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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실 Nov 16. 2019

여자면 조용히 술이나 따를 것이지

[어묵탕] 나의 퇴사 연대기

 대학 졸업 후 5년 조금 안 되는 직장생활 동안 4개 회사, 3개 직무를 경험했다. 온라인 광고대행사 2군데에서 광고기획자, DB 서비스 업체에서 웹 기획자, 소셜벤처에서 홍보기획자까지. 좋게 말해 '경험'이지 솔직히 '난 왜 한 곳에 오래 머물지를 못하지?', '어디 문제 있는 거 아냐?' 하며 자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에는 늘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10년 후 내 모습이 저렇다고?


 대학 시절, 뒤늦게 카피라이터를 꿈꿨다. 말맛나는 글귀를 볼 때마다 고놈 참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카피라이터는 T.O가 별로 없었고, 차선책으로 광고기획자로 방향을 틀었다. 다행히 기획 업무는 나랑 결이 잘 맞았다. 그래서일까.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광고를 하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매일 나서는 출근길이 설렜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대기업 인하우스 광고대행사의 온라인 광고를 담당하는, '대대행사'에 가까웠다. 때문에 오롯이 '내 것'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지금처럼 세련된 디지털 캠페인을 하던 시절도 아니어서, 업무의 90%는 배너 배리에이션이었다. 이 와중에 PT에도 계속 참여했는데, 1년 채 안 되는 직장생활 동안 우리 팀이 수주한 프로젝트는 단 1건이었다. 업무 강도에 비해 성취는 없는 삶. 그때서야 주위를 둘러봤다. 3년 차든 5년 차든 10년 차든 늘 야근이 일상이 된 공간에서, 상사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10   모습이 저렇다고? 말도  !" 그래서 퇴사했다. 몇 개월만 참고 퇴직금이라도 받고 나가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쿨하게!




 여자면 조용히 술이나 따르라고?


 하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결국 또 온라인 광고대행사로 이직했다. 전 직장 사수가 추천해준 신생 회사였다. 게임 전문 대행사이다 보니, 업무 중 일부가 '광고주 게임 플레이'일 정도로 사내 분위기가 유연했다. 쬐끔 오른 연봉, 아늑한 사무실, 좋은 사람들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딱 하나, 팀장만 빼고.


 그는 늘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날 지각을 했다. 꼬꼬마 AE였던 내게 지각은 PT 준비로 밤샐 때나 하는 것이었기에, 그의 지각은 경력에서 나오는 특권이라 생각했다. 그런 날이면 점심은 늘 뜨끈한 국물요리였다. 어째 해장의 나날 같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워낙 아재 입맛인 나는 불만 없이 맛있게 먹어댔다. 그는 편한 사이를 자처하며 사적인 이야기도 종종 꺼냈는데, 당시 그의 최대 관심사는 전 직장에서 만난 신입사원과 어떻게 사귈 수 있을까였다. "마실 씨~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니까 뭐든 편하게 말해!" 그는 말끝마다 꽉 막힌 사람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나는 알았다. 꽉 막힌 그와는 절대 친해질 리 없다는 것을.



 문제는 역시 술이었다. 퇴근 후 간단히 한 잔 하자며 모인 자리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마지막이라며 들른 오뎅바에서 빌어먹을 사건이 발생했다. 취기가 오른 팀장이 사수에게 자꾸 되도 않는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아무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수 편을 들어보겠노라 신입의 패기로 "팀장님,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내일 이야기하시죠" 했다. 그러자 그가 빽 소리를 질렀다. "신입이 어디 말하는 데 껴들어?" 꽉 막힌 사람 아니니까 편하게 말하라더니 그새 위계질서를 재고 있었구나 하며 놀란 것도 잠시, 그는 "여자면 조용히 술이나 따를 것이지!" 하고 어퍼컷을 날렸다.

 

 그 길로 바로 집에 온 나는 핸드폰을 끄고 이틀 무단결근했다. 다시 찾아간 사무실에서 팀장과 면담을 가졌지만 그는 자신의 잘못보다 나를 나무라는 데 더 바빴다. 내가 조용히 사표를 내밀자 그때서야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술김에 말실수를 한 거니 한 번 유연하게 넘어가라고, 마실 씨도 이렇게 퇴사하면 이직할 때 모양새가 안 좋다며 회유했지만, 그때의 난 내 자존심이 더 중요했다.




 '좋은 상사'와 '좋은 사람'은 다르다고?


 퇴사야 쿨했는데 현실은 쿨하다 못해 냉혹했다. 더 이상 광고 쪽으로 발 붙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야 어쨌든 무단결근한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으니, 레퍼런스 체크를 할 때면 불리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 뻔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전직을 고민했다. 운 좋게 퇴사 2개월 만에 DB 서비스 업체에서 웹기획자로 터를 잡았다. 그 회사는 때마침 홍보 TF를 꾸리려던 찰나였고 광고업에 종사한 적 있는 중고 신입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무난한 직장생활 중에 처음으로 존경할 만한 상사를 만났다.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행이 몸에 밴 사람, 꼼꼼한 피드백과 명확한 가이드를 내려주는 사람.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내뿜는 그를 보며, 이런 회사라면 오래 다닐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나는 웹 기획과 홍보 TF 업무를 함께 담당하게 되었다. TF에서 유일한 사원이었던 나는 주로 회의록 및 보고서 작성, 자료 정리 등을 도맡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다음 해 홍보 계획서 기안을 '내 이름'으로 올리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제가요?" 회의록도 보고서도 아닌 연간 계획서를? 당황해하는 내게 TF 팀장은 "어차피 회의는 같이 할 거고,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마실 씨는 그냥 내용만 정리해서 올리면 된다"라고 했다. 까라면 까라지 뭐 별 수 있나. 마치 바지사장이 된 기분으로 '우리'가 함께 만든 연간 계획서를 올렸다. 그런데 인트라넷에 심상치 않은 코멘트가 달리기 시작했다. '작년과 다를 게 뭐죠?', '조금 더 특별한 기획을 기대했는데 아쉽군요'. 기어코 기안이 반려되자 긴급히 홍보 TF가 소집됐고, 다시 수정한 기안을 TF 팀장이 올리고 나서야 모든 결재가 이루어졌다.


 황당한 일은 그다음 날 일어났다. 웹기획팀 팀장님이 나를 부르곤, 멋쩍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마실 씨는 홍보 일을 하지 않게 됐어. 당분간 웹 기획 업무만 담당하게 될 거야." 어이가 없네. '우리' 함께 만든 기획서는 고작 사원급인 '' 혼자만의 책임으로 묻혔다. 그도 그럴 것이 TF 팀장은 회사 대표의 친구였다. 힘들게 자문으로 모셔온 그에게 책임을 묻기는 애매하니, 만만한 사원급의 무지함으로 몰아간 게 분명했다. 억울하고 화가 나서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팀장님께 퇴사를 고했다.


 짧은 직장생활이었지만 업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존경할 만한 상사를 만나 너무 행복했다. 그 상사가 바로 팀장님이다. 하지만 회사가 나를 원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솔직히 내가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이도 저도 쓸모없으니 나가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하며 그렁그렁 눈물을 참고 있는데, 의외로 훌쩍이는 소리는 반대편에서 흘러나왔다.


 "마실 씨, 미안해..."


 세상에, 팀장님이 울고 있었다. 그가 섬세한 남자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 앞에서 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순간, 별 생각이 들었다. 입사 면접에서 전 회사 퇴사 사유로 성희롱을 답한 내가 또 불명예스러운 일로 퇴사하는 게 안쓰러워서 우는 걸까. 딱 봐도 사내정치에는 숙맥이던 그가 결국 나의 좌천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일까. 어쨌든, 나를 위해 울어주는 상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왠지 모를 벅찬 감정이 올라왔다.


 송별회와 인수인계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퇴사하는 날. 친구가 운영하는 소셜벤처로 다음 행선지를 정했기 때문인지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퇴사 축하주를 마시자는 친구의 연락에, 당시 한창 유행하던 오뎅바에 갔다. 오뎅바라면 지긋지긋하지만, 그 거지 같은 술고래 팀장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홀가분한 상태였다. 앞으로 뭐 해 먹고 살 거냐, 소셜벤처 돈 안 될 텐데 괜찮겠냐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그래도 좋은 상사를 만나 나름 괜찮은 직장생활이었다"라고 소회를 풀었다. 그러자 감상에 젖은 내가 무안할 정도로 친구가 버럭 화를 냈다. "야! 좋은 상사는 무슨! 그냥 좋은 사람이지!" 그의 논리는 이랬다.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결국 너의 좌천과 퇴사를 막을 힘은 없는 나쁜 상사였다고. 너 대신 울어준다고 좋은 상사인 건 아니라고. 좋은 상사라면 끝까지 너를 지켰어야 한다고. 그는 단지, 좋은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는 정말 '좋은 상사'가 아니었을까. '좋은 사람'과 '좋은 상사'는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는 걸까. 만약 내가 '좋은 상사'를 만났다면 어디든 진득이 머물 수 있었을까. 아니, 정말 '좋은 상사'가 존재하기는 할까.


 나는 이후 이직한 소셜벤처에서조차 퇴사(폐업)하게 되면서, 돌고 돌아 초등학생 때부터 꿈꿔 온 만화가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 프리랜서의 삶은 만족하냐고? 물론! 100점 만점에 95점 정도랄까. 혼자 일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우울이 널 뛰듯 놀러 온다는 것 빼고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업무 만족도 및 성취도, 자기 계발 의지, 수입 안정화까지 여러모로 만족스럽다. 무엇보다  업엔 존경할 만한 동료가 너무 많다. 오롯이 작품으로만 승부하는 세계에서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다. 더불어 존경하는 작가에 빗대어 자신의 미래를 점치지 않는다. ‘상사의 오늘’을 ‘나의 내일’로 그리던 '직장인 마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좋은 상사가 없었어"라는 이유로 일을 때려치울 수 없는 프리랜서의 세계에 들어와 버렸다. 다행히 홀로서기는 꽤 자신 있는 분야니까, 이번엔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브런치북 <글러 먹긴 했지만 말아먹진 않아서> 가 <슬프지 않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법>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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