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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실 Oct 21. 2019

지랄 맞은 18번의 이사 유랑기

[카레] '집의 역사'를 좇아서

십팔. 하필 숫자도 참 뭐 같지.



 현재 부모님이 살고 계신 본가는 18번의 이사 끝에 정착한 곳이다. 17번과 18번 사이 삼 남매가 모두 독립하며 두 분만 남게 된 그곳에서, 그들은 '정착'이라기보다 '머무는 것'에 더 가까운 2년을 보낼 예정이다. 물론, 언제나 그래왔듯 월세로. 동네 곳곳을 누비며 살아온 이 지랄 맞은 18번의 유랑기를 나와 동생들은 '집의 역사'라 불렀다. 시간 순으로 정렬된 집들을 촤르르 꺼내다 보면 그 시절의 우리가 찰방, 하고 떠올랐다.






 놈과의 뜨거운 조우, '나무집'


 가세가 기운 후 이사 간 첫 집은 '나무집'이었다. 모과나무와 단풍나무가 그득한 마당을 지나면 만날 수 있던 2층 목조 주택. 가을이면 발그레해지는 정원이 특히 예뻤던 그곳은 운치도 낭만도 넘쳤는데, 덩달아 벌레도 넘쳐났다는 게 문제였다. 무엇보다 '나무집'에서 생애 처음 마주한 바퀴벌레는 틈틈이 자신의 민첩한 운동 신경을 자랑해댔다. 심지어 아이컨택 후 나를 향해 냅다 날아오는 대범함까지 뽐냈는데, 상대방이 원치 않는 구애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던 것 같다.


 늦은 밤, 가족 외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선봉에는 늘 아빠가 나섰다. 불을 켜는 동시에 와다다다 사각지대로 질주하는 놈들을 재빠르게 제압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이 광경을 '바퀴벌레 운동회'라고 불렀다. 운동회가 열릴 때면 우리는 아빠 뒤에 숨어 "꺅! 저기! 저기!" 하며 응원하기 바빴고, 부모님은 놈들을 신발 싸대기로 응징하기 바빴다. 흡사 두더지 게임 같달까. 치면 나오고. 치면 나오고.


 물론 비장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던 그 시절이 그립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빠른 스캔 후 적당한 무기를 찾아 후려치던 엄마의 순발력과, 급하면 맨손으로도 때려잡던 아빠의 야성미를 보며, 아주 잠깐 어른의 세계를 동경했노라 고백할 뿐이다.



 세 마리 토끼가 깡총이던 '징검다리집'


 18번의 이사 중 6번에 해당하는 '징검다리집'은 아직도 삼 남매의 추억팔이에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집은 방 2개에 주방만 갖춘 구조로 화장실이 밖에 있었다. 세월을 정통으로 맞다 못해 아주 멈춰버린 공용 화장실은,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우리에게 매일 폐교 체험을 선사했다. 바람 따라 위태롭게 덜컹이던 문걸이, 형광등의 시대에 "나 아직 안 죽었다"며 호기롭게 시위하던 백열등의 옅은 떨림까지. '화장실'이라는 말보다 '똥간'이라는 이름표가 더 잘 어울리던 그곳이 무서워, 밤이 오지 않길 기도하곤 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집의 하이라이트는 '점프'였다. 두 방 사이에 위치한 주방은 욕실도 겸했는데, 여기서 잠깐, 주방과 욕실이 어떻게 함께 있냐고? 바닥만 타일이면 됐다.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요리하는 엄마와, 그 뒤에 쭈그려 앉아 바가지에 물을 퍼 머리를 감는 아침 풍경을 상상하면 쉽다.


 여하튼, 옆방으로 이동하려면 물기가 흥건한 타일을 피해 슬리퍼를 신고 두 세 발자국 걸어야 했다. 그 몇 걸음이 귀찮아 우리는 징검다리 건너는 기분으로 신발 위를 점프했다. 깡총. 깡총. 재밌다고 통통대는 세 마리 토끼를 보며 엄마는 그러다 다친다고 혼꾸녕을 냈지만, 다행히 누구 하나 부러진 데 없이 지금까지 잘들 살고 있다.


 그땐 그랬다. 맞벌이 부모님을 대신해 세일러문, 웨딩피치, 지구용사 선가드와 함께 저녁을 보냈다. 때론 책상 위에 이불을 덮어 텐트를 만들고, 그 좁은 공간 안에 셋이 꾸역꾸역 들어가 공작질을 했다. 그때의 우린 너무 어려서 넉넉하다거나 부족하다거나 하는 개념도 없이, 셋이 꽁냥 대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면 충분했다. 아니, 그랬다고 '나만' 생각했었다.



 풍경은 머문 사람만 기억한다


 스무 살 가을쯤 이사 한 11번 ‘반지하집’. 나는 이곳의 자욱한 곰팡내와 하수구 냄새가 싫어 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았다. 내겐 그저 눈만 붙이는 곳으로 전락한 이 집에서 열일곱, 열여섯 살 동생들은 비참한 사춘기를 보냈다. 장마철이면 적갈색 세숫대야를 둘러업은 채 빗물을 퍼냈고, 전기가 끊긴 날엔 촛불에 기대 숙제를 했다. 그저 어른의 맛에 취해 집 따위 안중에도 없던 나는, 같은 공간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러다 여동생이 별안간 카레 이야기를 꺼냈다.

 특히 ‘징검다리집’에서 엄마는 카레를 자주 해줬다. 감자, 당근만 가득한 황해 사이로 아무리 뒤적여도 통 볼 수 없는 고기를 겨우겨우 낚시하던 기억이 난다. 여느 날처럼 카레 냄비를 데우려던 여동생은 무심결에 뚜껑을 였었고, 하필 노란 생의 한가운데서 장렬하게 익사한 바퀴벌레를 목격하고야 말았다. 닫혀 있던 뚜껑을 뚫고 어떻게 그 속에 들어가 있었는지, 혹시 진작부터 잠복하고 있던 건 아닌지, 별별 생각을 하던 여동생은 이내 그 부분만 덜어내고 가스레인지를 켰다.


 "누나, 이거 진짜 먹을 거야?" 열 살 남동생이 미간을 콰직 찌그러뜨리자 열한 살 그녀는 "이거밖에 먹을 거 없어."하고 묵직하게 받아쳤다. 한 번 끓이면 소독돼서 괜찮다나 뭐라나. 놈의 잔상과 찝찝함을 가스불과 함께 태워버리고, 소독한 카레를 국자로 푹 담가 그릇에 옮겼는데,


 "누나...... 또......."


 웬 걸. 카레는 이미 놈들에게 점령당한 후였다. 여동생은 싱크대에 냄비를 내동댕이치고, 돼지 저금통을 털어 곧장 슈퍼로 갔다. 그리고 천 원짜리 분홍 소시지와, 평소라면 꿈도 못 꿨던 초콜릿을 한가득 샀다. 달콤한 배부름으로 아까의 패배 따윈 잊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동생들은 최대한 얇게 썬 소시지를 정성스레 부치곤, 무결의 하얀 쌀밥 위에 한 점 한 점 소중히 얹어 먹었다. 그 후, 여동생은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정말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요즘은 카레 잘 먹어?"

 "응. 고기 잔뜩 넣어서. 근데, 절대 분홍 소시지는 안 먹어."


 모름지기 음식이란 질보단 양으로 승부하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하던 시절. 고기의 탈을 쓴 밀가루 덩어리도 '소시지'라는 명명 하에 아껴먹던 시절. 그 시절의 끝에 선 여동생이 분홍 소시지에 일절 눈길도 주지 않는 건 입맛이 변했기 때문일까, 진짜 소시지 맛을 알았기 때문일까, 그 시절을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답이 너무 선명해서 굳이 그녀에게 더는 묻지 않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이를 '집의 역사'에 대입해 보면, 우리 가족은 모두가 승자이자 산 증인인 까닭에 각자 다르게 기억해도 한결같이 정사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에겐 별 볼 일 없던 '반지하집'의 추억(追憶)이 누군가에겐 추억(麤憶)일지언정 야사는 아닌 것처럼.


 그래도 역시,

 하루빨리 이 지랄 맞은 유랑기를 끝내고 '집의 역사' 따위 존재하지 않는 정착기를 보내고 싶다.






브런치북 <글러 먹긴 했지만 말아먹진 않아서> 가 <슬프지 않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법>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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