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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짓기 Sep 09. 2024

장 담그기

세상의 이치는 때가 되어야 무르익는다는 걸 이번 봄에 또 한 번 실감하였다. 40일만에 떠야 할 된장을 바쁜 일정을 핑계로 30여일만에 떠버렸더니 콩이 덜 퍼져서 올해 된장맛은 장담하지 못할 듯하다. 결혼한 뒤부터 해마다 담가왔던지라 별일이야 있겠나 싶긴 하지만, 맛이 까끌까끌한 것이 조금은 심상찮다.

결혼하던 해부터 어머님은 설날에 메주를 주시면서 장은 직접 담가 먹으라고 하셨다. 첫해에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 어영부영 하다가 시기를 놓쳐버려 메주를 고스란히 쓰레기통에 버려야 했다. 풋내기 주부이니까 라는 변명을 하고 싶었는데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남편이 어머님께 고자질을 해버리는 바람에 두 해 째에는 실패를 하더라도 담궈야만 했다. 어머님은 아무래도 미심쩍으신 듯 메주를 주시면서 콩을 심어 콩타작을 하고, 불리고, 삶고, 메주를 만들어 적당한 곰팡이가 피기까지의 힘든 과정을 설명하신 후, 장을 담는 날과 방법을 자세히 말씀하셨지만, 충청도식 잔잔한 억양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건성으로만 해보겠노라는 대답만 드린 채 메주를 가져오게 되었다. 어른이 주신 음식을 쓰레기통으로 보낸 건 어찌되었든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어린 딸애를 데리고 혼자 장 담기는 쉽지 않았다. 소금물에 계란은 어디까지 떠올라야 간이 맞을 것인지, 붉은 고추는 몇 개를 언제 넣어야 할 것인지, 숯은 어디에서 파는지……. 그러면서도 자존심은 태평양 바닷물보다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다시 여쭙기는 싫었다. 대충 눈짐작만으로 소금을 물에 녹이고 체에 걸러 항아리에 붓고 씻어놓은 메주를 집어넣었다. 별일이야 있을라고, 소금이 들어갔는데 썩기야 하겠냐고, 40일을 기다리며 자주 볕을 쬐이고 신경을 써야 했지만 저녁녘에야 해가 드는 응달 집이어서 에라, 장이 되면 먹고 안되면 말지 뭘!, 마음 편한 40일을 넘겨 버렸다.

장을 뜨는 날, 날씨가 궂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눈 너머로 본 실력을 한 번 발휘해 보리라. 항아리 뚜껑을 열어보았다. 소금물이 모자란 듯 했지만 건드릴 적마다 퉁퉁 불어터진 메주가 힘없이 손바닥에 잡혔다. 조심스럽게 건진 메주를 큰 대야에 담고 고무장갑을 끼고 메주를 치대었다. 항아리에 한 켜씩 담고 소금을 조금씩 뿌렸다. 찍어 먹어보니 맛은 그럭저럭 괜찮은 듯했다. 이를 시작으로 나는 어영부영 나만의 장맛을 30년 넘게 길들여버렸다. 장 담글 때 액운을 물리친다는 그 많은 절차들을 생략해버린 채.


옛날에는 집안의 모든 음식이 장맛에 의해 결정되었다. 나물을 무칠 때도 국을 끓일 때도 장맛이 그 집안의 음식맛을 좌우할 만하기도 한 것이다. 장맛이 좋아야 음식 솜씨가 좋다는 말이 여기에 근거가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요즘에야 갖은 조미료도 많고 소금의 종류만도 적지 않은 판이니 굳이 조선간장을 음식에 넣을 만큼 간장은 그다지 유용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미역국을 끓일 때만큼은 소금보다야 간장이 더 깊은 맛이 난다는 것을 대부분의 주부라면 알고 있을 터이다.

어쩌다 우리 집에 와서 된장국이나 된장찌개를 먹는 사람들은 저마다 맛있다고들 한마디씩 보태었다. 때문에 친정식구들은 내가 된장을 담글 때마다 맛배기로 조금씩 준 된장을 아껴 먹으며 다음해에는 좀 많이 담그라고 입맛을 다신다. 그렇다고 다른 음식마저 자신 있게 한다는 건 절대 아니다. 국을 끓이면 남편은 대부분 소금을 한 번 더 찾는다. 내가 만든 반찬을 드신 어머님은 갈증 때문에 물을 갑절이나 더 드신다. 이러고 보니 된장 맛은 메주에서 좌우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남편은 어머님이 메주를 잘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된장찌개가 맛있는 것이니 어디 가서 자신 있게 추천하는 메뉴가 된장찌개라는 말은 아예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작년 가을에는 메주를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여든이 훨씬 넘은 어머님이 힘들여 만든 메주를 젊은 것이 가져다 먹는 것에 영 마음 편치 않아서였다. 아파트에서는 메주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연세 지긋한 분이 아파트에서 메주를 만들었었는데 실패해서 버렸다고, 괜히 콩값만 날릴 것이라고, 주위 사람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농사짓는 분에게 부탁해 콩을 한말이나 샀다.

어머님이 마지막으로 만들어 주신 메주인 줄도 모른 작년에는 유독 된장 맛이 좋았다. 여기저기 자랑하며 퍼다 주고 보니 나중에는 마음 놓고 풋고추 한 번 제대로 찍어먹지 못한 것에 한이라도 맺힌 듯, 이왕 만들 때 친정 동생네 것까지 같이 만들어버리자는 심사도 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서 지푸라기를 한 묶음 가져와(주인 몰래!) 씻어놓고 콩을 불리고 메주를 만드는데 삼일이나 걸렸다. 첫날에는 콩을 어느 정도 삶아야 하는지 몰라 몇 번이나 가스불을 켰다 껐다 하면서 삶아놓은 콩은 뜨거울 때 찧어야 하는지 식혀서 찧어야 하는지 이래도 보고 저래도 보다가 두어 되 가량만이 엉성하게 만들어졌다. 메주 모양이 꼭 네모여야 한다는 법이 있는가? 럭비공처럼 생긴 것도 있었고 야구공만하게 만든 것도 있었다. 초등학교 만들기 시간을 연상하게 하는 메주들이었다.

한 번의 경험은 소중했다. 전날 만들었던 실수 때문인지 둘째 날과 셋째 날은 그럭저럭 메주모양도 났고 전보다 단단한 메주가 만들어졌다. 베란다에 지푸라기를 깔고 메주를 올려놓았다가 일주일 후 짚으로 가늚은 새끼를 꼬아서 빨래 건조대에 메주를 걸었다. 야구공만하게 만든 메주덩어리가 조금은 골치 아팠다. 큰댁에 명절을 보내려 오신 어머님이 잠깐 들리셨을 때 메주를 보며 메주가 메주처럼 생겨먹지 않아 기막혀 하셨지만, 나름으로는 혼자 만들어봤다는 것에 나 스스로를 위로해버렸다. 첫술에 배부르랴!


장은 음력 정월과 삼월, 달력에 말이 그려진 庚午날 담궈야 맛있다고 하는데 삼월장 보다는 정월장이 더 맛있고 변질될 염려도 없다고 한다. 예전에 포항 근방이 고향이신 동네 아주머니에게 간장을 뺀 된장은 소를 준다는 옛말이 있다는 걸 들은 적도 있다. 간장을 뺀 된장은 빼지 않은 된장보다 색깔은 더 노랗고 맛있는 색이 된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 장은 무엇보다도 물맛이 우선이다. 별들과 함께 밤을 보내고 물을 부을 때마다 달빛이 같이 흐르던 약숫물로 장을 담갔던 해에는 된장이 더 구수하고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끔씩 약숫물에 빠져있던 별조각이 씹혀 더 고소했다면 과언이겠지!

아무튼 올해는 약수터에서 물을 길러오지도 못했고 정수기 물도 쓰지 않은 채 편의점에서 많은 물을 사다가 장을 담갔다. 동생은 사 먹는 된장보다 돈이 훨씬 많이 든다고 투덜거렸다. 애들 말처럼 하는 일 없이 바쁜 내가 시간이 넉넉하고 남은 된장이 넉넉했었다면야 그까짓 며칠을 더 못 기다렸겠는가! 1년을 두고두고 먹을 음식인데……. 아무리 날짜를 계산 해봐도 이번 주를 넘겨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날짜를 앞당겨 된장을 버무려버린 것이다.

생긴 모양새가 된장 모양을 지녔고 찍어 먹어보니 맛도 그럭저럭 된장맛이 나기는 했지만 깊은 맛을 우려내기 까지는 마음 쓰일 일이 많이 남았지 싶다. 볕살 좋은 날, 항아리 뚜껑을 자주 열어 구더기가 생기지 않는지 살피면서 더 깊은 맛을 우려내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남은 것이다.


사람도 이와 얼마나 다르랴! 채 익기도 전에 어떤 목표지점에 닿았다고 해서 설익은 자신의 내면이 남들에게 보이는 겉모습만큼 익어 있겠는가? 이후의 노력 또한 중요한 것이다. 장맛이 깊이 숙성되듯이 진정한 사람됨과 내면이 성숙 될 때라야 삶에서도 깊은 맛이 우러나는 것이다. 40년 동안 내 삶은 뚜렷한 목표도 없이 얼렁뚱땅 내가 담근 장맛처럼 살아 온 것 같다. 앞으로 내 삶의 맛은 내면의 숙성을 다지면서 서두르지 말고 내가 추구하는 목표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서둘러 담궈버린 된장을 다독이며 삶의 깊은 맛을 우려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제3회 CJ문학상 수필부문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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