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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Feb 28. 2021

밥통에서 왜 방귀 냄새가 나요?

정월이니 고추장을 담아야지.

고추장을 만든 날


 어머니의 고추장 비법? 난 이해하지 못했다. 꼭 그렇게 만들어야만 하나 늘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의 난 어머니의 고추장에 길들여졌고, 그 비법에 왈가왈부 자격을 논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고추장엔 깊이가 있고, 다른 음식과 어울리는 조화가 있다. 입안에서는 시중에서 판매되는 고추장과는 다른 매움을 감지한다. 이게 오랫동안 길들여진 미각의 본능적 반응이래도 어쩔 수 없다. 분명한 건 어머니의 고추장엔 다름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나는 그것을 인정했다는 거다. 


이후 나는 고추장을 담는다. 비법대로. 어머니께서 고집스럽게 지켜낸 그 비법대로다.


 고추장을 담는 첫 작업은 찹쌀을 물에 불리는 일로 시작한다. 물에 불린다는 건 쌀에 수분을 집어넣는 부피를 팽창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랫동안 물에 불려 화학적 변화를 보는 것이다. 말이 좋아 삭힌다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건 단지 쌀을 물속에 방치하여 썩히는 행위로밖에 비치지 않을 것이다. 쌀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나고 뽀글뽀글 거품이 인다. '이것으로 음식을 만들어도 되나' 걱정이 된다.


 처음 어머니께서 고추장을 만드는 모습을 봤을 때는 인터넷에 흔하게 떠돌아다니는 방식을 말씀드리고 싶었다. 장류 명인들이 쓴다는 다른 비법을 알려드리고 싶었던 거다. 오지랖의 과잉이었다. 음식에는 집안만의 조리 방식이 있고 전통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은 무지의 발상이었다. 지금은 그것을 인정하고 수용하기에 정월이면 어머니의 방식대로 고추장 담는다.


 찹쌀을 삭힌 후에는 삭힌 찹쌀을 씻는다. 냄새가 고약하다. 물을 품은 쌀이 작은 손놀림에도 바스러진다. 그렇다고 살살 씻을 순 없다. 어떻게든 냄새를 제거해야 하니 깨지더라도 박박 문지른다. 문지르고 헹구는 일을 반복했다. '아이고야, 가루가 되기 전에 밥을 해야겠어'. 평소 사용하는 밥통에 밥을 짓기엔 냄새가 부담스럽다. 그래서 준비한 게 식혜를 만들 때나 가끔 사용하는 대용량 밥솥, 학교 급식실에서나 사용하는 밥솥이다. 쌀을 넣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밥이 되어간다. 가느다랗게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어 로켓이 불을 뿜고 날아오르듯 하얀 연기가 웅장한 소리를 내며 솟아오른다. 소리와 동시에 부엌 전체를 점령해버린 냄새, 음식물 썩은 냄새다. 창문을 열고 환풍기를 틀었다. 냄새는 사라지지 않고 부엌 안을 회전한다. 아들이 부엌에 들어오다 기겁을 한다. 자연스럽게 손은 코로 올라간다.


"와, 엄마 이게 무슨 냄새예요. 밥통이 밥은 않고 방귀를 뀐 거예요?

"발효된 쌀로 밥을 해서 그래. 좋은 냄새야. 많이 맡아 둬. 니 몸엔 보약이 될 거다."

"무슨 소리. 아, 진짜 물도 못 마시겠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가버린다. 좋은 냄새라 했지만 남에게 자랑하고픈 냄새는 절대 아니다. 청국장을 끓였을 때 손님이 찾아오는 경우라 할까?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드는.


 밥을 퍼서 커다란 스텐 대야에 넣고 메주 가루와 고춧가루를 넣었다. 보슬보슬하다. 그 모습만 봐선 고추장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소주와 찹쌀 조청을 넣고 저으니 모습이 달라진다. 고추장의 모습이 보인다. 젓고 또 젓는다. 고추장 만들기 과정 중 가장 힘든 코스다. 클라이맥스, 이 고비를 넘겨야 하는데 힘이 빠진다. 어머니와 남편에게 바통 터치를 했다. 셋이 힘을 모아 저은 덕에 고추장이 완성되었다.


 대야에서 하루를 보낸 고추장이 숨 쉬는 항아리 속으로 들어갔다. 항아리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숨을 쉬어주면 고추장은 일 년을 책임질 먹거리가 될 것이다.


찹쌀을 5일 정도 삭혔다. 쿰쿰한 냄새가 난다.



찹쌀로 밥을 지어 메줏가루를 넣고 젓는다.
메줏가루를 넣은 밥에 고춧가루를 넣는다. 고추장을 짐작하기 어렵다.
찹쌀밥에 메줏가루, 고춧가루, 소주, 찹쌀 조청을 넣고 저어주면 고추장 모습을 갖춘다.


 음식에 정석이 있을까 싶다. 엄마의 손맛은 먹어서 익숙해진 맛이다. 그게 답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지켜낼 수 있다면 그 맛을 지키고 싶다. 남편에게 익숙한 엄마의 손맛은 어머니의 고집이었다. 나 역시 삭힌 밥의 방귀 냄새를 아들에게 각인시켰다. 아들은 그 냄새로 우리 집의 고추장 비법을 기억할 것이다.


 정월 어느 날쯤 밥통의 방귀 냄새를 생각하며 아들은 말할 것이다.

 "엄마, 고추장 만들 때 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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