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계속해주세요》《머리를 부딪친 곰 이야기》
가을이 왜 이렇게 안 오나요, 필화 님.
꼬리 더위에 말라 비틀어져가는 와중에 또 습할 때는 엄청나게 습해서 몸 군데군데에서 곰팡이가 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바싹 타는 것 같은데 어딘가 축축한, 이 도무지 용납도, 양립도 불가한 상태가 조만간 끝이 날 거라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입니다.
글을 쓰는 작가들은 결말을 확정하고 글을 몰아가며 쓰나요? 아니면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시작해서 펼쳐가다 보니 그런 결말에 다다르는 걸까요?
라는 엄청난 질문을 던져주셨어요.
역시 케바케 사바사 아닐까 싶어요. 제 경우엔 어떤 인물의 목표를 정한 뒤, 그 인물이 만날 수 있는 최대의 갈등이 극적으로 치달은 장면을 구상하면 냅다 달립니다. ㅎㅎㅎ 거짓말 같지만 진짜예요. 건축 도면 그리듯 구상하시는 분도 계시고 결말을 미리 마음속에 그려두고 가는 분도 계시죠. 그런데 저는 왜 갈등의 극한을 떠올리는 걸까요. 역시 이상한 사람이라서 그런가 봐요.
이 얘기는 이쯤에서 접어두기로 하고요.
편지를 읽다 보니 나를 거쳐가는 수많은 타인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좋은 사람도 있었고, 호의로 다가왔으나 내게 어느 순간 뒤에서 칼을 꽂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첫인상은 그닥이었으나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다정해지는 진중하고 좋은 사람들도 있었죠. 그런 시간을 쌓아오다 보니(이건 쓸모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는데, 저는 시간을 ‘흘려보내기’보다 ‘쌓아올리’고 싶어요. 그냥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 지금껏 제게 남아있는 인연들은 모두 저와의 사이에 상호 존경과 존중이라는 따뜻하고 몰캉한 그 무엇을 조심스레 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오랜 세월을 알고 지내다 보면, 함부로 써서 없어지기도 하는, 연골 같은 존재죠.
딱 무엇이라고 명쾌하게 정의 내리기 힘든 그 감정이 갈수록 인간 사회에서 사라져 가고 있어 몹시 슬픕니다.
어쩌면 쾌/불쾌처럼 명확하게 똑 떨어지는 감정이 아니어서 그런 것일지도요. 오래전에 이어령 교수님께 가르침 받기로, 한국인은 참으로, 양 극단을 조화롭게 절충한 ‘잡noise’의 문화를 소중히 오래도록 간직해 온 민족이라 했는데, 요즘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고요,
상호 존중이 바탕이 되는 (일시적) 관계/만남이 있습니다. 바로 대담이지요.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 상대의 이야기를 청해 듣는 것은 예의와 존중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대화의 한 양태입니다. 저는 이런 대담집을 읽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인간이 언어로 빚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고도 많지만, 이 역시 거기에서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요.
《부디 계속해주세요》라는 대담집이 있답니다.
《부디 계속해주세요》
한국과 일본의 문화인 열 사람이 만나 각각 두 분씩 대화를 나눈 내용을 정리해 엮은 책입니다. 영화 쪽의 일을 하는 문소리/니시카와 미와, 소설가 김중혁과 일러스트레이터 요리후지 분페이, 건축가인 안기현/고시마 유스케, 소설가 정세랑과 아사이 료, 사진가인 기슬기와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오카다 도시키가 팀을 이루어 멋진, 통찰력 가득한 대화를 나누죠.
제가 똑똑한 사람들의 대화를 듣는 걸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그런 제게는 마치 종합과자선물세트 같은 책이었어요. 제가 이 책을 바로 집어들게 한 것은 바로 김중혁 작가와 요리후지 작가 때문이었어요(김중혁 작가는 훌륭한 소설도 많이 썼지만, 그림도 정말 잘 그립니다). 요리후지 분페이 작가의 위트 있는 그림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김중혁 작가님은, 음, 여기서 이야기하기엔 할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제가 이분의 작품 중 친필사인본으로 소장하고 있는 책이 몇 권인지. 하하하;;
일단, 필화 님을 파안대소하게 만들 구절을 하나 인용해 드릴게요. 눈 크게 뜨세요!
제 소설도 그와 비슷하게 느끼셨다고 해서 생각난 겁니다. 아마도 제 소설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소설일 것 같은데요, 어떤 불의나 압력에 대해서 바로 항의를 하기보다는 곰곰이 좀 생각해보다가 나중에야 화가 나서 뒤늦게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집에 와서 자려고 누웠는데 ‘아, 내가 그때 그 말을 했어야 됐는데’ ‘아, 그때 그렇게 말했으면 멋있었을 텐데’하고 생각하는 사람들. 저는 그런 사람들이 문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과 공유할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p.80
우리는 문학적인 사람이었던 거예요! 그런 걸로 칩시다.
‘나는 알고 당신은 모른다’라는 관계를 토대로 ‘나는 알고 있으니까 모르는 당신을 가르친다’라는 포지션을 잡느냐, ‘나도 모르고 다들 모른다’라고 할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라고 하느냐, 이 두 개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p.121
그래서 요즘은 사람들이 쉽게 “나는 이런 것 저런 것이 아주 싫어!”하고 강하게 말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듯해 걱정입니다. 무언가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쉬우면 그건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실 “나는 구체적으로 이런 것 저런 것이 좋아”하고 말하는 사람이 훨씬 행복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죠. 그렇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저도 그 일원인 것 같고요. 사회를 전반적으로 덮은 혐오, 쉽게 빠져드는 혐오에도 맞서고 있고 문학계 안에서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문학은 낡았어, 안 읽을래!” 하고 뭉뚱그리는 사람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누구고, 그 사람의 새 작품을 기다리는 건 즐거워!”라고 말할 수 있는 독자가 더 필요한 시점이라 작가들이 먼저 변하고 손을 뻗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임은 항상 작가들에게 있으니까요. -p.209
정말 그래요. 무엇이 싫다고 말하는 것보다, 무엇이 좋다고 말하는 것에 훨씬 큰 에너지와 노력이 듭니다. 그러나 그 ‘좋다는 표현’이, 말하는 나와, 그 말을 듣는 여러 상대를 더 많이 행복하게 합니다. 이성적인 비판은 필요하지만, 감정적인 비난은 쓸모가 없을뿐더러 파괴적이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비난을 위한 비난은...
말에는 정말 무서운 힘이 있어서 내가 말하는 대로 삶이 흘러가더군요. 나이를 이만큼 먹고 보니 그게 진실이었음을 여러 번 목도하게 됩니다. 현실에서는 (말실수의 두려움과 굳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의견을 교환하는 일에 피로도가 심해져서) 갈수록 말이 줄어드는데, 우스운 건 온라인상에서는 말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불일치를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원래는 수기로 뭔가를 많이 쓰던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대부분 디지털로 쓰다 보니 지난 글을 훑기가 그리 수월치가 않네요. 노트에 썼다면 노트를 후루룩 넘겨보면 될 일인데, 제가 지난 1년간은 꼬박 온갖 종류의 글을 노션에 쓰면서 관리했거든요?
하나 보고 나면 다음 것을 굳이 눌러서 열었다가 또 닫고... 제가 쓴 글조차 정말 무의미한 노동이 앞뒤로 따라붙어야만 다시 읽어볼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지금 막 좌절하고 있는 참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요즘 우리의 삶이 조금 그런 것 같지 않으세요?
분명 편해졌는데, 의외로 자잘하고 귀찮으며 피로도가 순식간에 높아지는 일들도 만만찮게 늘어나서, 편한데 불편해! 싶은 거 말이죠. 저는 배달음식을 시켜 먹을 때 그걸 제일 심하게 느낍니다. 먹을 때는 편한데, 치울 때는 귀찮아 죽을 지경입니다. 매번 그걸 세척하고 말리고... 해서 그런 것 같긴 한데, 그냥 버리기엔 또 마음이 엄청나게 불편하단 말이에요. 정말이지 뭘 위한 편리인지, 가끔은 아리송합니다. 아니면 산다는 건 원래 그런 건데 제가 투덜대고 있는 걸까요... 제게 현답을 주세요! (옷자락 질질)
ㄴㅔ????
쓰앵님.
제게 무슨 현답을 바라시는 겁니까... 평소에 설거지는 식세 이모님이 대신해주니까 배달음식 포장용기 정도는 그냥 제가 닦아서 버리지만, 역시 귀찮은 건 음식물 쓰레기죠.
아 중요한 건 이게 아니죠... 편리한데 불편한 거 말씀이시죠?
생각해 보면 내내 우리는 그 불편을 별 생각없이 감당하며 살아왔을 거예요.
편리함에 따라붙는 불편한 거. 예쁜 겨울 니트에 생겨나는 보풀 같은 거 말입니다.
삐삐가 생겨서(아 연식 나온다) 급한 연락을 주고받고, 암호 같은 메시지에 웃고 울고 했지만, 공중전화 찾아다니는 불편함이 있었고. 무선전화가 생겨서 아무 데서나 연락이 가능하게 된 편리함은 있었지만, 역시 아무 데서나 통화하는 시끄러운 사람들을 감당해야 했어요. 스마트폰이 생겨서 오만 정보를 다 찾고 저장하는 편리함은 생겼지만, 스마트폰에 기억을 부담시키는 그야말로 폰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들이 되기도 했지요. (이 것에 대해서는 니콜라스 카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신랄하게 까발려주고 있어요.)
몇 년 전부터 저도 주요 사이트와 서비스의 ID/PW를 수기로 적어두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도 ‘아 이거 완전 할머니 다 됐네’ 하다가도 ‘그래도 이게 낫다. 폰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못해.’라고 기억력의 한계와 나이 듦을 인정하게 되었어요. 몸을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을 감당해야 한다고 받아들이면 일상이 조금 더 쉬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할머니 되어서 새로운 신기술이 나오면 저도 지금 우리 엄마처럼 “얘, 이거 어떻게 하는 거니?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다.”할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그런데, 그보다 말이죠.
인용해 주신 그 문구 말입니다???
‘아, 내가 그때 그 말을 했어야 됐는데’ ‘아, 그때 그렇게 말했으면 멋있었을 텐데’하고 생각하는 사람들. 저는 그런 사람들이 문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과 공유할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라니요???
이건 저희가 1라운드에서 말했던 TREPVERTER [트렙베르테르] 상대방의 말을 멋지게 되받아칠 수 있는 말이지만 꼭 뒤돌아선 뒤에야 떠오르는 것을 뜻한다. 그대로 풀면, 아래층 계단의 말. 이거 아닙니까???
역시 이건 외래어로 받아들여 줘야 한다고요. 게다가 문학적이라뇨.. ㅠㅠ 그래요. 우리는 문학적인 사람들이라고 해둡시다. 적어도 문학을 사랑하긴 하니까 말이죠!
저도 김중혁 작가님 좋아합니다. 목소리도 좋으신데 그림도 잘 그리신다니.. 중블리.......
김중혁 작가님이랑 공유할 수 있는 소설 있으면 좋겠네요.. 예를 들면 밤마다 진상 손님들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트렙베르테르)을 일기로 써내려가는 작가지망생 알바생이 주인공이라든지... 사실 그녀에게는 사람의 속마음이 보이고 들려서 그녀의 트렙베르테르는 매우 남다르다든지... 그래서 그녀의 트렙베르테르를 담은 것이 대히트 소설이 된다든지.. 하는 재미난 이야기 말입니다.
오늘 제가 소개하고 싶은 책은 《머리를 부딪친 곰 이야기》라는 제목의 안도 미키에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입니다. 일본 <작은 동화대상>의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머리를 부딪친 곰 이야기》
일곱 편의 단편 속 주인공들은 모두 산 속에 사는 동물이지만, 모두 의인화라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어른 동화이니만치 삽화도 무척 귀엽고 책도 얇아서 가볍게 읽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게 모두 우리 인간의 모습의 면면을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꽤나 아프고, 슬프고, 안타깝고, 사랑스럽고,, 또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 중에서도 재미있는 <훌륭한 수사슴>이라는 단편을 소개해 볼게요.
호이치라는 이름의 수사슴은 이른바 숲 속의 현자 역할을 하고 있어요. 어느 날 빵 한 조각을 먹으려는 참에 호저, 미국너구리, 타조 등이 나타나 알 수 없는 질문이나 어리석은 질문을 해대고, 의미를 찾아달라고 하는 통에 빵 한 조각을 먹지 못하죠.
화가 난 수사슴은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그 놈의 의미, 의미, 이젠 진절머리가 난다. 지긋지긋하다고!”라고 소리를 치고선 의미라는 걸 없애보려고 합니다. “의미 따윈 애당초 없어. 살아가는 데 의미 같은 건 필요치 않아. 그냥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해.”라며 의미 있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앉으려다 ‘앉으면 의자에 의미가 생기’니 뿔에 걸칩니다. 차를 마시려고 찻주전자를 준비하다가 이 또한 의미 있는 행동이라 생각하곤 대신 찻주전자를 대신 끌어안습니다. “내가 널 키워주마” 이러곤 말이죠. 그런 그에게 아버지가 찾아옵니다.
“의자를 뿔에 걸고 찻주전자를 쓰다듬다니, 이게 대관절 어찌 된 일이냐?”
수사슴은 잠시 생각한 끝에 이렇게 대답했다.
“의자는 찻주전자에 비판적. 그래도 우리는 숲 속의 음악가니까 여하튼 들배지기로 댄스 앤드 슛!”
“... 너 도대체 뭔 소릴 하는 거냐? 도통 의미를 모르겠군.”
“그럼 됐어요. 의미가 있으면 안 되거든요.”
수사슴은 또다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에게는 어떤 일을 해야 의미를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그러곤 아버지를 입겠다고 결심하곤, 아버지를 업습니다.(입을 수 없으니 업는 것이죠.) 수사슴은 그제야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지만 숲 속 동물들이 “역시 호이치는 효자야”라고 하자 또 다시 난관에 봉착합니다.
숲 속 동물들은 수사슴이 업고 있던 아버지를 내려주고, 찻주전자도 내려주고, 뿔에 걸린 의자도 내려주고 수사슴에게 먹을 것을 줍니다.
“수사슴은 온화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날카롭게 솟구쳐 있던 뿔도 두루뭉술해졌다.”
(중략)
걸음을 멈춰 선 나그네에게 수사슴이 남은 주먹밥을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세요. 혹시라도 여행 중에 인생의 의미에 관한 고민이 생기거든 일단 이것부터 드세요. 그러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을 거예요.”
나그네가 대답했다.
“필요 없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주먹밥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빵 속에 있으니까.”
수사슴이 멋쩍어하며 주먹밥을 거둬들였다.
그 모습을 본 나그네가 사과했다.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만 잘난 체를 했군요. 실은 딱히 깊은 의미는 없습니다. 그저 오는 길에 호랑이에게 빵을 준 게 아까 웠을 뿐이에요.” p.116
되는 일이 없이 화가 나고 짜증만 난다면, 밥은 잘 먹었는지 잘 잤는지 돌이켜보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답니다. 그 말을 이십 대에 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하루하루에, 하나하나의 기회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또 의미를 찾느라 소중한 시간들을 너무 많이 흘려보낸 것 같기도 해요.
‘삶’에 ‘의미’라는 것은 품위와 이성을 가지고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겠지만, 우선은 본능부터 잘 챙겨주는 게 우선일지도 모르겠어요. (역시 매슬로우!)
그래서 저 오늘은 점심 뭘 먹었을까요?
담화님 표현대로 ‘꼬리 더위’를 식혀줄 냉면을 먹었어요, 그게 오늘의 좋았던 점 중 하나입니다. 앗, 생각해보니 전 오늘 부족한 수면양을 챙기느라 낮잠도 아기처럼 잘 잤지 뭐예요.. 충만한 하루였네요.
어둠에 담겨오는 선선한 바람 그러안고 오늘밤도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