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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실 Oct 27. 2019

맛집 로드의 시작 : 가장의 품위를 지켜라!

[스테이크] '식구'의 위대함

시작은 을왕리였다.



 2014년 어느 여름밤, 아빠는 웬일로 외식을 하자며 을왕리로 택시를 몰았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얼결에 슬리퍼에 티셔츠만 덜렁 걸치고 간 길. 가족 모두 자기 일에 치여 사느라 집에서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때였다. 그래서일까. 술 한 잔 마실 줄 모르는 아빠는 고작 조개구이 향에 취해 사진을 찍자고 주사를 부렸다. 이 꼬라지에 사진은 무슨 사진이냐며 손사래 치는 다수를 뒤로 하고, 취기가 오른 독재자는 기어코 구린 조명과 후줄근한 옷으로 무장한 최악의 가족사진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그 날, 아빠의 카카오스토리에 "우리 가족~♡"이라는 글과 사진 몇 장이 올라왔다. 나는 사진 속에 박제된 못난이 삼 남매가 영 못마땅했다. 하지만 보증으로 날린 긴 세월 끝에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가족과 친구들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터라, 그러려니 했다. 이후 아빠는 본격적인 SNS 활동의 시작과 함께 '가족 모임 정례화'를 선언했다. 매월 가족을 위한 시간을 쪼개야 한다는 게 퍽 귀찮았지만 '효도한다 생각하고 까짓 거 한 번 참자'며 동생들과 무언의 동맹을 맺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당시 소셜벤처에서 일했던 나는 가치 있는 일을 하겠다며 최저 임금을 마다하지 않는 열혈 청년이었다. 여동생은 길고 긴 임용고시를 이어오던 때였고, 남동생은 대학 졸업반이었다. 그러니까, 평생 낮은 곳에서 일하던 부모님 수입까지 생각하면, 가족 모두 돈이 없던 때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아빠는 "가족 모임은 내가 쏜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난 직감했다. 가장의 품위는 맛도 있고 가격도 저렴한 '가성비 맛집'을 찾아냄으로써 유지된다는 것을.






[1단계 : 무한리필집]


  운이 좋았다. 2014년은 삼겹살, 닭갈비, 족발 등 온갖 무한리필집이 우후죽순 기립하던 때였다. 가격도 저렴해서 인당 1만 원이면 아빠의 품격을 수호하기 충분했다. 그 시절 얄팍한 주머니 사정을 고려한 최적의 장소들로 섭외하였노라 자부하지만, 고백하건대, 사실 나는 꽤 자주 그곳의 우리가 초라해 보였다. 가게 안 대부분의 고객이 어린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맛과 서비스에 대한 기대 없이 그저 배만 채우면 장땡이라는 마음으로 무한리필집을 찾는 청년들. 그 사이에 늙수그레 자리 잡은 부모님을 보면 왠지 서글퍼졌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도 이런 상황을 눈치챘는지 “이 가게는 손님들이 다 젊네?” 했다. 머쓱해진 나는 “그러게.” 하고 대화를 끊었는데 엄마는 속도 없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젊은 애들만 있는 데 오니까 좋다. 너네 아니면 이런 데 언제 와 본다냐.”


  매사 무던하고 긍정적인 사람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되려 고맙다는 엄마의 그 한 마디에, 나는 상추와 마늘을 리필하러 몇 번이나 샐러드바를 왕복하면서도 투덜대지 않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다음번엔 엄마 말대로 '젊은 애들이 자주 가는 곳'으로 향해야겠다고.



[2단계 : 양식]


  제법 그럴싸한 식사를 위해 가족 모임 식비가 5인 기준 10만 원 내외로 격상됐다. 이 틈에 부모님께 우아한 서양의 맛을 선보이고 싶었던 나는 "제가 아웃백 쏩니다!" 큰소리쳤고, 아빠는 사양도 않은 채 기분 좋게 침묵했다. 우리 가족의 먹성을 익히 보아왔기에 나는 '아웃백 할인받는 법', '아웃백 통신사 할인' 등을 검색하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드디어 결전의 날, 걱정과 달리 계획대로 6개 메뉴를 완벽하게 주문했다. 이어 음식들이 차례대로 나왔고, 애당초 애피타이저, 메인 디쉬, 디저트 순으로 먹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그저 부모님이 맛있게만 드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인생사 생각대로 풀릴 리 없었다. 놀랍게도 5명이 6개 메뉴를 먹는 데 착석부터 퇴장까지 40분 걸렸다. 깜빡했다. 고기 맛도 먹어본 놈이 안다는 것을. 부모님께 스테이크는 굽다 만 소고기 덩어리요, 파스타는 김치가 필요한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코딱지만 한 접시에 나오는 음식들을, 부모님은 정말 게걸스럽게도 먹었다. 식사 시간 내내 나는 "천천히 드세요"를 입에 달고 있었다. 우아한 서양의 맛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순식간에 지나간 식사 끝에 "커피 준비해 드릴까요?" 말하는 서버의 상냥함이 괜스레 얄밉기까지 했다.


  짠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한 몇 번의 패밀리 레스토랑 투어 끝에, 그냥 양식은 자주 먹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서툰 칼질로 눈치 보는 아빠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엄마의 '습관'을 교정할 자격은 없었다. 오랫동안 식당에서 일했던 엄마에게 느긋한 식사는 죄스러운 것이었다. 손님 없는 틈에 허겁지겁, 급할 땐 조리대 앞에 서서 해치우 듯 먹던 그 찰나들을, 내가 낯뜨겁다는 이유로 단죄할 수는 없었다.



[3단계: 한정식]


  삼 남매의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10만 원 이상의 식비도 끄떡없게 되었다. 더 이상 질보다 양을 우선시하던 옛날의 우리가 아니었다. 요즘은 특히 한식당을 즐겨 찾으며 특별한 날엔 뷔페로 향한다. 식사하느라 차마 못다 한 이야기는 카페로 이동해 마저 나눈다. 마침내 아빠의 카카오스토리는 '가성비 맛집'에서 '진짜 맛집' 목록들로 진화했다.


  2018년 5월 가족 모임.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한정식집을 예약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약소한 용돈 봉투를 준비했고, 여느 때와 달리 사진첩을 한 권 건넸다. 그동안의 가족 모임 때마다 찍은 사진들을 엮은 앨범이었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감격한 아빠는 카카오스토리에 올려야겠다며, 엄마와 앨범 양 끝을 나눠 잡고 연신 포즈를 취했다. 그리곤 죽을 때 관에 이 앨범을 함께 넣어 달라고, 어울리지도 않는 해맑은 얼굴로 신신당부했다.


  삼 남매의 독립 후에도 모임은 계속되고 있다. 오히려 가끔 보니 더 애틋해졌다. 오랜만에 만나면 서로의 안부와 사소한 기쁨을 나누기 바쁘다. 아빠가 선동하지 않아도 이제 알아서들 가족사진을 찍으려 카메라를 꺼낸다. 올해는 영상 촬영도 추가했다. 먼 훗날, 우리의 오늘이 그리울까 봐.





  이 글을 쓰기 위해 가족 카톡방에 <가족 모임 맛집 베스트&워스트 Top 3>를 물었다. 그 결과, 베스트는 한정식집과 뷔페가 주를 이루긴 했으나 곁가지로 다양한 후보군이 나왔다. 반면, 워스트는 놀랍게도 딱 한 곳만 언급됐다. 최근에 들른 족발 무한리필집이었다. 식사 후 가족 모두 입을 모아 "양념 족발에서 냄새가 난다", "물린다"며 우둘대던 곳이었다. 기본 족발, 매운 족발, 냉채 족발 등 다양한 족발을 1만 원대로 즐길 수 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우던 2014년과는 사뭇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5년에 걸쳐 오른 식비만큼, 비로소 음식을 음미할 수 있게 된 여유만큼, 자본주의란 실로 무서운 놈이었다. 자본주의 만만세!


식구(食口)
한 집안에서 같이 살면서 끼니를 함께 먹는 사람


  '식구'라는 단어의 위대함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처음엔 그저 효도 차원에서 선심 쓰듯 냈던 시간이, 욕심부려도 나무랄 것 없는 선택이었음에 감사하다. 끼니를 함께 먹는다는 것은 시간을 나눈다는 뜻이니까. 기꺼이 추억 한 편을 내준다는 뜻이니까. 켜켜이 쌓아 올린 사진들 사이로 서로 부끄러워하고 미워했던 나날들이 겹쳐졌다. 왠지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눠 먹으면, 그 모난 마음들도 꿀꺽 삼킬 수 있을 것 같다.







브런치북 <글러 먹긴 했지만 말아먹진 않아서> 가 <슬프지 않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법>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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