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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Sep 23. 2020

(10) 태국 : 치앙마이

police officer with weapon

점찍어 둔 죽집으로 서둘러 아침을 먹으러 나서던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로 마크마놉이 ‘경찰’이라고 적힌 명표가 붙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그런 그가 유심히 보고 있는 화면 안에서는 박신혜가 열연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은정과 내가 구사하는 비속어는 다음 세기에도 공중파 심의를 통과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혹시라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침을 먹고 돌아와 지친 몸을 침대에 누위고 은정에게 마크마놉의 오늘 동정에 대해 얘기하는데 우리의 네 귀를 의심케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창문을 열고 로비를 내려다보니 마크마놉과 한국인 2명이 입을 모아 ‘소~영~’이라며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영문을 모른 채 내려가 보니 한국인들은 태국 회사에 인턴십을 온 학생이었으며 그들이 영어를 못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로 그들은 마크마놉이 자연스럽게 나를 불러내 내가 이곳 직원인 줄 알았다고 한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과 호형호제를 하게 된대도 마크마놉과는 존댓말로 격식을 차리며 멀리하고 싶은 마음과는 정반대로 마크마놉이 나를 이렇게까지 편하게 여긴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지만 일단 체크인을 돕는다.

나의 며칠간의 행실을 되돌아본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크마놉의 관심은 오롯이 은정에게 쏠려있었다. 아마 은정의 내일이 없는 듯한 심드렁한 태도, 말을 걸어도 한참 있다 돌아오는 대답에 마크마놉은 비교적 듣는 척이라도 하는 나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여겨진다. 나와 마크마놉은 자석의 같은 극과 같아서 그가 가까워질수록 나도 모르게 반발력이 커지고 있었다.

그날 오후, 은정이 샤워실에서 구성지게 부르는 임창정의 ‘그때 또다시’를 들으며(마크 마놉은 은정을 ‘good singer’라고 칭하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마크마놉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한국어를 전혀 못하며, 한국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호스텔 개업 초창기에 다녀간 한국인이 게시한 끝내주는 리뷰 이후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그는 줄곧 한국인에게 적극적인 호감을 표현해, 이에 대한 보답으로 한 한국인이 경찰 옷을 선물했던 것이었다. 모든 의문은 말끔히 해소한 나는 한결 편안해진다.

 준비를 마친 은정과 나는 날이 토요 마켓에 가기 전, 완전히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 마크마놉은 또 선뜻 토요 마켓에 데려다준다고 했고, 이제 와서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제안을 받아들였다.(은정과 나는 이 호스텔 안에 있는 한 그의 감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그러자 마크마놉은 은정에게 카카오톡 아이디를 물었다. 은정은 지체 없이 지금은 핸드폰이 없다고 말하며 구석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 나를 가리켰다. 무방비상태로 믿었던 친구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도 모자라 나는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마크마놉과 메신저 친구가 되었다.

그의 조그마한 차 뒷자리에 앉아 재잘거리는 우리가 못마땅했는지 마크마놉은 백미러 너머로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며 ‘English only.’라고 말했다. 평소에는 두꺼운 돋보기안경으로 숨기고 다니는 매서운 그 눈빛이다. 무시할까 싶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게 아닌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한국 여행을 가면 우리 집에 자신을 재워줄 수 있겠냐, 자신의 소유의 집이 두 채이다 등 마켓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마크마놉은 귀여운 수준을 넘어선 실언들을 쏟아냈고, 어느 순간 (나와는) 상종할 수 없는 사람임을 빈틈없이 증명해냈다.

일주일에 한 번 열려서인지 토요 마켓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고, 자유의지를 빼앗긴 채 여기저기 인파에 휩쓸려 다녀야 했다. 어느덧 완연한 밤, 주변은 으슥했고, 호스텔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하는 거리였지만 마크마놉에게 연락하는 것보단 참을만했다. 은정은 나의 의견을 존중해줬다.

다음 날 한국으로 돌아가는 은정과 함께하는 마지막 밤, 오전에 체크인했던 인턴 두 명도 함께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자신의 호스텔에서 파티가 열린다는 소문은 들었는지 마크마놉은 마치 공적으로 볼 일이 있는 듯 현장에 들어왔다. 경찰옷을 입고, 한 손에는 공기 청정용 에어로졸 스프레이를 들고 있었다. 그는 허공에 뿌리는 척하며 인턴들에게 스프레이를 분사했다. ‘칙- 칙-‘. 아무리 긴 정적이 흘러도 아무도 그를 초대하지 않았고 한참을 버티던 마크마놉은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방을 떠났다. 인턴들은 뜻밖의 에어로졸 세례에 구시렁댄다.

다음날 아침, 마크마놉은 나에게 카톡을 보내왔다.

‘이쁘니들 잘 잤지? 어젯밤 너희 표정이 안좋아보였는데 혹시 인턴들이 너희를 괴롭혔니?’

지난밤 마크마놉이 우리를 보호하려고 했던 게 확실해지자 우리는 도망치듯 호스텔을 나왔다. 은정의 기차 시간까지는 서너 시간이 남았지만 그 공간에 1분도 더 머무를 수 없다. 햄버거를 먹으며 다 끝났다며 안도하고 있는 찰나, 마크마놉은 자신이 기차역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고 연락해왔다. 마크마놉은 차단당한다.


인턴들을 통해 듣게 된 사실로 그들에게 한없이 친절했던 마크마놉은 하룻밤만에 돌변해 매우 차가워졌다고 했다. 마크마놉은 자신만의 정의를 실현했던 것이다.

은정과 나는 마크마놉이 우리를 넘볼 수 있는 나무라고 생각했던 점, 그리고 자신이 지켜줘야 할 존재라고 생각했던 점에서 모욕감을 느꼈고, 이 기분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느라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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