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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Mar 13. 2024

+ 어떤 글을 쓸까? 타깃은?

18화 글쓰기를 주저하는 학생에게

- 어떤 글을 쓰고 싶나요?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글쓰기를 멈추고 딴생각을 하는 학생들이 있다. 이미 글의 주제가 잡혀 있는 학생은 주제를 향해 열심히 고민하지만 여전히 주제를 잡지 못하고 있는 학생은 방향을 잃는다. 목적도 방향도 없이 머무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점잖은 태도는 잠자는 것이다. 간혹 잠을 이기는 방법으로 인터넷 서핑을 한다. 대놓고 게임이나 만화를 즐길 배짱은 없지만 관심을 끄는 제목을 클릭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이때 처음부터 시작해 보자는 심정으로 질문을 한다.


"너는 어떤 글을 쓰고 싶어?"


'어떤 글'에는 범주의 문제부터 시작한다. 어떤 범주의 글을 쓰고 싶은지 스스로 규정할 수 있어야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어떤 글'의 내용에 대해 정리해 나가는 방법도 있다.


에세이는 보고 들었거나 알게 된 것에 대해 내가 느낀 바를 적는 것이다. 그러나 글의 종류에는 에세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이나 시는 심상을 주로 기술한 글도 있다. 흔히 느낌, 이미지로 정리되는 심상을 기술하는 글은 상상력만으로 써도 문제가 없다. 무엇을 쓰든 사상과 심상이 기반이 된다면 충분히 글로서의 가치가 있다. 사상을 중심으로 기술한 글은 '보도', '르포(르포르타주)'라고 부른다. 여기에 심상이 개입하면 보도로서의 가치를 잃는다.


시, 소설, 심상 등의 표현이 어렵다면 자신의 평소의 모습을 발견하게 해야 한다. 평소의 모습, 즉 일상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말하게 한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누구나 수줍고 서툴다. 특히 아이들은 스스로의 장점을 찾지 못하고 성격이나 성향에 관해 어중간한 단계에 놓아두는 경향이 있다. 이런 학생들에게 글쓰기는 학생의 장점, 성향이나 성격적 특성을 발견해 주는 과정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때 처음에 쓴 자기소개서를 활용하면 조금은 긍정적으로 자신의 주변을 탐색하게 된다. 자신의 구석구석을 새삼 들여다보는 느낌은 막연하게 자신을 떠올리는 것과는 다르다. 그중의 하나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떤 글을 써야 할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처음에 쓰는 '나를 찾기'의 과정은 그런 점에서 중요하다. 자기소개서가 구체적일수록 다양한 글쓰기 소재가 나올 수 있다.




주제를 잡아 글을 쓰고 있지만 머리를 감싸고 머뭇거리거나 더는 진전이 없는 학생도 많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집에서 보완하겠노라고 말하지만, 다음 시간에 보면 여전히 그 상태에 머무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생각했던 소재는 바닥이 나고 새로운 소재를 쓰자니 시간이 부족할 것 같고. 갈등에 빠지는 순간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글쓰기에서 그런 갈등의 순간은 언제나 찾아온다.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독서마라톤'에 도전한 적이 있다.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기면 읽은 페이지 수만큼 누적이 되어 마라톤 코스만큼의 페이지 숫자를 채우면 성공하는 것이다. 처음엔 별것 아니라며 시작했다. 두어 달 지나 읽은 페이지를 따져보니 남은 달은 전력질주해야 겨우 끝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생각했지만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마음이 조급해졌던 것 같다. 책을 열심히 알차게 잘 읽어보자는 취지에서 도전했던 것이었는데 어느새 페이지를 채우는 것에만 신경 쓰게 됐다. 몇 권의 책을 며칠 내에 대출하고 반납해야 목표한 숫자에 도달한다는 사실에만 신경이 쓰였다. 깊이 사색하며 읽기보다는 읽고 치우는 독서를 했다. 본래의 의미를 잃어가는 나의 독서 행위를 보면서 나의 글쓰기도 이와 같지는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간신히 주제를 정하고 글을 써 나가다가 내가 쓰는 글이 무엇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혼란에 빠지는 순간처럼 말이다. 나는 누구? 지금 어디? 지금까지의 수고를 뒤엎고 새로운 이야기를 쓸 것인가, 아니면 억지로 정체 불분명한 글을 이어갈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그만둘 것인지 고민하는 순간을 맞는다.


*이때 쓰고자 하는 글의 주제와 중심 내용의 의미, 정확히 말하면 단어의 의미를 해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쓰고 있는 글의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면 자신이 지금 쓰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진다. 정의를 확실하게 하라는 의미는 '알고 있는 단어도 그 의미가 맞는지 일단 의심하고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처음의 목표, 주제, 내용에 대한 점검이 시작된다. 이러한 행위는 중간점검 차원의 자기 감시 시스템을 작동하는 것과 같다. 주제를 놓치지 않게 하는 자기 암시가 가능하기도 하다. 쓴 만큼의 고민의 과정이 있었으니 처음보다 글의 방향이 더 선명해질 수도 있다.



- 타깃이 필요할까?


글의 주제를 잡고 쓸지 말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에 대해 효용성, 가능성, 흥미성을 따져본 적이 있다. 효용성은 독자의 측면에서, 가능성은 작가의 측면에서 고려하는 것이었고 흥미성은 두 입장 모두를 고려해서 생각하도록 수업을 진행했다.


대부분의 글쓰기를 다루는 책에서도 읽는 대상을 명확히 할 것을 권유한다. 이른바 '타깃의 상정'이다. 타깃이 좋아할 만한 내용으로, 그들의 호흡에 맞게, 그들의 언어와 감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서는 조회수나 구독자수를 가지고 인기 여부를 가늠한다. 그곳에서도 타깃을 위한 글쓰기나 배경의 설정은 중요하다.


그런데 유명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서 구독자나 조회수의 대상이 운영자가 처음 겨냥했던 대상이 포섭되었는지는 의문이다. 50대를 겨냥한 내용이 10대에게 흥미로울 수 있고, 20대에 초점을 맞춰도 60대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 유아를 위한 그림책이 중장년의 마음을 돌보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런 이유로 세상을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으로, 혹은 10년의 간극을 두어 10대, 20대, 30대... 등으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나 포괄적인 구분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타깃을 상정한다는 것이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글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읽는 사람을 상정하되 의식하지 말고 다만 편안한 글쓰기를 하라고 요즘은 말한다. 말하듯이 쓰는 글쓰기가 좋은 글쓰기라고 믿는다. 내가 편해야 독자도 편하다. 내가 재미있어야 독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내가 편해야 부담도 억지도 아닌 나를 납득시키는 글이 나온다. 그래야 상대도, 독자도 납득시킬 수 있다. 나는 내 글의 최초의 독자이며 최초의 독자는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글을 만날 수 있다.






* 다나카 히로노부, <내가 읽고 싶은 걸 쓰면 된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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