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own of Turtle》《남부의 여왕》
가내 두루 평안하십니까, 필화 님?
운치 있는 가을비 소리를 배경 삼아,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먹을 가는 심정으로 - 사실은 이 지긋지긋한 비, 도대체 언제쯤 사라질 테냐 하며 먹 대신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습니다만 - 답신을 씁니다.
사실은 뭔가를 가는 행위도 자중하는 터라(저는 늘 의문이었어요. 허리가 이렇게 가늘어야지, 손목이 이렇게 가늘어서 뭣에 쓴단 말입니까? 일 조금만 하면 갖은 엄살과 고통을 호소하는 이 젓가락만도 못한 손모가지…), 이제는 원두조차도 분쇄한 것을 구입하는 실정이지요… 물론 전동 그라인더를 구비한 지 오래입니다만. 그마저도 귀찮아진… 핸드밀의 낭만, 그거 뭔데요. 먹는 건가요.
각설하고.
음- 저 역시 수포단의 멤버로서 필화 님의 고충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을 향한 H선생님의 일편단심 지고지순한 순정을 아주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오면… 아. 안 되겠습니다, 굳이 이 말씀을 전해 올리지는 마십시오, 왠지 그 이후의 일이 조금 무서워지려고 합니다. 제 인생에 수학 강의는 더 이상 원치 않습니다…
그나저나 이번엔 답신이 조금 늦었지요. 편지를 보자마자 책은 바로 떠올랐는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빨리 안 써지더라고요. 오늘도 그냥 흘려보내면 안 될 것 같아 일단은 각 잡고 앉았습니다만 말라르메 님의 공포가 제게도 전염된 듯한 기분이, 으음.
오에 겐자부로, 대단한 분이시군요. 아드님이신 히카리 군의 이야기는 저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는데요. 한 인간이 개인으로서도, 부모로서도 그런 위대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 주셨다는 데에는 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지만, 과연 그것이 우리 - 어쩌면 저 한정일지도 모르지만 - 같은 필부에게도 가능한 이야기인가 조금 아득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저는 지금 이 순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냥 이렇게, 하고 싶은 일들과 해야 하는 일들의 균형을 맞추며 어떻게든 지속해 나가는 것. 하루하루의 틈새 사이사이에 감정과 느낌을 촘촘히 부어 넣어 나라는 개인을 풍부하게 만들어 나가는 것.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하는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람들과 의사소통 하기. 이 세 대목이 저의 눈길을 확 끌어당겼어요. 나를 가장 고민스럽게 하는, 그럼에도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도록 돕는 질문들 아니겠습니까?
이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인생은 꽤 괜찮을 것 같지 않으세요?
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고, 오늘의 책을 보여드려야겠네요.
《The Town of Turtle》이라는 그림책입니다.
《The Town of Turtle》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오진 않았어요. 마음이 간질간질해지는 아주 사랑스러운 책이에요. 글쓴이는 미셸 쿠에바스라고 하는 분인데 이 분의 책은 몇 권 출간된 것이 있네요. 이 책을 library sale때 구입했는데 (저는 한국에도 라이브러리 세일이 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불가능하리라는 걸 너무도 잘 압니다) 그래서인가 해당 도서관의 사서가 붙여두었던 추천글이 여전히 표지에 붙어 있어요. 스티븐이라는 사서님이, 기막히게 아름답고, 몽환적이고, 상상력이 넘친다. 보물 같은 책이다- 라고 써두셨네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모든 변화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첫 장에 홀로 외로운, 어딘가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거북이가 하나 보이고,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어요. 거북이는 마치 12월의 빈 새둥지처럼 텅 빈 세상의 한 구석에서 살고 있었어요. 거북이의 유일한 절친한 벗은 그의 그림자였죠. 그림자야, 여기선 네가 마치 물웅덩이처럼 보이는구나, 거북이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거북이가 뭘 하느냐고요? 거북이는 껍질 속에 틀어박혀 외로움을 곱씹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거북이는 고독을 되새김질하는 대신, 좀 더 아름다운 집을 갖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거북이는 공상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에 나섭니다.
껍질을 예쁜 색으로 칠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데크도 하나 놓고, 정원을 꾸밀 마음도 먹죠. 그러니까 거북이는 Life is pathetic, and so am I. 이런 식으로 자신을 가둔 것도 아니고, 세상을 조소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스스로를 조금씩 바꾸어나가는 쪽을 선택한 겁니다. 처음부터 엄청나게 큰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에요. 그저 자기에게 제일 가까운 곳에 있던 껍질을 예쁜 색으로 칠한 것이 답니다. 하지만 모든 변화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죠.
앞선 라운드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조소와 빈정은 아주 쉬운 대안입니다.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은 심지어 파괴적이기까지 하죠. 소통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요. 자기 자신을 다듬는 일부터.
… 지금 막 세 문단 정도를 지웠습니다. 최근의 뉴스들로 인해 감정이 격앙돼 있던 상태에 기름을 부은 격이라 지나치게 감정적인 문장을 쓴 듯해서요.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할게요. 필화 님의 응원과 격려 덕에, ‘그래 난 아직 책 좀 더 사도 괜찮은 거였어!’ 하며 두 주먹 불끈 쥐고, 열심히 카드를 그은 근 한 달간의 실적은 실로 놀라워서 50여 권이 순식간에 쌓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로 또 그만큼 책을 떠나보내야 한단 말이죠. 저는 지금 머리를 쥐어뜯고 있습니다. 필화 님이시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
소설책을 정리한다.
그림책을 정리한다.
논픽션(과학|사회학|언어학)을 정리한다.
만화책을 정리한다.
사람이 누울 자리만 있으면 되지, 책을 왜 버려?
자신의 고독을 탈피하기 위하여 한 마리의 작은 거북이 했던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담화였습니다. ㅎ
P.S. 보스가 출장 간 날을 어린이의 날이라 부르셨단 말이죠. 흠. 저라면 지금 제게 보스는 이 집안에서 저와 성씨가 다른 인구 전원인 까닭에 ㅋㅋ 필화 님의 질문의 의도를 제 맘대로 곡해해서, 저 홀로 남은 날은 oh yes home alone day, 또는 네잎클로버의 날로 명명하겠습니닷.
드디어 가을 바람이 붑니다.
담화님, 반갑습니다.
요즘 제가 사는 아파트에 롤스로이스 한 대가 자주 보여요. 제가 사는 동네는 이른바 강남이라든지 하는 부자동네가 아니므로 이 차는 주차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게다가 차가 정말 크고 하얗기에 문을 열면 교황님이 내리실 것 같이 생겼어요.(네 어이없죠. 압니다.)
아무튼 오늘 아침에도 이 차를 보고, 이 차 값이면 책을 몇 권이나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죠. 요즘 책값이 비싸니 대~충 평균 15,000원으로 잡으면 대략 3만 7천 권 정도 구매할 수 있더라고요. 영화평론가 이동진 님의 서재 파이아키아에 장서 2만 여 권이 있다 하니, 3만 7천 권이면 집에 보관은 어려울 것 같죠? 또, 이 동네 도서관에는 8만 8천 권, 국회도서관에는 680만 권이 있습니다. 그러니, 한 달에 50권. 일 년에 600권 정도는 소장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저라면 50여 권을 산 대신 다른 책을 버리거나 내가 누울 자리 이상의 공간을 포기하기보다는 수납력이 좋은 책장을 사겠습니다. 후후훗
이쯤에서 짚어봐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머릿속에는 몇 권이나 저장되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초능력이 있다면 읽은 책을 전부 기억하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합니다.(물론 순간이동 능력도..) 물론 그랬다가는 과잉기억증후군으로 고통스러울지도 모르니, 책 읽고, 독후감을 쓰고, 이렇게 책에 관한 글들을 쓸 수 것으로 감사히 여기며 겸허히 살겠습니다.
《The Town of Turtle》이라는 책은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스스로를 돌본다니, 무척 다정하고 교육적인 동화책이군요. 아이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자랑스레 여기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어른이 되면 조금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수시로 남과 비교하고선 금세 자신이 걸어온 길을 포기해버리기도 하니까요. 정량적인 수치로 자신을 비교하고 채찍질하기보다는 감각과 경험으로 남겨둔다면 인생은 훨씬 풍요로울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책입니다. 스페인의 움베르토 에코라 불리기도 하는, 《뒤마클럽》을 쓴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작가가 쓴 《남부의 여왕》이라는 장편소설입니다.
《남부의 여왕》
거리에서 환전상을 하던 여성이 어떤 일을 계기로 마약 카르텔의 여왕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책입니다.
아 물론 제가 마약을 옹호하자고 이 책을 추천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마약은 구경은커녕, 호기심도 갖지 마세요! 우리에게 하얀 가루란, 전을 부칠 밀가루 뿐인 인생으로 마무리합시다.)
저자는 글을 쓸 때 ‘전장에 홀로 남겨진 패잔병’이라는 설정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 책도 마찬가지죠. 어느 날 주인공 테레사는 남자친구가 조직으로부터 살해당했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어디선가 날아드는 총알들... 사랑하는 연인, 아름다운 집과 장식품들, 그리고 화려하고 즐거웠던 생활과 여성성마저 다 잃고 홀로 남겨진 테레사의 손에 남은 것은 자기의 목숨이 걸린 비밀장부 한 권 뿐입니다. 전장에서는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종이 쪼가리죠.
그녀는 그날부터 음모와 강탈, 암투와 배신, 폭력과 죽음, 불법적 돈과 거래가 오가는 마약 카르텔계에서 오직 타고난 자신의 배짱과 기지, 숫자에 대한 동물적 감각, 그리고 생존본능의 투지로 살아갑니다. 사실 손에 아무 것도 쥔 것 없이 거리에서 도망다니는 것과 다름 없는 삶입니다.
제가 이 책을 추천한 이유는 극한의 공포와 위기에서도 승부사의 재능을 걸고 배팅하고, 목숨이 달린 순간에도 끝까지 자신을 몰아붙여서 목적을 달성하고 마는 주인공의 심리 변화와 이 거대한 성장(?)의 서사에 주목해보고 싶어서입니다.
그녀는 분별력 있는 호기심으로 모든 사물을 훨씬 더 치밀하게 분석했다. 그래서 가끔 그녀는 구에로가 곁에 있었던 반쪽짜리 사진과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세 여인 속에 존재하는, 점점 더 커져만 가는 차이점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보곤 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사진 속의 젊은 여인과, 시간의 흐름 속에 세상의 다른 편에 와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테레사, 그리고 거울 속에서 두 여인을 지켜보고 있는 미지의 또다른 여인 속에 존재하는. p.179
그녀는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을 떠올립니다. 마치 자기 자신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말이죠.
“그날 밤 너를 죽여버렸어야 했어.... 바로 이 자리에서”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배어 있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교양 있고 객관적인 어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테레사는 미동도 않은 채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맞아요. 그랬어야 했어요.”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이제 제 차례예요. 어쩌면 당신은 대가가 너무 지나친 게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중략) 결국 그 모든 사람들의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니까요. 물론 저도 나름대로의 대가를 치를 거구요.”
“미쳤군.”
“아니요.” 테레사가 입구를 비추고 있는 불빛과 발그스름한 촛불 빛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미친 게 아니라 죽은 거예요. 당신이 알고 있던 테레사 멘도사는 12년 전에 죽었어요. 저는 그녀를 묻어주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거구요.”p.673
패배한 자의 유일한 구원은 어떤 구원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인용문 중)
마약 카르텔이라니 영화로밖에 접해보지 않은 세계의 이야기이지만, 이 <남부의 여왕>이라는 이야기 매혹되고 마는 것은 바로 매력적인 주인공 때문일 겁니다. 범접할 수 없는 보스로 살아가면서도 패밀리, 아이와 여자를 지키고, 불법 대신 합법을 행하려 하고, 지역 사회에 환원하고, 배신자는 처단하지만, 상관없는 일반인들은 지켜주는 등 지켜야 할 선을 지키려고 내적으로 투쟁하고 갈등하면서 패잔병에서 절대 보스로 살아남아가는 강한 주인공의 매력 말입니다. 그녀는 절대 포기하지 않죠.
정식 교육이라고는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가난한 동네에서 자란 그녀는 자주 책을 읽으며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빠져들곤 합니다. 그 중에서도 주인공 테레사의 삶을 대변해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트로이 전쟁에 대한 서적이나 아이네아스의 전사의 여행담 같은 옛이야기도 즐겨 읽었는데, 특히 아이네아스에 나온 ‘패배한 자의 유일한 구원은 어떤 구원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아주 감명 깊었다. p.536
아이네아스(Aeneas)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로마의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가 만들어낸 로마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죠. 아이네아스를 읽으신 분이라면 이 비유가 얼마나 찰떡같이 테레사의 삶을 묘사해주는지 아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이 서사가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지만, 아쉽게도 절판입니다. 줄거리가 궁금하신 분은 넷플릭스에도 시즌물로 방영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시즌5까지 나왔는데, 강인한 여주인공들이 아주 매력적이고 영상미도 좋답니다. 담화님은 보셨으려나요?
아 오늘은 편지가 길었습니다.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소설을 소개할 수 있어서 말이지요.
그나저나 집에 혼자 있는 날을 Oh Yes Home Alone Day라고 부르시다니! 크리스마스 때마다 등장하는 Home Alone도 생각나고 좋네요. 아이디어를 조금 빌려서 저는 가족들 아무도 없고 저 혼자 있는 시간을 HaHa day라고 부를까 봐요. (Home Alone, Hello Adulting) 후훗
그럼 저의 웃음과 함께 스물 세 번째 편지를 보냅니다.
바이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