마음이 지잉, 울리는 먹먹한 장면이 완성된다는 사실이죠.


아, 중요한 사전 정보를 안 드렸네요?

이 시는 테니슨의 가장 친한 친구가 죽은 뒤 시인이 그를 애도하며 쓴 것이거든요. 그러니 응답이 있을 리 없는 빈 집 앞에서, 한때 환한 미소와 함께 열렸던 문이 두 번 다시 열릴 일이 없음을 재차 실감하는 그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시인이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순간 그는 설렘으로 자신의 마음도 함께 두드렸던 거죠.



이제는 돌아올 리 없는 환대하는 손을- 그럼에도 기다리며 애도를 곱씹는 자가 홀로 남은 풍경을 함께 그려보게 하는 화룡점정같은 마지막 진술.


시인의 손은 그대로 비어 있죠. 그 빈손 안에 시인이 저 가슴 아픈 진실을 틀어쥔 채 호소하는 겁니다. 이런 슬픔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너를 몰랐던 것보다는 알고 사랑하고 상실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여기까지 혼자 감정에 되게 취해서(오전 일곱 시부터 이 무슨…) 썼는데 음, 좀 민망하네요.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

암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어요. 꼭 충격과 반전이 아니어도 돼요. 그저, 그때까지 읽었던 이야기를 한꺼번에 감싸안는 그런 멋진 결말, 한 편의 서사를 내내 지배해 왔던 감정을 조용히 다듬어 갈무리하는 문장. 그런 엔딩이 얼마나 근사한지를 구구절절하게 말하느라… 글자수를 엄청나게 허비했군요. ㅋㅋㅋ 제가 그렇죠 뭐. ㅎㅎㅎ


이 일을 어쩌면 좋나요, 오늘의 본론은 시작도 못했는데… 엄청나게 길어질 것 같은 불길한 느낌적 느낌이 엄습하는군요. 흐음.


시로 시작했으니 시로 끝을 내보겠습니다. 필화 님은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셨는데, 뭐 이 기회에 시와도 좀 친해지시면, 이래저래 좋잖아요?!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은 중요하니까요.


사실 저도 시 잘 몰라요, 어떻게 읽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시가 태반이고 마음에 와닿는 시는 극히 소수입니다. 근데 그러면 어떤가요? 세상의 수많은 시인들 중 내 마음을 울리는 시를 쓰는 시인도 분명히 어딘가엔 있고, 내게 한 번 꽂혀 절대 사라지지 않을 시도 어딘가에는 있습니다(이건 장담합니다). 무, 물론 찾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있긴 있어요!





《시의 문장들》




유유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에요. 유유출판사, 제가 참 좋아하는 곳입니다. 어느 정도로 좋아하냐면 제가 출판사 뉴스레터 같은 거 굳이 받아보지 않는 사람인데 유유의 뉴스레터는 꼭 읽어요(추천해요!). 아무튼 유유의 <문장 시리즈>의 한 권입니다.



당연히도 시의 한 문장을 인용하여 짧은 글을 덧붙인, 기존의 시리즈와 틀을 같이 하는 책인데 아무래도 인용문이 시의 문장이다 보니 비약이나 비유가 놀라운 것들이 많습니다.


그 한 문장을 읽다 보면 시의 전문을 읽고 싶어져요.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이런 놀라운 문장이 나왔는가, 궁금하거든요. 그렇잖아요, 인간적으로 매력 있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해지는 것처럼. 그 문장이 살아 숨 쉬던 원래의 집이 어디인지 당연히 알고 싶어지죠.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처럼 시의 문장이 그대로 제목이 되어 나오면 그 시집은 사지 않을 수가 없다. 읽는 순간 그것은 그대로 내 삶의 표어가 된다. 비록 몸으로는 살지 못하고 그저 마음뿐이라 해도, 그 문장이 있어 삶은 잠시 빛난다. 반딧불 같은 그 빛이, 스포트라이트 한 번 받은 적 없는 어둑한 인생을 살 만하게 만든다. 그 빛을 잊었을 때조차 잔영은 남아 길 잃은 걸음을 비춘다. p.9-10


나는 이 세상에 나서 어떤 나무를 심어왔고,

내 정원에는 어떤 목소리의 새가 날아왔던가 .

이홍섭, 「귀 조경」, 『터미널』, 문학동네, 2011 -p.74



삼월에 고백했는데 지금은 구월, 서사도 없이 시간은 흘러서

이름 붙이지 못한 구름들이 이리저리 흩어진다

김재훈, 「공허의 근육」, 『문학동네』,2010, 가을호 -p.116


시인의 말에 따르면, 하이틴 잡지에 실을 거니까 빨리 하나만 “긁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오 분 만에 쓴 시다. 줄 긁듯이 고민도 않고 단숨에. 그런데 그렇게 쉽게 쓴 시를 사람들이 좋아해서 처음엔 좀 창피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산가족 상봉을 기념해 이 시를 낭송하는 것을 들었고 그때부턴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단다. 아마 나를 빌려 나왔지만 꼭 내 것만은 아닌 시의 운명을 받아들인 까닭이리라. -p.227




시인도 그렇고, 무용가도, 작곡가도, 소설가도, 화가도…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 저는 제 나름의 (편협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타인에게서 ‘아름다운, 훌륭한 작품이다’라는 진심 어린 감탄사를 끌어내는 이들은 가장 인간적인 본성에 천착한 예술가들이라는 사실을요. 다시 말해 자신들이 느낀 감정, 타인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세상의 어떤 감동적인 - 혹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 일면을 자신의 능력껏 표현하려고 애쓴 이들에게 우리는 아낌없이 감탄하고 공감하여 기립박수를 보낸다는 사실을.



인간은 그 어느 때에도,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것에 대해서 놀라워는 할지언정, 감동하지는 않는다고요. 그것이 지금 제가 유일하게 닥쳐올 미래에 대해 낙관하는 지점입니다.



세상에 넘쳐나는 사랑스러운 우리 동류들의 인류애 넘치는 작품들로 오늘도 풍요롭고 행복한 하루가 되시기를 바라며 행운의 V- 사인을 그리며(소화불량을 야기했다면 죄송합니다) 이만 발송을 누를게요!
















ㄷㅏㅁ화님.

저는 오늘 오전에 침대에 누워서 약간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담화님의 메일을 읽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18회에 걸쳐서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무엇을 했는가 하니, 그것은 단순한 책 소개도 아니고 책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의 일상만도 아니란 겁니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인간을 바라보고, 인간을 배워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재확인하는 과정이었을 수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보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아... 우리가 인간을 배우고 있었네...’ 라며 혼자 경악을 하며 감탄하다가 ‘아.... 이래서 책이 필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또 해보았지요.


저는 책에 진리(?)와 지혜, 재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읽어왔지요. 인생이라는 지도에 안내서 같은 느낌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시처럼 애매모호하고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문학을 별로 안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여간 그 지도에 책이라는 사람이 안내자로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오늘 정말 행복하다는 느꼈습니다. 왜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을 재발견하고, 재정의하는 느낌이었달까요..


비록 시작은 “야, 너 나랑 재미있는 거 하나 해볼래?”라는 담화님의 전화 한 통이었지만, 배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방향성이 있다는 게 감사했으며, 이 담화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무언가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 무척 감사하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담화님이 보내주신 시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반전에 놀랐습니다만, 너무나 처연하고 아름다운 시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 슬퍼. ㅠㅠ 이제 갱년기인지 이런 게 참 슬픕니다....


한 편의 서사를 내내 지배해 왔던 감정을 조용히 다듬어 갈무리하는 문장. 그런 엔딩이 얼마나 근사한지를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게 생겼어요. 글을 쓰는 작가들은 결말을 확정하고 글을 몰아가며 쓰나요? 아니면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시작해서 펼쳐가다 보니 그런 결말에 다다르는 걸까요? 아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습니다만, 박학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움베르토 에코 선생님은 <장미의 이름>을 쓸 때 ‘어느 수도사의 독살’이라는 걸 소재로 시작하셨다고 작가의 말에 쓰여 있더군요. 그래서 조금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키워드 하나로 저리 방대한 양의 글을 써내려가는 것이 작가인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담화님의 통찰력이 담긴 내용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이 부분 말이죠.

'인간은 그 어느 때에도,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것에 대해서 놀라워는 할지언정, 감동하지는 않는다'는 부분입니다.




세상에 전할 메시지를 쌓아두는 것이 인간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자기 안에 ‘할 말’이 없고 세상을 향해 외칠 자신만의 대사가 없는 것처럼 막막한 건 없어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생각나는 개인적 일화가 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영어로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제 이름을 말하고 나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야 저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 할 말(=자기소개)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걸 알았지요. ‘아, 그 때의 나는 나를 잘 몰랐구나. 자아 성찰은커녕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시간도 없이 성인이 되어 버렸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더 시간이 지나서는 언어라는 것은 표현의 도구로서 잘 기능하면 충분한 것이고, 세상에 전할 메시지를 내면에 쌓아두는 것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더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답니다. 심지어 그건 누가 훔치려 해도 훔칠 수 없지요.



하긴, <장미의 이름>의 서사를 떠올려보니 움베르토 에코님은 이미 저 책을 저술하기 전에 중세의 역사에 대해 천착하고 있었으니, ‘한 수도사를 독살한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여 세계관을 만들고 이야기를 증축해나간 것이 그에겐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책을 통해서 인간을 더 알아가 봅시다. 그것을 차곡차곡 쌓아 독자들과 나누고 성장해 가보도록 해요.




그러니 이번에는 이 책 밖에는 없습니다. 마침 읽고 있었던 책이기도 하고요.

바로 박주영 판사의 《어떤 양형 이유》입니다.




《어떤 양형 이유》




이 책에는 한 명의 화자와 수많은 타자가 등장하죠.

물론 그 타자들은 화자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형태로 표현됩니다만.



이 책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요. 그러나 니케의 저울과 정의의 칼 뒤로 가려져 잘 알 수 없는, 마치 먼 세상 같지만 이 세상인, 그곳 구석구석의 이야기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의도적 힐링의 노림수가 전혀 없는 담백한 문체로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이렇게 울리나 싶을 정도로 많이 울컥하고 많이 울었습니다.



페이지마다 언급되는 수많은 소설과 영화 속 주인공과 음악의 가사가 모두 박주영 판사가 담당한(혹은 담당했던) 사건, 피고인, 대한민국 법 체계, 동료 판사들, 인간에의 이해, 법의 공정성, 정의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와 천착으로 물들여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그의 삶과 그 가 하는 일 모두가 참 ‘시지프스’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책의 말미에 시지프스에 대한 언급을 하신 부분이 있어서 옮겨봅니다.



정의는 고정된 방위가 없고,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뚜렷한 실체 없는 신기루이자 한 마리 파랑새 같다. “사유의 내용은 의심할 수 있어도 사유한다는 사실과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나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정의는 의심할 수 있지만 정의에 대한 열망을 품은 인간 그 자체는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어쩌면 절대적으로 곧고 바른 유일한 것은 미덕이나 공동선이 아니라,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바르게 살려는 의지를 갖고 그 길을 끊임없이 고뇌하며 걸어가는 존재, 그 자체가 아닐까? 그렇다면 정의는, 목표가 아니라 여정이고, 정의로운 삶을 살려는 열망을 품은 인간 그 자체다. 부정과 불의의 바윗덩이를 영원히 치우는 시시포스, 파랑새가 있다는 믿음을 갖고 묵묵히 길을 걷는 우리가 바로 정의다.

파랑새는 있다.

정의도 있다.

정의가 뭔지 잘 모르지만 열심히 창고를 위지는 창고지기가 있다.

창고지기의 보고서는 거짓이 아니다.

-부탁받은 정의 중, p.274




그리고, 이 시지프스의 원동력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있어서 이 또한 옮겨 봅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한 일말의 애정과 연민조차 품고 있지 않다면, 재판이라는 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정녕 용인될 수 있겠는가. 법이 곧 정의고, 법이 곧 사랑일 수는 없지만, 법은 정의이면서 사랑일 수 있다. 법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한 치 틀림없이 설명할 수 없다면, 법은 적어도 사랑에 기반하고, 사랑에 부역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반드시 시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절대자가 출발하는 빛에 입력한 것과 같은 그의 의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적처럼 탄생한 유기화합물이 계속 존속하기 위해서든, 마지막까지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 뿐이다. -법은 사랑처럼 중, p.288~289




지나치게 낭만적인 해석인가 싶기도 하다가, 이 책이 개인의 회고록과도 같은 성격을 조금 띄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마저도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이 책의 유려한 문장들 사이사이에서 마음을 마주하고, 눈물을 쏟으며 드는 생각은 이런 겁니다. ‘왜 우리가 사는 사회의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왜 정치에 무심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약간의 이유를 담고 있구나...라고 말입니다.




이번 편지 내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한 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라도 인간에 대해서 배워봐요. 또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관찰해 보아요. 우리 나이쯤 되면 조금은 ‘인간이 그렇지 뭐..’ 하고 시들해질 수 있기 마련이지만, 삶이란 것은 그 복잡한 레이어와 단면들 사이사이로 원인과 결과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으니 어른된 책임으로 지켜보고, 해야 할 몫을 해보는 어른으로 늙어가 봅시다.



오늘 제 편지가 사뭇 길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사유하기 좋은 계절이 되었어요.

더위를 잘 가라앉히시고, 오늘도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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