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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아서 병난 여자 Oct 24. 2021

뇌의 힘을 믿으세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사실 뭐 하나를 진득하니 하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성경말씀과는 반대로 시작은 거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미약해지는 사람이었죠. 작심삼일조차 어려워서 아침에 한 결심을 저녁이면 어기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이런 유리 멘탈을 가진 내가 뭔가를 해낸다면, 그건 이 세상 어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겠구나!’ 라고 말입니다. 제가 약 20년 동안 꾸준히 해 온 일, 바로 글쓰기였습니다. 


  물론 직업이었습니다. 조금 더 처절하게 말하면 밥벌이. 이 일이 밥을 먹여주기 때문에, 글을 쓰면 돈이 들어오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할 수밖에 없었죠. 대부분의 직장인이 눈이 와도 폭우가 쏟아져도  기어코 출근을 하는 것처럼 늘 빈 백지 앞에 앉았습니다. 아무리 직업이라고 해도 글쓰기가 어려운 건 방송작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글이라는 게 공장에서 찍어내듯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작가도 공장에서 돌아가는 감정 없는 기계가 아니다 보니 글쓰기가 유독 힘들고 어렵고 하기 싫은 날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방송시간은 다가오고 어떻게든 글은 나와야만 하는 거죠. 


  똑같은 방송 구성작가라도 TV와 라디오는 원고 진행 방식이 다른데, 굳이 어떤 쪽이 더 힘드냐고 묻는다면 저는 단연 라디오라고 답하겠습니다. 그래서 아마 20년 방송작가 생활 중 라디오 구성작가가 차지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적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라디오가 힘든 이유는 ‘매일’ 뭔가 새로운 글을 창조해내야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TV 구성의 경우에는 프로그램의 성격과 컨셉에 맞는 아이템이 정해지고 나면, 그에 맞는 자료조사와 섭외 등이 진행되기 때문에 원고를 쓸 때는 어느 정도 기본 재료가 갖춰졌다고 보면 됩니다. 그걸 잘 구성해나가면 되는 거죠. 


  라디오는 다릅니다. 완전히 무의 상태에서 시작해야 됩니다. 순전히 작가의 머릿속에서 말입니다. 특히 라디오의 생명이라고 볼 수 있는 ‘오프닝 멘트’. 매일매일의 오프닝 원고를 생각하면 끝나지 않는 형벌을 받는 시시포스의 심정이 될 정도로 쓸 데 없이 비장해지곤 했는데요. 오늘의 원고를 마감해 놓고도, 내일이면 또 오프닝 원고를 써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날들에 생각했습니다. 

‘이젠 끝이야. 더 이상 쓸 게 남아있지 않아. 난 망했어!’ 


  물론, 그때 제가 망했다면 이런 글을 쓰고 있지 않겠죠. 정말 신기하게도 다음 날이면 시시포스에서 스칼렛 오하라로 빙의합니다. ‘내일은 내일의 원고가 떠오를 거야’ 라는 말처럼 정말 이 자리에서 곧 죽어도 아무 생각이 안 날 것만 같은데 어떻게든 한글 화면의 백지를 채워나가게 되더란 말입니다. 


  아는 건 별로 없지만, 저는 뇌의 힘을 믿게 되었습니다. 순전히 저의 경험만으로 말이죠. ‘용불용설’,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서 잘 발달하며, 그러지 못한 기관은 점점 퇴화하여 소실되어 간다는 학설처럼 저의 뇌는 ‘글 쓰는 뇌’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놀라운 뇌의 힘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어느 날, ‘머리 모양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의 헤어스타일만 눈에 들어오고, 신발을 사야겠다고 생각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발만 눈에 보이는 그런 일이요. 우리의 뇌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거죠. 오프닝 아이템을 찾는 간절한 작가의 눈은 결국 찾아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오는지는 때에 따라 다릅니다. 결국 오프닝을 쓰지 못한 채 출근을 하던 버스 안, 아이와 엄마가 나누는 대화에서 힌트가 오기도 하고요, ‘폐점’이라고 써 붙인 가게의 닫힌 문에서 번쩍 눈이 뜨이기도 합니다. 생각날 때마다 아이템을 적어 놓은 보물 수첩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다가,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엑스표를 그어놓은 것 중에서도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를 건져 올리기도 합니다. 방식은 다 다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반드시 오프닝 원고를 쓸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하는 초보들의 경우에는 ‘소재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탄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말씀드리곤 합니다. 

  “뇌가 가진 신비한 힘을 믿으세요” 


  물론, 그동안 글쓰기 쪽으로 발달하지 않았던 뇌를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매일, 오프닝 원고를 써야 하는 작가의 절박한 심정이 되어 보세요. 그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자연의 모든 것들이, 출근길에 늘 보던 풍경이, 우연히 듣게 된 낯선 이들의 대화가 당신에게 이야깃거리를 던져 줄 겁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그 글감이 또 다른 글감을 불러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독서할 때도 비슷하잖아요. 책을 잘 안 읽는 사람들은, 읽을 책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책을 즐겨 읽는 사람들은 책을 읽다 보면 그 안에 다른 책이 나오고, 어떤 내용이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면, 아주 잘 설명된 또 다른 책이 나오고 그래서 계속 읽고 싶은 책, 읽을 책이 계속 쌓이게 됩니다. 


  글쓰기도 똑같아요. 계속 쓰다 보면 내 글이 마중물이 되어서 쓰고 싶은 이야기가 또 생각나고, 나중에는 이런 일이 쌓이고 쌓여서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니까요?! 


  불가능하다고요? 믿어지지 않는다고요? 뇌의 힘을 너무 얕보셨네요.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글 쓰는 뇌’가 그렇게 쉽게 깨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몇 번 해보고 절망하지 마시고, 계속해서 훈련하시길 바랍니다. 작심삼일의 대명사였던 제가 했다면 여러분은 분명,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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