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
분가는 없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삶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남편도 알고, 시부모님도 알았다.
나의 속은 까발려졌다. 사는 동안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 밑바닥까지 탈탈 털려 드러나고 만 것이다.
그동안 난 내 자신을 예쁘게만 포장하려 했는지 모른다. 누구에게든 착하다는 말을 들으려 했고, 힘든 일은 무조건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나의 본성에서 나온 당연한 행동이라 여기며 잘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하지만 그건 언제라도 풀릴 수 있는 포장지의 리본과 같은 것이었다. 손놀림 몇 번이면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마는 포장지의 리본.
감춰둔 마음이 들통나고 변명의 여지도 없이 시작된 일상 속엔 찜찜함이 남았다. 나의 진심은 언제든 의심받을 수 있었고, 시부모님 역시 그랬다. 나와 시부모님은 서로의 얼굴 뒤에 감춰진 마음을 계산해야 했다. 허물을 벗은 민낯은 작은 바람에도, 여린 햇빛에도 상처를 입었다. 이대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안은 채 서로가 가면속 삶을 살아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난 아버님께 편지를 썼다. 무엇인가를 해야 했고 그것이 얼굴을 대하며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였기에 편지를 써 나의 마음을 전하려 한 것이다. 편지를 쓰기로 결정하였지만 그 와중에도 자존심은 회복되지 않아 쉽게 쓰이지가 않았다. 분가 문제로 피해를 본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여전했으니 그랬던 거 같다. 형님은 시아버지께 속절없이 거절당한 피해자가 되었고, 부모님은 여전히 자식과 살게 되어 본전은 찾았다. 남편은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린 믿음직한 아들임이 증명되었으며, 나는? 나는 뭔가? 나만 분가를 원하면서 그 모습을 감춰 온 이중적인 사람이 된 것이다. 그건 완전한, 되돌릴 수 없는 나의 k.o패였다.
아버님껜 눈물을 보이며 집안 분위기를 흐린 것을 사과드렸다. 사는 동안 늘 그런 마음이었던 건 아니고 잠시 집을 보러 다니면서 느꼈던 일시적인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들떴던 마음이 꺾이면서 찾아온 서운함이 눈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도 알렸다.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하지만 한 문장이 완성되면 '죄송합니다'가 나왔고, 글이 끝났을 때 마무리도 '죄송합니다'였다.
편지가 전해진 후 아버님으로부터 특별한 답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면죄부를 받은 신자처럼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시부모님을 보는 것도 떳떳해졌다. 적어도 나의 마음은 전할 수 있었으니 착한 며느리 행세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
분가라는 거센 폭풍을 맞고 삶이 재정비 되었다. 인생은 타이밍이요,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 찾아온다고 했던가?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난 내 일을 찾았다. 국문학과 졸업이라는 타이틀 속에 독서논술 지도사와 방과후 지도사라는 자격증이 힘이 되어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을 하게 된 것이다. 몇 군데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청소년 문화 센터에서도 수업을 했다.
학교에서 방과 후 학교 수업을 하며 경험을 쌓아가고 있는 동안 우리 동네엔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해 난 남편에게 아파트에 상가가 생긴다면 학원을 하고 싶단 얘기를 했다. 그건 '생긴다면'이란 조건이 붙은 나의 기대이자 희망이었던 것이다. 상가가 지어지리란 보장도, 그 공간이 학원에 적합한 공간이 되리란 보장도 없었다. 단순히 그랬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나의 기대에 답이라도 하듯 상가가 지어졌고, 내 꿈은 현실이 되었다.
상가는 아파트와 인근 초등학교 사이에 지어졌다. 위치도 좋았다. 나와 남편은 아파트로 이사 가기 위해 마련한 돈을 학원을 계약하는데 썼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내가 방과 후 학교에서 경험을 쌓지 않았다면, 분가를 하여 아파트를 계약했더라면 학원을 계약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분가 불발이 나에게 행운으로 다가온 순간이 되었다.
'인간사 새옹지마'란 말은 맞았다. 난 분가 실패로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이 또 나를 웃게 만들었다.
남편은 학원을 계약하면서 명의를 내 앞으로 해 주었다. 아버님의 뜻이라면서 말이다. 어쩌면 그건 내 편지에 대한 아버님의 답이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집에 남길 바랐던 이유도 알았다. 집을 지키고 가꿀 수 있는 사람만이 집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게 아버님의 생각이셨던 것이다. 그 일엔 남편이 적격이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물려받은 나의 집은 계륵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버님께서 살아계시는 동안은 알지 못했던 관리비며 유지비가 우리의 생각을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님의 그늘 밑이 안전하고 편안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버님께선 자신이 가진 것을 오롯이 집을 유지하고 관리하는데 쓰실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우리에겐 아직 우리의 손이, 우리의 돈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었으니 그렇다.
나와 남편은 우리 집 관리를 위한 모든 방법을 모색했다. 방법은 뻔했다. 돈 없이 선택할 방법은 한정되어 있었으니. 우리는 '우리집은 우리의 손으로 '란 방법을 선택했다. 나와 남편은 전문가의 손이 필요한 많은 일들을 우리 손으로 해냈다. 지붕과 옥상의 방수 처리를 하고, 담장의 페인트칠도 했다. 마루와 처마의 니스칠도 우리의 손으로 했다. 일을 할수록 실력이 늘었다.
지금은 아버님의 선택을 감사해하고 있다. 그 선택으로 난 학원을 얻었고, 아파트가 싫다는 남편은 한옥을 얻었다.
그동안 관리가 힘들다는 이유로 한옥에 대한 불평을 참 많이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일의 시작이 두렵지 하다보면 그것 역시 적응이 된다.
지금도 한옥에 산다.
한때는 분가를 꿈꿨던 곳이다.
그러나 분가는 없었고, 나의 삶만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