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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실 Nov 03. 2019

왜 이래, 나 유럽 가는 여자야!

[와인] 타인의 눈에 비친 내가 진짜라고 믿는 내게

 550만 원. 여가비로 쓴 돈 중 가장 큰 금액이라 잊히지도 않는다. 18일 동안 프랑스 파리·니스, 스페인 마드리드·톨레도·그라나다·바르셀로나에서 유럽의 낭만을 만끽하는 데 쓴 비용이다. 아울러,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뼈 아픈 대가이기도 했다.






그냥, 무조건 유럽이었다.



 데뷔작 《가슴도 리콜이 되나요》 연재가 끝나면, 고생한 나를 위해 유럽 정도는 가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완결이 한참 남은 4개월 전, 덜컥 파리행 티켓을 끊었다. 오랜만에 가는 해외여행이기도 했고 이렇게 먼 길은 처음이었기에, 편하게 직항으로 예매하려고 했다. 진짜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가난도 습관인지라, 100만 원 훌쩍 넘는 금액을 결제하려니 손이 후들거렸다. 결국 직항보다 40만 원 저렴한 경유 티켓을 구했다. 20시간 비행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으나, 티켓 빼고 나머지는 쿨하게 결제할 거라며 자위했다. 왜 이래, 나 유럽 가는 여자야! 완결이 임박할 즈음, 친구들은 향후 계획을 물었고 그때마다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렇게 답했다.


 "유럽 가려구."


 고작 한 문장이었는데 그들은 엄청난 속도의 리액션을 쏟아댔다. 카카오톡 수신음으로 비유하자면 "카톡"이 아니라 "카카카카캌칵-카칵캌-카-카톡"이랄까. 유럽? 자유여행? 몇 박 며칠? 어디 어디 가? 유럽은 영국 in 파리 out이 좋은데. 언제 가는데? 5월? 날씨 좋을 때 가네! 비수기도 아니구. 역시 프리랜서는 이런 게 좋아! 정말 부러워!


 혹시 내가 모르는 매뉴얼이 어디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친구들은 순서만 바뀌었지 대체로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유럽을 가는 것도 좋았고 누군가 나를 부러워하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후의 여행 준비에 영 손이 가지 않았다. 숙소, 교통, 입장권 등 알아볼 게 산더민데, 바쁘다는 핑계로 출국 한 달 전까지 모르쇠를 뗐다. 나는 해외를 갈 때면 돈을 허투루 쓰는 게 아까워 엑셀에 분 단위로 일정표를 짜는 스타일이었다. 비상금까지 고려해 예산을 짜고 그 안에서 소진해야만 비로소 마음 편해지는 스타일. 숙소도 무조건 얼리버드 예약만 했다. 그래야 저렴하니까. 그런데 건방지게 시간 낭비하며 돈을 공중에 흩뿌리고 있는 상황이라니! 작업을 하는 와중에도 이래도 되나 싶긴 했지만, '거 봐, 내가 나머지는 쿨하게 결제할 거랬잖아' 하며 넘겼다. 돌이켜보면 그게 여행 가기 싫다는 전조 증상이었다.






의외로 일정은 뚝딱 완성됐다.



 도시마다 현지 일일투어로 며칠 채우고, 하루에 명소 한 두 개만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나머지는 그때그때 상황따라 맛집이나 관광지를 검색하기로 했다. 혹시 예산이 부족하면 까짓 거 신용카드로 긁으면 된다는 야심 찬 계획까지 덧붙였다. 역시 돈이 좋긴 좋구나!


 파리의 한 식당에서 인종 차별을 당한 것만 빼면 음식, 풍경, 날씨, 관광까지 모두 완벽한 여행이었다. 제일 좋았던 도시는 니스였는데 청량함 가득한 그 파란 숨결들이 참 좋았다. 종종 조식까지 거르며 잠을 자는 호사를 누렸고, 느지막이 식당을 찾아가 브런치를 즐겼다. 여행 내내 나는 느린 사람이었다.

 정해진 규칙 따위 없는 여행이지만 그럼에도 철저하게 지킨 것이 있었으니, 바로 술이다. 나는, 낮에도 자유롭게 반주를 즐기는 유럽의 식문화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유럽에 왔으면 유럽법을 따라야 하므로, 어떤 식당을 가든 무조건 술을 시켰다. 맥주는 한국에서 자주 마셨으니까 여기서는 와인을 시키는 게 인지상정, 은 훼이크고, 유럽에 왔으니 와인 정도는 마셔줘야 기깔날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 잠들기 전, 사진을 드라이브에 백업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소매치기로 소지품을 모두 잃어버릴 것을 대비하기 위함이었지만, 나는 그냥, 그 날 찍은 사진 속에 있는 내가 좋아 보였다. 캬! 역시 돈이 좋구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타지에서 고생했을 딸이 걱정된다며 웬일로 부모님이 공항까지 마중 나오셨다. 때론 긴 여행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애틋하게 만드는구나 하며 감상에 젖은 것도 잠시,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엄마가 한 마디 했다. "유럽이 좋긴 좋나 보다. 피골이 상접해서 올 줄 알았는데, 어째 살이 더 쪄서 왔냐." 이상하다. 일 평균 18,000보 이상을 걸었는데, 그럴 리 없었다. 하지만 체중계는 그런 일이 여기 있다며 단호하게 진실을 가리켰다. 여기 2kg 추가요!


 며칠 후 친구들을 만났다. 밥을 먹고 카페에 가고 여행지에서 사 온 소소한 선물을 전해주고 나면, 다음 레퍼토리는 똑같았다. "여행 어땠어?" 여러모로 완벽한 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너무 좋았어!"라고 대답할 때마다 손 끝이 따끔거렸다. ‘혹시 안 좋았던 거 아냐?’ 하는 의심이 부풀어 오르던 어느 날, 똑같은 질문을 하던 다른 친구에게 나도 모르게 "별로였어"라고 말해버렸다.


 사실, 알고 있었다. 유럽을 가고 싶은 이유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는 그저 대학생 때 못 가 본 유럽을 이번에야말로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내가 대학 원서를 쓰면서 고려한 건 딱 2가지였다. 하나, 학비가 저렴할 것. 둘, 통학 가능할 것. 다행히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학교에 합격했지만, 매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려 쥐어짜듯 대학 시절을 보냈다. 아르바이트, 장학금, 공모전, 학자금 대출, 아빠 찬스로 돌려 막는 그 시간 동안, 친구들의 SNS는 이국적인 풍경들로 채워져 갔다. 나도 어떻게든 돈을 모아 떠나볼까 싶었지만, 유럽의 낭만이 등록금 고지서만큼 시급한 문제는 아니었다.


 이윽고 시간도 돈도 넉넉히 잡고 떠난 유럽 여행. 오래 기다려온 만큼 충분히 설레고 매력적인 시간들이었으나, 그게 다였다. 지랄 중의 상지랄은 돈지랄일지니, 그렇게 써대는데 안 행복할 리 있나. 나름 품격 있는 식사를 하고, 매끼마다 술을 곁들이고, 자고 싶을 때까지 자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엔 바닷바람 맞으며 멍하게 앉아 있고. 이런 삶이라면 그곳이 유럽이든 한국이든 행복할 게 분명했다. 그랬다. 알고 보니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굳이 해외나 유럽으로 떠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쉬는 게 좋았고 여유 부리는 게 좋았고 그 시간들을 사랑했다. 그 속도 모르고, 남들 다 간 유럽 나만 못간 게 억울하다며, 남루한 추억을 보정하고 있었다.






 다음웹툰에서 지난 추석 선물로 와인과 육포를 보내주셨다. 문득 유럽에서 매일같이 마신 와인들을 그려봤다. 고급스러운 음식과 영롱한 와인잔을 한 컷에 담기 위해, 한참 동안 셔터를 누른 후에야 식사를 했었다. 지금이야 당분간 술 마실 생각이 없다지만, 다시 술을 시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해 고이 모셔둔 이 와인부터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맞다. 집에 와인잔 하나밖에 없는데 어떡하지. 에라 모르겠다. 그냥 머그컵에 따라 마셔야지. 귀찮으니까 컵에 한 가득 부어 마실 거야. 와인이 중요하지 잔이 중요한가?


 '대세', '인싸', '아싸' 등 사람 사는 모습을 구분 짓는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고 있는 요즘이다. 대세에 따르지 않으면 '아직 그것도 안 하고 뭐 했어?' 하는 토끼눈을 마주하기 십상이고, 인싸가 되지 않으면 왠지 촌놈이 된 것 같아 쭈굴쭈굴해진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것들에 둔해지기 시작했다. 남들이 하는 건 따라 하지 않겠다는 반항심이 든 건 아니고,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싶다. 마라도 유행이 한참 지난 뒤에야 맛봤고, 새로운 불닭 시리즈가 나왔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누군가 어렵게 구했다며 선물해 준 꼬북칩도 맛있게 잘 먹긴 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인싸든 아싸든 결국 'side에 있다'는 건 변함없다. 안쪽에 있든 바깥쪽에 있든 각자의 방향은 있다는 것. 나는 그저  결대로 살고 싶다.







브런치북 <글러 먹긴 했지만 말아먹진 않아서> 가 <슬프지 않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법>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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