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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Apr 29. 2020

어른 입맛을 아시나요?

그건 음식하는 이에 대한 예의다.

일요일 아침의 찰밥 미션.


'아이 참, 이 사람 벌써 일어났어. 갈 거면 날 깨울 것이지 또 혼자 갔어 '


일요일 아침, 옆 자리에 남편이 없음을 발견한 나는 스프링에서 튕겨나가듯 몸을 일으켜 후다닥 세수를 하고 부엌으로 달렸다.


이십 년의 결혼 생활에도 늦잠 자는 부인을 대신해 부엌일을 하는 남편을 어머니께 들키는 건 눈치 보이는 일이다. 다행히 부엌에 어머니는 안 계셨다. 오셨다 가신 것인지 아직 안 나오신 것인지 알 순 없었지만 그 순간에 그 자리에 안 계신 것만으로도 난 안심이 되었다.


내가 남편에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고 물으니 "나이가 들었는지 잠이  안 오네" 한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보통 때 같으면 남편도 일요일만은 늦잠을 잔다. 그런데 그날은 어머니께서 드시고 싶다는 찰밥을 하기로 한 날이었기에 일찍 일어났던 것이다.


이른 시간에 부지런히 움직였는지 모든 재료가 손질되어 있었다. 찹쌀은 전날밤에 불려놓아 잘 불려졌고, 은행은 프라이팬에 볶아 껍질을 벗겨 놓았고, 은 각각 네 조각으로 잘라 두었다. 대추의 껍질은 도려내어 길쭉하게 썰어 놓고, 잣과 건포도는 씻어서 물을 빼고 있었다. 팥은 한 번 끓여 물을 버렸다고 했는데 내가 물을 두 번 갈아주는 게 더 맛있단 얘길 하니 두 번째 물도 버리고 다시 삶아냈다.


재료가 다 준비되자 나는 재료를 나누었다. 3/1은 내가 쓰고 3/2는 남편이 쓰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께선 당신의 방식으로 만든 찰밥을 드시고 싶어 하셨는데 그 방법은 조리 순서가 다소 번거로웠다. 그래서 더 쉬운 방법으로 만든 찰밥과 비교하여 맛에서 차이가 없다면 앞으로는 쉬운 방법을 택하자 했던 것이다.


남편이 어머니 방식으로 찰밥을 만들었다. 먼저 물을 넣은 찜기에 면포를 깔고 끓인 후 김이 올랐을 때 면포 위에 찹쌀을 넣고 다. 찹쌀밥이 하얀 연기를 뿜어내면 찹쌀을 먹어보고 어느 정도 익었다 싶으면 불을 끄고, 뜨거운 면포를 조심스럽게 들어내어 큰 스테인리스 그릇에 찹쌀만 쏟아 놓는다.


그 다음 일을 어머니께선 물을 준다는 말로 표현하셨는데, 대접 정도의 그릇에 팥물을 덜어 설탕과 소금을 넣고 간을 한다. 간은 각자의 취향에 맞게 하면 된다. 단 것을 좋아하면 설탕을 조금 더, 짠맛이 좋다면 소금을 더.


찹쌀이 담긴 스테인리스 그릇에 준비한 재료를 차례로 넣는다. 팥, 밤과 잣, 은행. 거기에 준비한 팥물을 뿌려가며 밥을 섞어 간을 맞춘다. 간이 맞으면 다시 찜기에 찹쌀 삶은 면포를 펴고 그 위에 모든 재료를 넣고 다시 찐다. 끓어 김이 나오면 마지막으로 건포도와 대추를 밥 위에 올리고 뜸을 들인 후 소쿠리에 담아낸다. 건포도와 대추를 나중에 넣는 이유는 물러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글로 적어 보니 역시..  어머니의 방식은 까다롭다. 그럼 나의 방식은 어떨까?


나는 전기밥솥을 이용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밥솥에 모든 재료를 털어 넣는다. 팥물에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해서 밥솥 재료에 골고루 섞고 물은 보일 정도로만 넣은 후 음식 모드를 잡곡으로 맞추고 취사를 누른다. 끝. 간단하다.


밥이 다 되어 둘을 비교해보니 밥솥의 밥이 더 찰졌고, 찜기는 보슬하게 더 살아있는 느낌이다. 밥솥은 아래가 약간 누른 느낌? 떡진 느낌이 있었지만 그것 마저도 맛이 있었다. 찜기는 찐 것이니 눌 염려는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밥솥의 밥 역시 찰밥으로선 손색이 없었다는 거다.


그동안 우리는 어머니의 방식으로 만든 찰밥이 제일 맛있다 여기며 그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쉽게 만들면서 그에 못지않은 맛을 낸다면 그 방법을 택하는 게 옳지 않을까? 음식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의 방식이 늘 옳다 여기시는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는 게 신경 쓰여 다른 방법은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먹고 싶을 때 아무 때나 해 먹을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택하는 게 맞는 거 같다.


어머니껜 죄송스럽지만 결정은 났다. 다음부터 찰밥은 그냥 밥솥이다.


어른 입맛?


분주하게 밥상을 차리고, 쌉싸름한 향의 두릅까지 삶아 일요일 아침의 만찬을 시작하려는데 식탁에 앉은 아들 녀석의 반응이 영... 똥 씹은 표정이다.


"와, 오늘 밥상이 왜 이래요? 김치. 취나물, 이거(머윗대 무침), 이거(두릅), 이거(어린 깻잎 볶음). 먹을 게 하나도 없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 찰밥 싫어하는 거 아시잖아요? 저 그냥 라면 끓여 먹을게요."


"먹어 봐. 먹어보고 말을 해. 나물들도 먹다 보면 맛을 알게 돼. 아빠도 예전엔 안 먹었는데 자꾸 먹다 보니 맛을 알겠더라"


"아빠도 예전엔 안 드셨잖아요. 어른이 되니 입맛이 바뀌신 거죠. 저도 아빠 나이가 되면 먹게 될 거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아직 어른 입맛이 아닙니다."


"그래도 엄마, 아빠가 애쓰고 했는데 먹는 시늉이라도 해라"


"아빠, 음식을 억지로 먹으면 체해요!"


"여엄병, 알았다. 대신 라면은 네가 끓여 먹어"


가끔 아들 녀석에게 싫어하는 음식을 강요한다. 몸에 좋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럴 때마다 아들의 반응은 단호했다. 이번 아침밥 거절은 어른 입맛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어른 입맛?

어른 입맛이 무엇일까?

도대체 어른 입맛이라는 게 존재하기나 할까?


아들의 말을 듣고 '어른 입맛'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난 '어른 입맛'이란 게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단지 인생을 살면서 단맛 뿐만 아니라 쓴맛, 짠맛, 매운맛을 다 겪은 사람들에겐 음식의 쓴맛, 매운맛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거란 생각이 들 뿐이다. 어쩌면 그들은 인생의 쓰고 매운 맛을 그런 맛을 내는 음식을 먹으며 이겨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아직 인생이 쓰지 않는 청춘들에게 그 맛이 익숙치 않는 건 당연한 일일 터이고.


그리고 '어른 입맛'을 가진 사람들은 음식을 만든 이에 대한 예의를 아는 사람들이다. 음식이 내 입에 맞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절대 음식을 타박하지 않는. 그들에겐 음식을 만든 이에 대한 배려가 있다.


'어른 입맛'이란 인생의 모든 맛을 겪은... 거기다 음식 만든 이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아는 성숙한 사람들의 입맛이다.


부인을 위해 이른 아침의 수고도 마다않고 재료를 준비해 준 남편은 어른 입맛을 가진 성숙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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