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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실 Nov 10. 2019

이 서비스는 '모멸감 포함가'인가요?

[레몬청] 갑질의 시대에 선 을들의 외침

 프리랜서가 되기 전 마지막으로 다닌 회사는 학교 밖 청소년들과 함께 수제 레몬청을 만들던 예비 사회적 기업이었다. 당시 다니던 직장에서 '부품으로써의 조직원'에 회의를 느끼던 차였고, 돈보다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선택한 길이었다. 동갑내기 4명이 대표 아니면 팀장이었던 놀라운 직권 남용의 현장에서, 나는 홍보를 담당했다. 소기업이었기에 홈페이지 및 SNS 관리, 체험단 관리, 간단한 디자인, 보도자료 작성 및 배포, 고객 관리 등 잡다한 일을 했다. 그중 가장 스트레스받는 일은 고객 관리였다. 특히 화가 머리 끝까지 뻗친 고객과의 통화는 유독 얼굴 붉히며 씩씩댈 일이 많았다.


 극성수기인 5월의 어느 날. "다음날 선물하려 주문한 상품이 파손되어 도착했다"며 격분한 고객의 전화를 받았다. 퀵으로 다시 보내드리겠다고 달래 보았지만, 그녀는 일을 이 따위로 하냐며 되려 목청을 더 높였다. 무조건 죄송하다는 말로 고객을 진정시키는 것이 최우선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 날따라 너무 억울했다. 몇 주째 제조만 하느라 몸이 축난 상태였고, 퇴근 후에는 문서 작업을 하느라 마음마저 지친 상태였다. 그래도 죄송하다고 연신 굽신거려야 통화가 끝날 기세였기에 "고객님,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고갱힘, 제송합....크흡..."하고 울어버렸다.


 갑작스러운 읍소에 당황해하는 고객의 표정이 제조장까지 전해졌다. "아니, 울리려던 건 아니고... 내가 말이 심했죠? 어떡해. 울지 마요, 아가씨. 너무 속상해서 그랬어." 고객은 젊은 처자가 고생이 많다며 위로하고 있었고, 그 위로가 뭐라고 마음이 놓인 나는 "죄송해요. 제가 눈물이 많아서..." 하며 덜컥 진심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힘내라는 응원과 덕담까지 나누며 훈훈하게 통화를 마무리하자, 아이들은 내 뒤에서 "누나, 눈물이 많아서 어떡해요!" 하며 놀려대고 있었다.


 그동안 고객과 대면할 일이 없던 내게 전화 상담 업무는 꽤 특별한 일이었다. 말로 상처 주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불평·불만에 욕까지 섞어 뱉는 사람, 어느 순간 상품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판매자에 대한 인격 모독으로 깎아내리는 사람, 죄송한 마음에 손편지까지 써서 새 상품을 직접 배송하면 파손된 상품과 쓰레기를 툭 건네고 들어가는 사람..... 그들은 서비스가 기대에 못 미치면 ‘모멸감’으로 상대를 응징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쓰디쓴 모멸감을 맛보고 나서야, 부모님의 삶을 반추했다. 늘 낮은 곳에서 일하던 그들은 더한 모멸감으로 긴 세월을 버텼을 것이다.






 아빠는 택시 기사라는 이유만으로 손님들에게 당연한 을이요,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찍혔다. 어느 늦은 밤, 유흥업소 앞에서 만취한 20대 젊은이를 태웠다. 무슨 사달이라도 날 것 같아 승차 거부를 하려 하자, 옆에 있던 아가씨가 막무가내로 그를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아빠의 우려대로 그 청년은 자신이 누군지 아냐며, 어느 초등학교 교사라고 꽥 소리를 질러댔다. 나아가 고학력자인 자신과 달리 운전 따위를 하고 있는 아빠가 불쌍하다며 폄하하기 시작했다. 무식한 놈이 길도 못 찾는다며 뒤통수를 후려치기까지 하자, 결국 아빠는 경찰을 불렀다.


 놀랍게도 그는 경찰서에 도착하는 동안 알코올을 분해하는 초능력을 부렸고, 자신의 직업을 드러내며 그런 적 없다고 발뺌하는 연기력을 선보였다. 경찰은 점잖은 선생님이 그럴 리 있겠냐며 아빠 말을 유야무야 넘겼고, 집으로 돌아온 아빠는 직업 때문에 차별받은 것 같다며 풀 죽어 있었다. 똑 부러진 여동생은 우선 그 새끼가 진짜 교사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가 술김에 나불댄 초등학교 홈페이지를 살폈다. 세상에,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진짜 교사였다! 저런 놈에게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맡긴다는 게 한탄스러웠지만, 먼 미래의 일보다 그 새끼를 엿 먹이는 게 급선무였다.


 여동생은 폭행 및 공무원 품위 훼손을 주요 골자로 사건 일지를 기승전결로 정리해 국민신문고에 올렸다. 그제야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그들은 아빠를 차별할 의도는 아니었다며 사과했고, 부디 신문고에 일이 잘 처리되었다는 코멘트를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그 새끼의 진심 어린 사과를 기다렸지만, 콧대 높은 선생님은 직접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 70대 노모만이 그의 굽은 허리를 더 굽혀가며 끊임없이 합의를 부탁할 뿐이었다.






 요즘 카페나 식당에 가면 “우리 직원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라는 문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감정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한 여러 장치가 마련되고 있다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화장실 청소부인 엄마는 분실 신고가 들어오면 횡령을 의심받는 첫 번째 대상이다. 때론, 쓰레기봉투에 숨긴 거 아니냐며 의심하는 고객 앞에서 모아둔 쓰레기를 모두 뒤엎으며 스스로 결백을 증명해야 했다. 그저 유니폼에 불과한 청소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향해 쓰레기를 던져도 할 말이 없다. 다른 섹션에 분리수거를 잘 좀 해달라는 부탁을 해도,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냐며 삿대질을 받는다. 그래도 엄마는, 역시 할 말이 없다. 그저 먹고살려고 버틴다며 우는 엄마 앞에서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감정노동자의 인권 따위 생각하기 귀찮다면, 차라리 그냥 노무의 대가로만 치부했으면 좋겠다. 모멸감을 각오하고 살아가는 이는 없을 테니, 감정은 철저히 배제한 채, 얄짤없이 주고받는 것만 계산하는 삭막한 관계였으면 좋겠다. 삶의 무게가 지폐의 무게보다 가벼울 리 없다. 그러니 부디, 그 누구도 타인에게 상처 줄 권리도 타인으로부터 상처 받을 이유도 없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브런치북 <글러 먹긴 했지만 말아먹진 않아서> 가 <슬프지 않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법>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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