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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실 Oct 16. 2019

안녕, 나의 작은 아빠

[삼겹살] '아빠'가 '아빠의 엄마'를 떠나보내던 날

낯선 풍경이었다.


 곧 환갑을 목전에 둔 아빠는 그곳에서 3일 내내 막내로 불렸다. 내겐 큰 산 같던 아빠가, 4명의 큰 아빠와 1명의 고모 사이에서 이름도 누구의 아비도 아닌 "막내야"로 불리는 것이 영 익숙지 않았다. 낯선 것은 장례식장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곡소리보다는 대화와 웃음소리가 더 일렁였던 공간. 아빠는 "자식들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남겨둔 '호상(好喪)'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랬다. 오랜만에 대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서로의 안부와 반가움을 전하기 여념 없었다. 무엇보다 조의금 문제로 서로 날 선 혀를 내두르지 않는 젠틀한 어른들이었다. 납골당으로 이동하다가 들른 설렁탕집에서도 어른들은 젠틀하게 뚝딱 한 그릇을 비워냈다.


 할머니의 가물은 몸이 한 줌 재로 변하던 순간에도, 맺힌 눈물을 가볍게 훔쳐 넘길 뿐 소리 내어 우는 이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땅이 꺼져라 오열했던 그 옛날 할아버지의 죽음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이것을 호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구순의 노모를 보내는 어른의 모습은 저렇게 덤덤하구나' 하며 남몰래 경외심을 느끼고 있었다.






 할아버지 납골함 옆에 나란히 할머니를 모시고, 식구들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바라봤다. 이어 기도하고 묵념하고 서로에게 다시 인사를 나누며 여정을 마무리하던 차였다. 그래, 그 차에, 상복을 반환하러 장례식장으로 돌아가던 버스 안에서, 아빠는 갑자기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꺼어어어억. 흐으어엉. 흐읍... 끄억...컥컥..."


 흡사 이름 모를 포유류의 울음소리처럼, 45인승 버스를 가득 채운 그 울림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타인에게 공격을 가할 기세는 아니었지만, 드문드문 끊기는 숨소리마다 “건드리지 마시오” 하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왜, 어느 타이밍에, 내내 웃던 당신이 울게 된 건지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유를 묻진 않았다. 가끔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만 작게 새어 나올 뿐이었다.


 순간, 박하맛 울렁임이 목을 타고 코 끝까지 차올랐다. 뒤늦게 할머니의 빈자리를 체감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송구스럽게도, 처음 마주한 아빠가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작은 나의 아빠가.






 아빠는 우는 법이 없었다. 사업이 망해 모든 이가 등 돌리고 외톨이가 되었을 때도, 그래서 처자식 몰래 산으로 목을 매러 갔던 일화를 털어놓았을 때도, 아빠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할아버지 장례식을 제외하고 통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또 운다. 본 적 없던 모습이라 낯설 만큼, 그 낯섦이 슬플 만큼.


 장례식장에 도착해서야 겨우 울음을 멈춘 아빠는 언제 그랬냐는듯 말끔히 옷을 갈아입곤 식구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조용한 택시 안에서, 나는 머리를 짜낸 끝에 겨우 한 마디 던졌다.



"삼겹살 드실래요?"




 아빠의 소울푸드인 삼겹살은 그의 거친 포효를 쏙 들어가게 할 만큼 기가 막혔다. 어린아이 달래듯 아빠의 앞접시에 한가득 삼겹살을 담다가 ‘아차’ 하고 엄마 접시에도 비슷한 높이의 고기산을 쌓았다. 불판을 갈아야 할 만큼 적당히 배를 채웠을 때, 아빠에게 난데없이 눈물이 난 이유를 물었다.


 "못한 게 너무 많아서……."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다. 택시기사인 아빠는 매일같이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에 들렀다. 오죽하면 요양사가 당신의 이름을 외울 정도였고, 같은 병실에 있는 할머니들이 질투하니 자주 방문하지 말아 달라는 의사의 간곡한 부탁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못한 게 너무 많단다. 본인이 먹고살기 힘들어서, 할머니 건강하실 적에 좋은 옷, 맛있는 음식 한 번 대접 못 한 게 서럽고 죄송해서 난 눈물이란다.


 게다가 할머니는 아빠의 60번째 생일에 돌아가셨다. 그렇기에 아빠는 매년 돌아오는 그날마다, 당신의 탄생보다 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며 마음껏 기뻐하지도 축하받지도 못할 것이 자명했다.


 애석하게도, 나는 할머니와 각별한 추억이 없었다. 그래서 이기적이게도, 나는 할머니의 죽음에 빗대어 아빠와 나의 미래를 그렸다. 아빠의 마지막에 나도 저런 모습일까. 죽음은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으니, 아무리 준비된 이별이라도 결국 죄송한 마음만 품게 될까. "납골당은 죽은 자를 위하는 공간이 아니라, 남은 자의 슬픔과 죄책감을 덜어주는 곳"이라던 아빠의 말을 그때서는 이해하게 될까.






 언제 올지 가늠할 수 없는 먼 미래를 떠올리다, 이내 환풍기에 휘이 날려 버리곤 고깃집을 나왔다. 사거리 횡단보도를 기점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 길. 먼저 가라, 나는 됐다, 실랑이를 벌이다 눈치 빠른 본가 방향 신호등이 먼저 켜졌다. "들어가서 푹 쉬세요."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손을 흔들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작구나. 참 작구나.


 그러다 뭐 얼마나 걸었다고 파란불이 깜빡거리기 시작했고, 또 뭐 얼마나 바쁘다고 부모님은 순식간에 횡단보도를 빠져나갔다. 총총이던 두 점이 골목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바라봤다.


 깜빡. 깜빡.

 파란불은 아직도 빛나고 있었다.

 매정하게.









브런치북 <글러 먹긴 했지만 말아먹진 않아서> 가 <슬프지 않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법>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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