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표현해도 될까요? 저는 일종의 책상 성애자입니다. 책상이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어린 시절부터 ‘내’ 책상을 갖는 게 꿈이었고, 처음으로 자취를 하던 시절에도 다른 건 중고로 사면서도 책상만큼은 조금 저렴할지언정 새 것으로 살 정도였죠.
신혼시절에는 남편을 졸라서 꽤 비싼 책상을 샀는데, 하얀색에 서랍이 많은 완전 소녀감성의 책상이어서 나중에는 쉽게 질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책상을 통해서 이루지 못한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시키고 싶었나 봅니다.
물론, 저의 책상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는 거실에 커다란 6인용 책상을 놓겠다는 꿈을 결국엔 이뤘고요, 큰 아이의 책상을 처음 사줄 때는 제가 다 설레서 어찌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 책상은 없는 서러운 신세였습니다. 명색이 작가에, 재택근무를 하면서도 어느 때는 아이들 책상에서 어느 때는 식탁에서, 대학교 시절의 도서관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짐을 싸서 옮겨 다니며 글을 썼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정말 안 되겠는 거예요. 간절히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책과 공책을 펼쳐 놓은 그대로 둬도 되고 , 노트북 코드를 뺐다 꼽았다 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책상이 갖고 싶어진 겁니다. 너무도 간절히.
집안 곳곳을 뜯어보니 더 이상 뭐하나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간신히 안방에 딱 책상 하나 놓을 만한 공간을 찾아냈어요. 비록 안방 문이 완전하게 열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었죠. 그러면서도 사실 남편 눈치가 보였습니다. 남편은 집안을 꽉꽉 채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흔쾌히 동의하더라고요.
다음에는 이제 돈이 발목을 잡습니다. 인터넷에서 무척 마음에 드는 책상을 발견했는데, 하필이면 금액이 30만 원 가까이 되는 겁니다. 비슷한 형태의 다른 책상은 그보다 더 저렴합니다. 그런데 제가 원하던 딱! 그 분위기는 아니에요. 비슷하지만 분명히 달랐습니다. 완벽히 마음에 드는 30만 원짜리를 살 것이냐, 그와 비슷한, 조금은 꺼림칙한 17만 원짜리를 살 것이냐. 내가 이런 사치를 부려도 되나, 얼마나 번민했는지 모릅니다.
엄청난 내면의 고민 끝에 결국 30만 원짜리 책상을 샀고, 아...! 전 이 녀석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완벽한 책상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책상에서 이 글을 쓰고 있고, 저의 첫 번째 에세이도 이 책상에서 완성했고, 방송 대본도 이 책상에 씁니다. 소위 말하는 뽕 뽑은 겁니다.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신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한 말입니다. 돈과 자신만의 방이 있으면 정말 너무 좋겠죠. 글이 막 써질 것 같은 환상마저 듭니다. 하지만, 우리 욕심을 조금 낮추기로 해요. 우리가 쓰고 싶은 글은 ‘픽션’은 아니니까 그보다는 조금 현실과 타협을 하는 거죠. 돈이 조금 없어도, 나만의 방이 없어도 가능하게. 말입니다. 그래서 책상 이야기를 이리도 길게 풀었답니다.
‘나만의 방’까지는 없어도 되니, 어디에든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두시길 바랍니다. 어디 틈새를 비집고서라도 작은 책상 하나 마련하면 참 좋겠고요, 그마저도 안 되면 식탁의 정해진 자리에 책을 두는 겁니다. 일종의 작은 신호예요. 여기는 밥만 먹는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 식탁은 밥 먹을 때만 사용하는, 하루 중, 그리 사용시간이 길지 않은 곳입니다. 그곳을 나만의 공간으로 만드는 겁니다. 밥때마다 치우는 게 조금 번거로워서 그렇지, 지금 당장 실천하기에 가장 가능성 있는 곳이죠.
제가 식탁을 책상으로 사용할 때와 식탁으로 사용할 때는 앉는 자리가 달랐습니다. 식탁일 때는 아무래도 자주 일어나서 식구들을 챙겨야 하다 보니, 주방과 가장 가깝고 일어나기 쉬운 자리에 앉았습니다. 책상으로 사용할 때는 글을 쓸 모든 채비를 해놓고 가장 구석자리에 앉습니다. ‘나는 이제 여기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라는 일종의 시위인 셈입니다. 엄마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자주 목격되면 아이들도 알아챕니다. ‘지금은 엄마를 방해하면 안 되는구나’라고 말이죠, 조금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과정을 포기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 시간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알아챌 수 있을 겁니다. ‘이제 나에게 진짜 책상이 필요하구나’라는 순간을 말이죠. 그전까지는 글을 쓰다 말고, 책을 읽다 말고 치우는 일이, 조금 피곤하고 짜증 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메뚜기’ 과정이 주는 뜻하지 않은 선물이 있는데, 어디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글을 쓸 수 있는 잔뼈가 굵어진다는 장점입니다.
글쓰기의 ‘루틴’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음악, 같은 행위를 갖춰 놓으면 저절로 글이 써진다는 거죠. 실제로 일부 작가들이 이런 루틴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저는 루틴을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런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을 때는 글을 쓸 수 없다는 얘기가 되잖아요. 저 같은 생활형 작가는 어떤 조건이나 상황 타령을 할 만한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 어느 순간에든 글을 써야 합니다. 그러기엔 ‘엄마’라는 극한 상황이 글쓰기를 훈련하는 데에는 딱 좋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나만의 방이 없네, 책상이 없네. 그래서 글을 못 쓰네. 한탄하고 변명하지 말고 이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면 됩니다.
그럼에도, 엄마만의 공간을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이유, 그것은 가족들에게 보여주는 나의 의지랍니다. ‘이곳에 있는 순간만큼은 날 방해하지 말아 줘!’ 지겹도록 반복해야 하는, 때로는 포기하고 싶고, 서러워지는 그 무언의 행위를 통해 글 쓰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