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끼묘 Jun 25. 2020

고삐 풀린 망아지

두 번째 루푸스 활성기


 모든 것이 평온했다. 매일 같이 아프던 몸이 일 년 남짓한 시간에 빠르게 회복되는 걸 보고, '아~ 역시 젊으니까 좋네'라며 자만을 부렸다. 그리고 1년 동안 루푸스 치료로 인해 참아왔던 것들에 대한 보상 심리가 생겼다.


계속되는 저염식 식단으로 집 밥이 질려버린지는 오래되었다. "이제는 맛있는 거 많이 먹어도 돼"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그동안 참아왔던걸 터뜨려버렸다. 미뤄왔던 친구들과의 약속을 잡고 회, 닭발, 곱창 등등 닥치는 대로 먹어댔다. 그리고 자연스레 술도 한잔씩 하게 되었다.


루푸스 이전에는 두 달에 1~2번 정도 먹었던 술이었는데, 어느 순간 반주를 즐기고 있었다. 친구들과 같이 식사하면서 한 잔씩 즐기는 술이 마치  루푸스를 이겼다는 희열처럼 느껴졌다.


 또 집과 병원에만 갇혀있던 게 마치 트라우마처럼 떠올라 다른 곳이 필요했다. 단백뇨는 줄어들고 있었지만, 정신적인 회복은 꽤나 더뎠다. 그래서 루푸스임을 잊기 위해 내가 아팠던 흔적이 없는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매주 주말마다 새로운 장소를 찾기 위해 열심히도 돌아다녔다.

 

그리고 언제 또 아플지 모르는 강박에 하고 싶은 일도 많아졌다. 나에게 시간은 언제나 부족했다. 건강할 수 있는 시간이 영원할 거 같지 않았고, 시한부 인생이 이런 걸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인지 시간에 집착하게 되었다. 또 내 시간을 존중해주지 않는 사람들과는 자연스레 멀리하게 되었다. 습관처럼 약속을 깬다던가,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 그런 사람들.


루푸스를 잊고 살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공포심을 떨치기 위해 어느 순간 또 전처럼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정기 외래 날, 갑자기 떨어지는 백혈구 수치에 우선 면역억제제를 중단했다. 약 부작용인지 재활성기인지 판단하기 위한 의사 선생님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한 달 뒤 약을 중단해도 수치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환갑잔치를 일주일, 첫 가족 해외여행을 한 달 남겨두고 나는 두 번째 루푸스 활성기를 맞이했다.






 참 바보 같았다. 어찌 보면 뻔히 보이는 결과물이었다. 다시 찾은 건강을 어떻게든 잘 유지하려 했어야 했는데, 그깟 보상심리가 뭐라고 일을 더 키워버렸다. 온통 후회였다. 평소 먹지도 않는 술을 왜 마셨지? 원래도 자극적인 음식은 싫어해서 피했는데, 무슨 고집으로 기름기에 매운 것들만 골라 먹은 거지..? 다시 맞은 활성기에 심장이 요동쳤다.


내 수치를 본 의사 선생님께선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싸이톡산 다시 한번 해야겠다.."라며 입을 떼셨다. 그렇게 두 번째 하늘은 무너져 내렸다.


눈에 고여있던 눈물은 떨리는 손에서 바닥으로 조용히 떨어졌고, 침묵이 전염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난 싸이톡산의 경험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 당시 병실의 분위기, 냄새, 조명의 온기, 이불의 촉감까지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무서웠다.


 "선생님, 저 싸이톡산만은 정말 피하고 싶어요.."


 "왜? 많이 힘들지.. 그래도 어떻게.."


 "저 보다는..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해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싸이톡산의 가장 힘든 점을 뽑자면 나로 인해 힘들어하는 가족들을 보는 거였다. 싸이톡산을 맞기 위해 입원 날이 다가오면, 집안 분위기는 근심이 모여 차가운 얼음장이 되었다. 입원 때마다 가족들이 번갈아 가며 병문안을 왔었는데, 돌도 지나지 않은 조카가 올 때면 고모가 성치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첫째 조카에게는 미안한 게 너무 많다. 너무나 어여쁘고 소중한 아이에게 혹여나 몹쓸 내 병을 옮기기라도 할까 봐 많이 안아주지도 못했다. 루푸스는 누군가에게 옮는 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조카의 손을 잡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어린 조카에게 고모의 모습이 어떻게 기억될지.....



 "그럼 싸이톡산 말고, 스테로이드를 다시 써보자. 10알부터 어때?"


 "......., 일주일 뒤에 아버지 환갑잔치가 있어요. 10알 먹으면 또 심하게 부을 텐데..."


 "그래, 그럼 아버지 환갑잔치 끝내고 그다음 날부터 먹어보자 괜찮지?"



 온 친척들의 걱정을 받고 있던 터라 아버지 환갑잔치에서 건강해졌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때맞춰 활성기라니.. 내가 자처한 결과였지만 억울했다. 남들처럼 마음 편하게 먹고, 놀고 할 수는 없을까.. 그런 건 나에게 허락되지 않는 부분인가 싶었다. 항상 맘 졸이며 살아야 하는 게 운명이라면 그렇게 살아 무슨 의미가 있지? 라며 또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어갔다.




 


  환갑잔치 날, 친가/외가 할 거 없이 대가족이 모였다. 잔치 시작 전, 그동안 막내딸의 병원생활로 누구보다 마음 아프셨을 아버지께 큰 꽃다발을 드렸다. 아버지께 드리는 첫 번째 꽃이었다.


잔치 중간중간 날 보는 분들마다 몸은 좀 어떠냐며 한 마디씩 건네셨다.


 "네 괜찮아요~ 많이 좋아져서 이제 약도 안 먹는걸요!"


거짓말을 했다. 내일이면 다시 먹게 될 스테로이드 10알의 두려움을 그렇게라도 잊고 싶었나 보다. 모르면 몰랐지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을 너무나도 잘 아니까 겁이 났다. '이제 당분간 이런 맛있는 음식도 못 먹겠지?'라는 생각에 평소 먹지도 않는 디저트까지 몽땅 먹어치웠다.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속으론 오늘 하루가 끝나지 않게 해 달라며 기도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드렸다.


 " 아버지, 환갑 축하드려요.

저는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아빠한테는 애기이고 싶나 봐요. 그래서 아빠한테 어리광 부리려고 아픈 거 같아요. 그래도 젊고 힘 좋을 때 치료받는 거니까 잘 견뎌낼 거고, 나중에는 누구보다 건강할 거예요. 저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사랑해요. "라고..


.

.

.

.

.




 


 


 

 

 

이전 09화 잊고 살아야, 사라지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